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결심하게 된 이유
퇴사를 결심하게 된 이유들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그동안 정말 많은 일들을 했는데, 그 일들로 나름 버티는 것에 대한 내성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힘들어하는 것들은 따로 있었다. 회사를 선택할 때 누군가에게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에게 중요한 것들은 '내가' 알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이 곧 가치가 되는 세상에서, 내 연봉을 깎으려고만 하는 이직 시장에서, 나는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두는 지 알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써본다.
1. '점심시간'에 먹는 점심
- 엔지니어로 일하다보면 점심시간이라는 것 자체가 일정하지 않다. 빨리 밥을 먹을 때도 있지만 언제 밥을 먹을 지 모를 정도로 일 하다가 '점저 개념'으로 늦은 시간에 주로 밥을 먹는다. 회사의 어떤 분은 타 회사 면접에서 이직사유를 묻는 질문에 "밥 좀 먹고 일하고 싶습니다"라고 답할 정도다. 이젠 3시, 4시에 먹는 점심이 일상이 되어서 배고픔을 참는게 익숙해졌지만 보통의 점심시간인 12시가 될 때마다 씁쓸한 건 어쩔 수 없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일해야하나? 라는 생각이 들고 늦게 점심을 먹으면 저녁식사도 애매해져 버려서 저녁도 덩달아 늦어지기 일쑤다. 점심 시간을 길게 유동적으로 가질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그냥 정말 밥 좀 먹고 일하고 싶다.
2.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
- 다른 회사로 외근을 나가 일하는 설움은 휴게실이 없다는 것에서 드러난다. 만약 밥을 점심시간에 제 때 먹는다고 하더라도 쉴 공간이 없다. 까페를 가거나, 엉덩이를 붙일 수 있는 곳이라면 우선 찾아서 앉고 봐야한다. 그럴때면 또다시 현타가 찾아온다. 사원증을 매고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이렇게 어영부영 쉴 곳을 찾아서 휴대폰 만지작 거리다 다시 남의 회사로 일하러 가는 것. 아르바이트를 하러 온 것 같기도하고 일용직 노동하러 온 것 같기도 하다. 4년제 대학을 나와서 내로라하는 좋은 직장에 다니는 줄 아는 친구들과 부모님은 내가 이렇게 일하는 걸 알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은 서러워지는 부분이다.
3. 내 자리
- 외국계 회사의 특성 이기도하고 만들려면 만들 수 있지만, 지금까지는 굳이 만들지 않았던 내 자리가 이제는 갖고 싶다. 사람은 소속감을 느껴야하는데 자리가 없으니 소속감도 없어지는 것 같다. 자리가 있다고해도 노트북을 들고다녀야하는 특성 상, 굳이 지정 자리를 만들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그러다 문득 양치세트, 마우스패드, 키패드 등 사무용품들로 꾸미기도하고 개인 용품을 자리에 구비해놓은 걸 브이로그로 보면서 나도 저런 회사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시간에 점심을 다 먹고 양치한 다음 책상에 돌아와 책을 읽으며 오후 일과를 준비하는 삶은 어떨까.
4. 롤모델이 있는 회사
- 공대 특성상 남녀 비율은 한 쪽으로 치우쳐져있는데, 나는 소수에 속한다. 남초 회사에서만 일해왔기 때문에 보통 회사에서 나이 든 여성임원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특히 엔지니어 쪽 계열에서는 외국인 말고는 본적이 없다. 엄마 나이대의 분들을 찾아보자면, 보통 회사에 비품을 관리해주시는 여사님들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 문득, 친구 회사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나이 많은 어른들이 정말 많이 보였는데, 특히 엄마 나이대의 여성 직원들이 사원증을 매고 걸어가는 모습이 많다는 것에 많은 감정이 교차했던 것 같다. 지금 회사에서 어떻게 나이들고 싶은가를 생각했을 때, 솔직히 미래를 상상할 수도, 자신할 수도 없다. 회사를 들어오기 전, 면접에서의 질문은 5년 뒤, 10년 뒤의 모습을 물어보지만, 근무지에서 5년 뒤, 10년 뒤를 걷고 있는 동성의 선배를 실제로 마주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아예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처음엔 내가 그 시작을 개척하는 사람이 되고자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그 길은 정말 보통의 노력보다 더 많은 힘듦을 수반해야한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그래서 롤모델이 있는 회사를 가고 싶다. 10년, 20년 뒤를 먼저 가고 있는 롤모델이 있는 회사를 가고 싶다.
5. 바른 말 고운 말
- 자리와 환경은 사람을 만든다. 엔지니어로 일하다보면 타임리밋의 환경에서 일하게 될 때가 많다.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하면 집에 갈 수 없다는 생각에 빨리 일을 쳐내야한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그 마음은 곧 태도를 만들게 된다. 바로 조바심 가득한 예민한 사람을 만들어낸다. 회사에서 놀랬던 것 중의 하나가 엔지니어 일 하는 사람들의 입이 대체로 험하다는 점이다. 다른 직군에서 일해본 적은 없지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는 것 중의 하나가 언어라고 생각한다. 특히, 직장에서 욕을 섞어가며 일하는 것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 급박한 환경에 매일 노출 되며 한가지 느낀 것이 있다면, 여유가 없는 사람일 수록 예민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유는 실력이 만드는 것이었다.
6. 저녁이 있는 삶
- 야근은 할 수 있다. 나를 필요로 하고 찾고, 내가 회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비록 힘들지만 보람을 느끼면서 일할 수 있다. 하지만 매일매일 언제 끝날 지 모르고 야근은 기정사실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저녁 일정을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심지어는 같은 회사 사람끼리도 저녁 약속 한 번 잡기가 어렵다.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해도 도움을 요청한 당사자만 알고 그 외에는 아무도 안알아준다는 것. 야근을 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내 저녁을 바쳐도 돌아오는 건 없었다. 자기계발이 가능한 .. 그런 삶을 살고자 한다. 영어회화 학원을 다니고 스터디를 할 수 있는 삶, 친구들과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는 저녁이 있는 삶을 갖고 싶다.
마지막은 팀원을 보호해줄 수 있는 매니저를 만나는 것이다. 관리자의 역할은 중요하다. 결과적으로 나는 6가지의 이유를 버틸 수 있었음에도 한 가지 이유, 팀원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매니저의 역할에 대한 아쉬움과 실망감을 느끼고 떠나려는 마음을 다지게 되었다.
사실 이 모든 단점들 속에서도 그걸 커버하는 것들이 있었기에 꿋꿋하게 사람들은 버티는 것 같다. 나에게 돈의 가치는 건강과 시간의 가치보다는 크지 않다는 것을 이번 기회를 통해 알게 되었고, 가치관이 많이 변하게 된 것 같다. 후회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 지금으로서는 퇴사를 후회 안할 것 같다. 사실 돈에 굴하게 될 순간이 오게 되면 다시 이 글을 읽으려고 한다.
최근에 읽고 있는 마케터의 밑줄 책에서 저자가 남긴 코멘트가 인상깊었다.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돌아가는 여정이라도 괜찮다. 방향이 옳다면. 온전히 나다운 걸음이라면" [마케터의 밑줄, 김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