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예술이 숨 쉬는 도시들, 자유와 문화가 교차하는 땅.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따스한 햇살 같은 예술의 향기가 여행자를 맞이하는 네덜란드.
오늘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을 가기 위한 항구 에이무이덴(IJmuiden)에 기항하는 날입니다.
네덜란드 서부에 위치한 인구 3만여 명의 작은 마을인 에이무이덴(IJmuiden)에는 수많은 명소, 어선이 곳곳에 있는 항구로 넓은 모래 언덕이 기분 좋게 펼쳐진 해변이 있습니다
네덜란드,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으면 어릴 적 읽었던 동화와 튤립 그리고 풍차가 먼저 떠오릅니다. 국토 대부분의 해발고도가 해수면보다 낮은 나라. 제가 알고 있는 동화의 버전은 “추운 어느 날 어린 소년이 심부름 다녀오다가 뚝의 조그만 구멍에서 물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고, 흙과 돌을 뭉쳐 구멍을 막고 사람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임시방편 아이의 솜씨로 막은 구멍이 터져 버리고 할 수 없이 주먹으로 구멍을 막고 사람들을 기다렸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고, 집에 오지 않는 아들을 찾아 나선 부모와 동네 사람들이 뚝 밑에서 팔을 구멍에 집어넣고 실신한 아이를 발견했지요. 마을을 물바다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위험을 이 어린 소년이 구했다는 아름다운 내용“입니다. 실화가 아닌 동화에 기반한 이야기이지만 지금은 네덜란드 곳곳에 ’ 제방의 구멍을 막은 소년‘ 동상이 있다고 합니다.
우수한 시설과 서비스를 자랑하는 암스테르담 여객 터미널은 크루즈선이 빠르고 안전하게 접안 가능한 부두 시설뿐 아니라, 승객들의 편의를 위한 터미널 시설이 주목할 만하지만, 오버 투어리즘에 반대하면서 암스테르담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에이무이덴 항구에 기항하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암스테르담을 찾다 보니, 어찌 보면 크루즈 승객들이 불편을 감내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감탄할 수 있는 암스테르담이 계획되고 발전된 것은 소위 "황금시대"(17세기)였습니다. 암스테르담은 깔끔하게 제한된 지역과 직선 운하가 특징인 계획도시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암스테르담은 건축의 도시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한 건축물이 있는데, 우리는 1988년에 암스테르담에 머문 적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미술관 가는 것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만일 하루 더 배가 암스테르담에 머물렀다면, 좀 더 암스테르담의 현재를 둘러보았을 테지만 미술관 가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비가 오는 암스테르담에서 버스를 50분 정도 타고, 하이네켄 박물관 앞에서 버스를 하차하자, 상쾌한 공기와 함께 흠뻑 비에 젖은 거리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후까지 자유시간이 주어진 덕분에, 하차한 곳에서 도보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 쉽게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미술관 입장권은 서울에서 미리 예매를 해 두었고, 에이무이덴 항구에서 암스테르담까지 가는 교통편과 운하 크루즈는 크루즈 선사의 tour 버스를 이용했습니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은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미술관의 하나로 당시 네덜란드 왕이었던 루이 보나파르트에 의하여 1808년에 개관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1885년에 개관되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온 관람객들과 단체로 온 유치원생부터 중고등학생들로 미술관 입구는 분주했습니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Rijksmuseum)은 네덜란드 예술과 역사의 진정한 보물창고로,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빛나는 공간입니다. 그림뿐 아니라 공예품, 가구, 판화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웅장한 고딕 양식과 르네상스식의 건물은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고요한 아름다움과 함께 기대와 설렘으로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미술관에 들어서자, 각 시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작품들이 우리를 맞이했습니다. 우선 그동안의 자료들을 바탕으로 2층 명예의 전당(Gallery of Honour)부터 관람하기 시작했습니다. 명예의 전당은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걸작들을 감상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어 성스러움마저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해상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시민계급이 형성되고, 신흥 귀족이나 경제적 여유를 갖고 있는 상인들은 호화로운 저택을 소유하면서 가족이나 지인들의 초상화와 일상생활을 포함하는 풍속화 등을 인테리어처럼 집에 장식하길 즐겨했습니다. 이들의 평범한 일상과 취향을 담은 그림들로 네덜란드의 독자적인 화풍이 형성되기도 하였고요. 렘브란트 판 레인이나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등이 이 시기에 각광받았던 화가들이랍니다.
