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내에 있는 갤러리를 지나는데 인상적인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네요.
그러니 가던 발걸음 멈추고 들어가 볼 수밖에요.
호크니와의 대담을 책으로 꾸려낸 영국의 미술평론가 마틴 게이퍼드는 그의 책 <다시, 그림이다>에서, “그림은 우리를 매혹하고, 우리가 보는 것을 이해하고 즐길 수 있도록 해줍니다. 세상의 모든 훌륭한 화가들은 우리 주변의 세상을 보이는 것보다 더 복잡하게, 더 흥미롭고 불가사의하게 만들어주지요. 이것이 바로 그들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입니다.”라고 전합니다. 독일의 작가 헤르만 헤세, 그 역시 ” 내 생애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처음으로 시도한 그림 그리기가 나를 위로하고 구원하지 못했다면, 이미 오래전에 내 삶은 지속될 수 없었을 것이다 “라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크루즈 선박 내에 있는 art gallery에는 렘브란트(Rembrandt)와 같은 바로크의 천재부터 살바도르 달리, 파블로 피카소, 호안 미로, 토마스 킨케이드(Thomas Kinkade)와 같은 현대 미술의 거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현장에서 진행하는 경매(auction)도 있고, 가끔 미술사나 화가에 대한 세미나가 진행되기도 합니다. 전시와 판매를 병행하고 있는 Park West Gallery는 정기적으로 작품을 교체하며 새로운 전시를 선보여, 오가며 들여다보곤 하였답니다.
오늘은 이스라엘 화가이자 그래픽 아티스트인 이작 타케이(Itzchak Tarkay, 1935~2012)의 그림 여러 점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그림은 앙리 마티스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의 영향을 받았으며, 생동감 있는 색채와 물 흐르는 듯한 번지는 채색을 보여줍니다. 후기 인상주의와 아르누보의 요소를 혼합한 독특한 스타일로 나른한 자세로 시선을 아래로 향하거나 눈을 감고 있는 여성들의 시간을 주로 그렸는데, 그 여인들의 감거나 아래로 향한 눈두덩을 파란색이나 갈색으로 선명하게 묘사했습니다. 1935년 유고슬라비아와 헝가리 국경의 수보티차에서 태어난 타케이와 가족은 타케이가 9살 때 나치에 의해 Mauthasen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고, 연합군이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그들을 구출한 후 이스라엘에 정착했습니다.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장학금을 받으며 예술 및 디자인 연구소에서 공부하면서 당시 중요한 이스라엘 예술가들로부터 멘토링을 받았습니다. 그는 아크릴과 수채화로 작업했습니다. 그의 작품 중 상당수는 우아한 여성들의 꿈에 가까운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림 속 여인들은 활기찬 카페에서 감각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함께 있든 홀로 있든, 각자의 꿈속에 머물러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그들이 보내는 ‘시간’이 문득 궁금해집니다.
그녀들의 시간이 궁금해지는데, 함께 있거나 혼자 있어도, 자신만의 꿈속에 빠져드는 것 같아요.
오늘 당신은 어떤 꿈을 꾸고 있으신지요?
그의 그림을 보며 데이비드 에버쇼프의 소설을 영화화한 <대니쉬 걸>의 주인공이 생각났어요.
<킹스 스피치>, <레미제라블> 등을 감독한 톰 후퍼 감독의 영화 '대니쉬 걸'은 기록상 세계 최초로 성전환 수술을 받아 당시 유럽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인물을 다룬 작품입니다. 덴마크의 부부 화가였던 게르다 베게너와 에이나르 베게너(그림 속 여장으로 등장할 때는 릴리)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로 실제 인물의 삶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아내 게르다와 남편 에이나르는 덴마크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했습니다. 아내 게르다의 그림 모델인 무용가가 약속 시간에 못 오게 되자 남편에게 발레리나 복장을 입히고 화장을 시켜 모델 포즈를 부탁하게 되지요. 부드럽고 풍성한 여성 드레스를 입고 낯선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드러운 여성 옷의 촉감이 자신에게 편안함을 느꼈다고 남편 에이나르는 회고했었습니다. 아내의 그림 속에서 남편은 아름답고 우아한 여성으로 표현되었으며, 그림 속 여장을 한 남편을 ‘릴리’라고 칭했다고 합니다. 남편의 또 다른 자아 ‘릴리’를 모델로 그린 게르다의 그림들이 각광받기 시작하고, 풍경화 화가였던 에이나르는 그림 속의 ‘릴리’가 아닌 실제 생활에서도 여자로 살고 싶어 합니다.
게르다 베게너, <하트의 여왕>, 1928
자주색 슬림한 원피스를 입고 무심한 시선으로 옆을 보고 있는 여인.
의자에 발을 걸치고 양손에는 카드를 쥐고 있는 자세.
빨간 볼터치, 도톰하고 붉은 입술. 그리고 그 입술에 물고 있는 담배까지 고혹적이고 요염하기까지 하지요.
게르다 베게너, <녹색 깃털 부채를 든 릴리 엘베의 초상>, 1920
그림 속 녹색 깃털은 정체성의 빛깔이자 자기 선언의 깃발로 보입니다. 시선은 볼 수 없지만, 다문 입술엔 어떤 결심이 머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화 <대니쉬 걸>에서 아내 게르다는 멀어지는, 자신 안의 또 다른 모습에 빠져드는 남편을 향해 “당신을 어떻게 붙잡아야 할지 모르겠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남편은 “ 당신이 릴리를 불러냈지만 릴리는 늘 그곳에 있었던 거야”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이어 말합니다. “난 화가가 아니라 여자가 되고 싶은 거야.”
성전환 수술로 인한 합병증으로 ‘릴리’는 결국 사망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게르다는 “그냥 두세요. 날아가게 둬요”라고 그의 죽음을 조용히 떠나보냅니다. 20세기 초반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던 시대에 성 정체성을 찾아가는 혼란과 딜레마와 고통이 담긴 영화로 기억됩니다.
이작 타케이의 그림에서 묘하게 게르다 베게너의 그림 속 릴리가 연상되던 갤러리의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