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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일, 화려한 감옥이라니요?

by 윤재

바다 위의 하루는, 때로 화려한 감옥으로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오늘이 일요일인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일요일이라면 조금은 게으름을 피워도 되지 않을까 싶다가도, 오늘이 수요일임을 깨닫고 깜짝 놀랐습니다.



다양한 심리 검사에서 피검사자들은 긴장하거나 불안해하며 자신의 능력을 평가받는데, 지능 검사 초반에 ‘오늘은 며칠인가요?’ 혹은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와 같은 질문이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오늘이 어떤 날인지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특히 항구에 기항하지 않고 계속 바다 위에서 보내는 긴 해상일의 경우 날짜와 시간 감각이 무디어집니다.

그래서 매일매일의 일정을 잘 보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선상에 비치된 신문을 매일 꼼꼼히 살피며 그날 어떤 행사나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일상이 되었습니다. 시간과 장소, 그리고 내 관심사를 고려해 어떤 프로그램에 참여할지 결정하는 과정은 나만의 소중한 루틴이 되었습니다.


아침 식사 후에는 주로 운동 관련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탁구나 피클볼(실내외에서 즐길 수 있는 구멍 뚫린 공과 납작한 모양의 라켓을 이용한 탁구와 테니스와 배드민턴의 재미만을 모은 운동) 또는 농구를 하곤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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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클볼은 최근 미국에서 인기를 끄는 운동이라고 하는데, 이번 크루즈에서 처음 접해보았습니다. 공이 튀어 오르는 바운스를 기다린 후에 빠르게 공격 위치를 정하는 과정에서 긴장감이 있고 순발력이 필요합니다. 테니스나 배드민턴보다 짧아서 빠른 방향 전환이 필요하고, 운동 전에 충분한 스트레칭을 통해 몸을 준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혹자는 눈으로는 공을 쫓고 손으로는 피클볼 라켓인 ‘패들’을 도구로 사용하는 협응 운동이기에 두뇌 발달과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처음 해보는 운동이지만, 예전에 테니스를 배운 적이 있어 그런지 쉽게 재미를 느낄 수 있었던 운동이지요.


15층 center court에서 운동을 하고 나서 타이치(Tai Chi, 태극권)를 하러 7층으로 내려간답니다. 타이치 강사의 멘트 중에 ‘몸의 움직임을 느껴 보라’는 주문이 있었는데, 이젠 몸이 겉도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기도 하더군요. 헛발도 딛고 여기저기 모서리에 자주 부딪치기도 하고, 몸 움직임의 속도는 느려졌는데도 생각은 여전히 빠르니 부조화가 일어나는가 봅니다. 이젠 천천히 몸의 속도로 살아야 하는 시간에 도달했네요. 타이치의 물 흐르듯 부드럽고 우아한 동작은, 운동이 될까 의구심을 주지만, 따라 하다 보면 콧잔등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고 운동이 끝나면 개운함도 느낄 수 있게 되지요. 타이치 강사의 멘트 중에 slowly, softly, smoothly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나의 남은 시간도 강사의 말처럼 천천히, 부드럽고, 평안하게 흘러가면 참 좋겠습니다.


타이치가 끝나면 같은 장소에서 신나는 음악에 맞추어 라틴댄스에 에어로빅의 요소를 결합한 줌바를 즐겁게 하곤 했지요. 이곳에서 함께 참여한 친구들과의 소통은,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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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적인 줌바 시간이 끝난 후, 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약간의 휴식을 취합니다. 그리고 우쿨렐레를 배우러 가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뛰는 벼룩’이라는 유래를 갖고 있다는 우쿨렐레는 밝고 경쾌하며, 연주에 맞추어 노래까지 함께 부르곤 하니 즐거움이 배가 되더군요. 니체가 말했듯이, “음악이 없다면 삶은 하나의 오류일 것이다”라는 말이 떠오르는 순간입니다.


전문 강사가 우쿨렐레를 45분 동안 지도해 주니 이 시간 역시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우쿨렐레는 크루즈에서 대여해 준 것을 이용했는데 일부 승객들은 자신의 우쿨렐레 악기와 악보대까지 갖고 와 그 시간을 즐기더군요.


이렇게 오전 시간을 보내고 나면, 점심 후에도 오후 프로그램이나 이벤트들이 기다리고 있지요.


전문 강사가 진행하는 자연과학이나 인문과학 강연 시간이 있고, 노래를 부르며 함께 합창하는 시간이 있고, 볼룸댄스를 배우는 시간도 있습니다. 다양한 게임(다트, 미니 볼링, 젠가, 콩주머니 넣기, 계란 떨어뜨리기 등)을 하기도 하고, 빙고도 하고 퀴즈 시간도 있습니다. 뜨개질을 함께 하는 시간도 있고, 공예품을 만드는 흥미로운 시간도 있습니다. 수채화 그리기 시간도 있어 그림 솜씨를 자랑하기도 합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 때문에 나이 든 여자에게 외모는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10년 젊어 보이거나 입가의 팔자 주름 없애는 등의 미용과 건강에 대한 강연 시간이나 시연 시간도 있습니다. 크루즈 선내에 갤러리가 있어 명화를 감상하거나 화가나 예술사에 대한 강의 시간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갤러리 앞을 지나며 가끔씩 다르게 전시되는 그림들을 감상하는 작은 즐거움도 놓칠 수 없죠. 또 그뿐인가요 기항지에 맞추어 외국어를 배우는 시간도 마련되어 있어, 독일어, 불어, 뉴질랜드 원주민 언어 등의 기초 언어를 익힐 수 있습니다.


저녁에는 극장에서 뮤지컬 공연, 노래, 춤, 연주, 마술, 코미디, 아크로바틱 등 다양한 쇼들을 공연하면서 볼 재미를 제공해 줍니다. 곳곳의 바에서는 악단의 연주를 들거나 그에 맞추어 춤을 추거나 대화를 나누는 등 좋아하거나 즐기는 것들을 행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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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나 바쁘고 즐거운 시간인데 혹자는 크루즈의 해상일은 그저 ‘화려한 감옥’이라고 하네요. 선내에만 있어야 하니 답답해서인지 또는 기항지에서 관광을 할 수 없어서일까요, 아님 남들은 즐기는데 자신은 그렇지 못해서일까요?


우리는 이렇게 바다 위를 떠다니는 호텔인 크루즈에서, 매일의 작은 경험과 소통이 쌓여, 각각의 추억들이 켜켜이 쌓아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결국 삶은, 함께 하는 사람들과의 시간과 관계 속에서 더욱 풍요롭고 빛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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