명예의 전당은 넓고 환한 공간으로 설계되어, 각 작품이 가진 독특한 아름다움을 최대한 부각하도록 조성된 것 같습니다. 적절한 조명과 여백이 각 작품을 강조하며, 관람객들이 작품과 깊이 있는 교감을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오랜 세월 동안의 손상과 오염을 제거하기 위한 1 년 여의 보수 공사가 완료된 후 온전한 상태로 전시가 되는 렘브란트 하르먼손 반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의 "야경꾼"은 그 깊은 명암 대비와 인물들의 표정에서 살아있는 감정을 느낄 수 있어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물론 이 “야경꾼” 그림 앞에 제일 많은 관람객들이 있었고요.
렘브란트, <야경꾼>, 1642,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렘브란트의 <야경꾼>은 마치 밤의 숨결을 담아낸 듯, 역동적인 인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야경꾼>의 원래 제목은 "The Militia Company of Captain Frans Banning Cocq"로 민병대원들의 집단초상화입니다. 낮을 배경으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투쟁한 민병대의 초상화를 그렸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덧입혀진 유약이 색이 바래 명암의 대비가 심해지면서 마치 야간에 순찰을 도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림의 제목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그림 속의 어두운 분위기가 요즘 관람자들에게 더 큰 신비감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그 당시 초상화에서는 보통 정렬된 인물들이 한 줄로 나열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야경'에서는 인물들이 다소 역동적이고 비대칭적인 구도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마치 갑작스럽게 움직이거나 활동을 시작하는 순간을 포착한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이러한 역동적인 구도는 관객에게 민병대의 활동적인 모습을 전달하며, 마치 그림 속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1642년에 완성된 이 그림은 가로 4.5m 세로 3.7m의 커다란 그림으로, 캔버스 위에서 빛과 그림자가 춤추며, 각각의 캐릭터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간직한 채 생생하게 살아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명예의 전당 입구에서부터 시선이 모아지는 곳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깊은 명암의 대비가 이끌어내는 극적인 효과는 마치 순간이 영원히 멈춘 듯 보이기도 합니다. 중간에 서 있는 대장관의 위엄 있는 모습은 관람객을 시선을 집중하게 만들지요. 주변의 민병대원들은 각기 다른 표정과 자세로 긴장감과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며, 그들의 무장은 평화를 지키기 위한 결의가 엿보이지만 그림의 당사자들은 자신의 모습이 상대적으로 작고 어둡게 표현되어 있어 불만을 제기했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인간의 본질을 조명하며, 감상하는 이로 하여금 잊지 못할 여운을 남깁니다.
명예의 전당에는 빈센트 반 고흐가 “ 빵 한 조각만 먹으며 2 주일 간 계속 앉아 있을 수 있다면, 내 인생에서 10년이라는 기간도 기꺼이 내놓을 것”이라고 했던 렘브란트의 <유대인 신부>가 있습니다. 저도 반 고흐가 렘브란트의 <유대인 신부>를 보면서 느꼈던 경이로움을 느껴보고자 오랫동안 세세히 그림을 가까이서 보기도 하고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림 속 두 사람의 시선은 마주치지 않고 엇갈리지만 살짝 올라간 입꼬리로 보아 이 순간을 경건하게 느끼며 서로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상호작용이 느껴졌습니다. 여성의 풍성한 붉은색 드레스와 남자의 섬세하게 묘사된 반짝이는 황금빛 의상이 풍요로움을 줍니다. 여성이 착용한 귀걸이, 목걸이, 양손의 팔찌와 양손의 반지 등의 액세서리로 보아 부유한 집인 것으로 보입니다. 렘브란트는 광택을 표현하기 위해 물감에 석영 등 유리조각을 섞어 사용했다고 합니다. 두터운 재질감을 주기 위한 시도와 유리조각을 섞은 물감 등을 활용한 렘브란트의 노력이 지금까지 이 그림에서 전달되는 것으로 보아 그의 의도는 성공적인 것 같습니다. 렘브란트의 '유대인 신부'는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라, 사랑과 신뢰, 인간 내면의 복잡한 감정을 담은 작품입니다. 반 고흐의 명언은 그가 이 그림에서 느낀 감동을 극대화한 표현으로, 예술이 주는 감동의 깊이를 잘 보여줍니다.
렘브란트, <유대인 신부> 1665년 경,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그런데 저는 명예의 전당에서 가장 많이 바라본 그림은 렘브란트의 <사도 바울처럼 그린 자화상, 1661>이었습니다. 부와 명성을 얻었던 적도,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던 적도 있었으나 이제는 다 지나가 파산을 하고 부인의 묘지까지 팔아야 했던 궁핍함은 회한과 후회를 가져올 수밖에 없고, 더 이상의 기대나 낙관의 가능성이 없는 현재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그의 처연한 표정이 안타까웠습니다. 렘브란트의 삶이 바로 이 그림 한 장에 녹아 있어 사랑받는가 봅니다.
