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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 더 큰 첨벙

by 윤재


수영장, 더 큰 첨벙


배가 기항지에 정박해 있는 날의 풀장은 수면이 매우 잔잔합니다. 그 푸르고 투명한 물속에 첨벙 뛰어들어 수영을 하면 힘이 덜 들고, 팔과 발을 마음껏 내둘러도 즐겁지요. 몸의 힘을 빼고 ‘음’ ‘파’ ‘음’ ‘파’ 호흡에 집중하며 천천히 크루즈 선박의 작은 수영장을 오가는 것이지요. 크루즈 선박에서 수영을 하는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바로 넓은 바다와 그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배경으로 수영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대양 한가운데에서 수영하는 경험은 육지에서의 수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느낌을 선사합니다. 수영장에 몸을 담그고 파도 소리와 시원한 바닷바람을 느끼면서, 그저 물속에서의 자유를 즐길 수 있습니다. 크루즈 여행 중에는 이러한 자연과의 조화로운 경험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항해 중인 날의 경우는 때로 수영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답니다. 수영장의 물이 이리 ‘철석’ 저리 ‘쏴아’ ‘차를륵’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소리가 크고 그 큰 움직임이 강력하게 전달됩니다. 수영을 하는 중에 앞에서 물결이 덮치면 잠시 몸의 기운을 빼고 물결이 지나가기를 기다립니다. 사는 것도 마찬가지겠지요. 어느 순간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 파도의 거친 물결처럼 무섭게 감당하기 어렵게 다가오면 잠시 숨을 고르고 기다려 보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맞서 앞으로 헤치고 나가려면 더 큰 에너지와 노력이 필요하니까요.



coral princess swimming pool.jpg




수영을 하다가 숨이 차거나 때로 머리가 지끈 아파지면 바로 옆의 hot stub 자쿠지의 뜨거운 물속으로 들어가 몸을 위로해 줍니다. 이 안온하고 편안함이 참 좋습니다. 수영 배우기 잘했다고 스스로를 토닥입니다. 햇빛 쾌청한 날 자쿠지에 들어앉아 수영장을 내려다보면 데이비드 호크니의 수영장 그림들이 생각납니다.


‘수영장의 화가’와 ‘현존하는 가장 비싼 작가’라는 별칭까지 갖고 있는 영국 출신의 데이비드 호크니(1937~ )가 그린 <더 큰 첨벙(The Bigger Splash, 1967)>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눈 시리도록 청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현대적인 건물, 그 건물의 커다란 유리창, 캔버스 하단을 모두 차지하고 있는 푸른 수영장 물의 고요한 정적 속에서 첨벙이는 물살의 움직임이 강조되어 있는 그림, 저절로 시원함과 청량함이 전달되며 경쾌한 물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아요. 호크니는 이 짧은 순간을 묘사하기 위해 2 주간 물의 모습을 관찰하며 생동감, 청량감을 표현하고자 노력했답니다. 호크니의 그림 <더 큰 첨벙>에서는 수영장이라는 공간과 물보라의 청각적 감각이 인물은 부재하지만 자유로움과 해방감이 전해지기도 합니다. 호크니의 '더 큰 첨벙'의 시간성, 공간성, 청각적인 감각을 떠올리면 오규원 시인의 <빗방울>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빗방울이 대상(공간)에 떨어지는 소리(청각)를 다양하게 묘사하여 감각적입니다.


<빗방울>... 오규원

빗방울이 개나리 울타리에 솝-솝-솝-솝 떨어진다

빗방울이 어린 모과나무 가지에 롭-롭-롭-롭 떨어진다

빗방울이 무성한 수국 잎에 톱-톱-톱-톱 떨어진다

빗방울이 잔디밭에 홉-홉-홉-홉 떨어진다

빗방울이 현관 앞 강아지 머리에 돕-돕-돕-돕 떨어진다


솝-솝-솝-솝 떨어지는 소리를 발음해 보면 제 몸이 마구 가벼워지는 것 같습니다. 어린아이의 몸으로 돌아가

시골 할아버지댁에 와 있는 듯하거든요. 공간 이동, 시간 이동이 가능해지는 시인 것 같습니다.


수영장과 관련한 그림 중에는 이 화가를 빼놓을 수 없지요. 강렬한 색상으로 대담하고 새로운 표현기법을 주창하여 “야수파”란 이름을 얻게 된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 1941년 암 수술을 받은 후, 붓으로 유화를 그릴 수 없게 되자 ‘컷아웃(cut-out)’이라 불리는, 종이를 색칠하고 가위로 잘라 붙이는 콜라주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수영을 좋아한 마티스지만 노후 병환으로 수영을 못하게 되자 색종이로 수영장을 표현한 작품 <수영장>은 1975년 뉴욕현대미술관(MoMA)이 구입하였습니다. 전시실의 벽 가운데를 연결하여 마치 수영장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우리는 뉴욕현대미술관에서 강렬하게 받았습니다. 저절로 제 팔이 앞으로 나가면서 마치 수영이라도 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어요. 수영하는 사람들이 율동 속에 넘실거리는 동작들을 단순하게 표현하고, 물고기들이 평화롭게 춤추듯 유영하는 모습을 울트라 마린색으로 생동감 있게 표현한 마티스의 <수영장> 앞에서 우리는 한동안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보았습니다. 신체적인 불편함을 겪는 역경 하에서도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 멋진 결과물을 보여주는 마티스였기에 그의 작품들이 시대를 넘어 사랑받는 이유일 것입니다. 아마도 마티스는 시련이나 고난을 이겨내는 긍정적인 마음의 힘,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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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마티스 , <수영장>, 1952, 뉴욕현대미술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프랑스판 ‘무한도전’인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2년째 백수로 우울한 남자, , 예민한 남자, 무엇이든 손 대면 망하는 파산 직전의 사업가, 히트곡 전무한 로커 등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해 실패와 좌절이 익숙한 각자 자신만의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수중발레팀을 구성하였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경기에서도, 인생에서도 금메달을 꿈꾸며 도전을 시작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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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에서처럼, 인생의 물결을 헤쳐 나가야 할 때, 수영은 그 자체로 자기 치유와 성취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될 것입니다. 현재의 시간이 무기력하거나 자존감이 하락한 상태인 경우 배불뚝이 아저씨들의 분투기를 보면서 변화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갖게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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