번뜩이는 아이디어 하나로 부자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봤을 겁니다. 그 아이디어의 대부분은 생활의 불편함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것들이 많은데요. 이렇듯 인간은 불편함을 해결해 나가며 발전을 거듭합니다.
그런데 때로 ‘불편함을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여기는 생각들은 불편함 그 자체를 ‘잘못된 것’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일상생활에서 겪는 소소한 불편함에서 짜증과 분노를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조금의 불편함도 감수하려 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평소보다 느려진 엘리베이터의 속도를 ‘불편함’으로 여기며 불맨소리를 하고, 집 앞 주차장의 주차면이 부족한 실정에 5분을 걸어야 하는 ‘불편함’에 분노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느려진 엘리베이터를 타는 대신 운동 겸 계단으로 내려가볼까?’
‘좁은 주차라인과 이중주차로 고생할 바엔 조금 여유로운 공용주차장에 주차하고 걷는 게 낫지’
불편함은 시간이 조금 더 들거나 몸이 조금 더 고생하는 아주 사소한 일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사소함도 생각을 바꾸면 인생의 소중한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번은 노트북이 고장 나서 글 쓰는 작업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글을 쓰는 작업을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노트북의 자판’을 두드리는 작업을 할 수 없었던 겁니다. 학창 시절에는 연필을 정성스레 깎아 공책이나 원고지에 직접 글을 썼습니다. 그때를 떠올리며 빈 종이에 손글씨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불편함은 딱 한 문장을 쓸 때뿐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쓰는 장문의 손글씨는 글을 쓰는 ‘손맛’을 제대로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썼다 지웠다를 손쉽게 할 수 없는 불편함은 글에 진중함을 더해줬고, 글자의 획을 그을 때마다 들려오는 사각사각 거리는 소리는 마음의 안정감을 더해주었습니다..
맞습니다. 사실 불편함은 지금에 와서 보니 불편함이지 예전엔 그것보다 더 불편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 시절이 지금보다 더 정이 넘치고 행복했습니다. 어린 시절, 하루 온종일 가야 했던 추석 귀향길은 가족의 웃음이 끊이지 않는 정겨운 추억으로 기억 속에 남아있습니다.
‘불편함’이 오래도록 계속되었으면 합니다.
그 행복한 불편함이 내 삶의 활력이 되어주도록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