이 자화상을 보고 있으면, 나이를 먹는 과정이 단순히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자아와 세상에 대한 깊은 이해가 축적되는 여정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고난을 겪고 나서 깊은 신앙과 지혜를 얻은 인물로, 렘브란트 역시 그가 겪은 인생의 시련을 통해 내적 성장을 이룬 것으로 보입니다. 이 자화상은 그의 고통을 이겨내며 얻게 된 지혜와 수용의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더 이상 과거를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고민하는 대신,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법을 깨닫고 있는 듯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더 많은 변화와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만, 그것을 슬픔이나 후회로만 바라보지 않고, 그 속에서 지혜와 성숙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렘브란트는 그 과정을 예술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보여준 위대한 예술가입니다. ’ 늙는다는 것은 시간의 구겨진 옷을 입는 ‘것으로 묘사한 시인의 처연한 글귀가 생각나게 하는 렘브란트의 자화상 앞에서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렘브란트, <사도 바울처럼 그린 자화상, 1661>,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렘브란트의 자화상 옆에는 그가 사랑했던 아들 티투스를 그린 그림이 같이 걸려 있어 아들을 잃은 렘브란트의 애통함이 배가 되어 전달되었습니다. 그는 먼저 곁을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며 “빚 독촉받는 지금의 상황 때문인지 젊은 날의 야망을 꿈꾸던 내가 아니라오. 외부적인 상황이 어려울수록 나의 정신적 성숙과 표현의 힘은 더 좋아지는 것 같소”라고 편지를 쓰며 스스로에게 견딜 수 있는 힘을 주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채무 독촉의 상황이 점잖고 따뜻할 수는 없을진대 그 상황에서 렘브란트가 얼마나 불안과 고뇌와 후회에 찬 시간을 보냈을지 먹먹하고 무거운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명성과 부를 쌓아갔더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렘브란트는 그와 반대로 젊은 시절에는 작품 의뢰도 많이 받고 부인과 행복했지만 부인 사망 이후 경제적 여건이 곤궁하게 되었지요.
렘브란트, <수도승 차림의 티투스>, 1660,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빛과 사물을 포착하는데 뛰어난 일가견이 있다고 평가되며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1632~ 1675)의 작품은 현재 35점에 불과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여기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 ’ 우유를 따르는 여인’(Milkmaid·1660년),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Woman in blue reading a letter·1663년), ‘연애편지’(The love letter·1669-1670), ‘골목길’(The littele street) 등 4점이 소장돼 있습니다.
1. '우유를 따르는 여인' (The Milkmaid, 1660년 경)
‘우유를 따르는 여인’은 페르메이르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집안의 일상적인 장면을 그린 작품입니다. 17세기 네덜란드 가정에서 일하는 하녀의 사회적 지위가 당시 다른 나라에 비해 높은 편으로 전문 직업인으로 대우받았다고 합니다. 그림 속 여인은 우유를 붓고 있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으며, 페르메이르는 이 장면을 통해 빛과 색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했습니다. 여인의 얼굴은 부드러운 빛에 비쳐 따뜻한 느낌을 주고, 그녀의 손동작과 우유가 흘러내리는 장면은 세심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튼실한 체구의 하녀는 파란색의 앞치마에 값비싼 청금석을 갈아 만든 파란색을 사용하였습니다. 이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빛의 변화입니다. 우유를 붓는 여인의 얼굴에 부드럽게 드리운 빛은 화면의 다른 부분과는 대비되는 느낌을 주며, 페르메이르는 이를 통해 공간감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인의 신중하고 평온한 모습은 관객에게 평화로운 일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페르메이르가 3년 치 빵값 대신에 빵집주인에게 그려줬다는 기록이 있다는데 유명 화가의 빵이 그려진 그림은 빵집 홍보에 도움이 된다고 빵집 주인은 생각했겠지요.
2.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 (Woman in Blue Reading a Letter, 1663)
이 작품은 편지를 읽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페르메이르 특유의 섬세한 빛의 묘사와 색채가 돋보입니다. 여인은 파란색 옷을 입고 있으며, 그 옷은 화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색으로, 관객의 시선을 끕니다. 그림 속에서 여인은 편지를 읽으며 집중하는 모습이 담겨 있는데, 편지라는 매개체를 통해 비밀스럽고 친밀한 감정을 표현하려는 페르메이르의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림에서 빛은 여인의 얼굴과 손을 부드럽게 감싸며, 차분하고 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이 작품은 페르메이르가 그린 다른 작품들처럼, 일상의 순간을 찬란하게 포착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작품은 당시 편지가 중요한 소통의 수단이었음을 상기시키며, 그 시대의 감성적인 소통 방식을 시각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편지를 사용하지 않고, 그 대신 이메일, 문자 메시지, 그리고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와 같은 디지털 소통 방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변화는 인간의 소통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로 인해 ‘편지’라는 매개체의 의미가 변화한 점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디지털 소통은 그와는 사뭇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메일, 문자 메시지, SNS 등은 즉각적이고 즉흥적인 소통을 가능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문자 메시지를 보내며, 짧고 빠르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디지털 소통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 빠르고 효율적인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편지처럼 깊고 신중한 소통의 특성을 놓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3. '연애편지' (The Love Letter, 1669-1670)
‘연애편지’는 사랑과 소통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페르메이르는 여인의 표정을 통해 심리적 깊이와 감정을 전달하려고 했으며, 그녀의 눈빛과 몸짓은 보는 이로 하여금 편지의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하게 만듭니다. 이 작품의 빛은 여인과 배경을 구분 짓고, 그 사이의 관계를 더욱 강조하는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안주인이 하녀가 건네는 편지를 받으며 긴장한 표정으로 보아 비밀스러운 내용이 담겨있을까요?
주위는 어둡게 칠하고 여인과 하녀만이 밝게 그려져 있습니다. 시선을 집중하게 만드네요. 코드를 쥔 왼손가락의 힘과 무릎에 살포시 얹어 놓은 악기가 이 편지로 인해 안정과 조화에 균열이 일어날까요?
그 후의 진행이 궁금해집니다.
4. '골목길' (The Little Street, 또는 작은 거리, 1658)
‘골목길’은 페르메이르가 그린 도시 풍경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페르메이르가 주로 그린 실내 장면과는 다른 장르로, 좁고 작은 골목을 중심으로 한 일상적인 풍경을 그린 것입니다. 그림 속에서는 한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의 외관이 그려져 있으며, 벽의 질감과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인상적입니다. 빛은 거리와 집 안으로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가며, 페르메이르는 이 작품에서 공간감과 실제적인 질감을 아주 정교하게 묘사했습니다. 특히 집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이 그림을 더욱 생동감 있게 만들며, 관객은 마치 이 거리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골목길'은 페르메이르가 보여주는 일상의 아름다움을 진지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그의 예술적인 섬세함과 주변 세계에 대한 깊은 관찰을 엿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집 안 마당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청소를 하고 있는 여인이 청색치마를 입었고, 주인인 듯 보이는 여성은 열린 현관 입구에 앉아서 바느질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주저앉아 놀이 열중하고 있는 집 앞 풍경입니다. 벽돌들의 작은 균열도 세심하게 묘사했네요. 여인들이 입은 옷과 아이의 옷에서 풍성한 볼륨감이 전해집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집이 페르메이르가 결혼 전에 살았던 집이라는 추론과 장모님의 집이라는 등 분분합니다. 기록이 남아 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는 네덜란드 중서부의 도시 델프트의 서민가정에서 태어났는데, 부모님은 그림에 재능을 보이는 그를 교육시키는 데 열성을 다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예술 교육에는 많은 돈이 들어갑니다. 오죽하면 ‘자녀 예술교육을 시키면 집이 서서히 망해간다’라는 씁쓸한 말이 나왔을까요. 당시 평균적으로 자녀를 3~4명 낳았던 것을 비교해 보면, 아내를 사랑했던 페르메이르는 엄청난 다산인 15명의 자녀를 나았지만 성인이 된 자녀는 11명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 대부분에 서명을 하지 않았고, 작품 제작 연도도 표기하지 않아, 후일 그의 작품인지에 대한 진위 여부 소동이 있기도 합니다. 그의 작품은 진위 여부의 소란을 겪고 있으며 잦은 절도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처음 주목받을 당시 대부분의 작품이 다른 화가들의 것으로 여겨져 혼란이 있었고, 네덜란드의 화가 한 판메이헤런이 위조해 판매한 그림이 페르메이르의 초기작으로 인정받는 등 진품 감정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페르메이르는 ‘카메라 옵스큐라’를 참고해 그림의 구도를 설정하고, 원근법과 명암, 구도 등의 조화를 이끌어냈습니다. 당시 그가 주로 사용했던 청색 물감은 청금석이라는 보석을 갈아서 만든 것으로, 매우 비쌌습니다. 페르메이르 그 자신의 삶은 곤궁했지만, 작품을 위해서는 청색을 아낌없이 사용했습니다. 생활고와 스트레스, 격무에 시달린 페르메이르는 1675년 43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사후 이름은 사라졌고, 남긴 작품 대부분은 빚을 갚기 위해 팔려나갔습니다.
페르메이르 사후 200년이 지나 재조명되고, 지금은 영원불멸의 거장으로 기억되고 사랑을 받지만 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음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주제로 하는 소설과 영화가 있습니다. 미국의 수잔 브릴랜드가 지은 <델프트 이야기>도 페르메이르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는 기폭제 역할을 합니다. 미국의 소설가 트레이시 슈발리에가 자신의 상상력으로 쓴 <진주 귀고리 소녀>라는 소설은 1999년에 출간되었습니다. 영화는 2003년에 개봉되었는데, 피터 웨버가 제작하였고, 콜린 퍼스, 스칼렛 요한슨 등이 출연하였습니다.
2014년에 개봉한 영화 <모뉴먼츠 맨>은 실화를 기반으로, 히틀러 때문에 사라진 예술품을 찾기 위해 만들어진 특수 부대 이야기를 담고 있지요. 잔인하고 기나긴 세계대전이 이어가던 중, 예술품들이 파괴될 위험에 처하자 미술 역사학자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모여 모뉴먼츠 맨을 결성합니다. 전쟁으로부터 예술품들을 보호하기 위해 모인 모뉴먼츠 맨은 자신들의 목숨이 위협받기 시작하지만 끝까지 예술품들을 지키지요.
조지 클루니가 제작, 각본, 감독, 주연을 모두 맡은 2014년 영화로 평단의 반응은 "소재가 참신하고, 영화의 의도도 훌륭했지만, 결국은 할리우드식 미국 만세 아냐 이거?"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영화적인 각색이 많이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경우도 6.25 당시 북한군의 게릴라 부대를 소탕하기 위한 팔만대장경이 있는 해인사 폭격 명령을 거부해 해인사를 지킨 김영환 대령의 사례가 있으며, 모뉴먼츠 맨 부대원들은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 문화재들을 보존하고자 모뉴먼츠 맨 부대 부활을 건의했지만 거부되었다고 합니다.
명예의 전당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들을 보고 나서,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과 네덜란드 화가들의 그림들을 둘러보았습니다. 외부 대관 나갔는지 프란스 할스의 부부초상, 웃는 기사, 민병대 초상화를 못 본 것이 매우 아쉽습니다. 많은 관람객들로 붐비고 각 전시실을 찾아다니는 것도 수월한 것이 아니어 ’Ask me’ 직원을 찾아 도움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1886년에 동생 테오로부터 새로운 색채 스타일의 프랑스 화법에 대해 듣고 파리로 이주했습니다. 그는 모델 비용을 아끼기 위해 여러 자화상에서 이를 시도했습니다. 리드미컬한 붓놀림과 눈에 띄는 색상으로, 그는 여기서 패셔너블한 파리 시민처럼 자신을 묘사했습니다. 꽉 다문 입과 형형한 눈빛에서 반 고흐의 결기가 보이는 듯합니다.
한스 볼롱기에르, <꽃이 있는 정물화, Still Life with Flowers> 1639, 암스테르담국립미술관
풍성하고 아름답게 꽃들이 화병에 꽂혀있습니다. 줄무늬가 있는 튤립도 많습니다. 단색의 튤립과 달리 셈페르 아우구스투스는 흥미롭게도 병충해 때문에 생기는 별종 튤립이라고 합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기에 부자들은 남들과 다른 색다른 튤립을 소유하고 싶어 했고 희귀한 별종 튤립을 수집하기 시작했답니다. 이러한 희귀 튤립의 가격이 치솟기 시작해 수집 열풍이 투기로 번지게 되고요.
그런데 1637년 2월이 되자 1년 넘게 오르던 튤립 알뿌리 가격이 공급이 많아지면서 가격이 폭락하기 시작했답니다. 이 사건으로 네덜란드 경제가 크게 흔들렸다거나 많은 사람이 파산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실제로 네덜란드 경제에 미친 영향은 크지 않았다는 것이 현재 학계의 중론이라는군요. 하지만 자본주의 최초의 거품 경제 현상이었기에 과열된 투기 현상을 경제 용어로 ‘튤립 버블’이라 부르게 됐답니다.
화가 볼롱기에르(Hans Bollingier, 약 1600~1675)의 인생사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남긴 작품이 대부분 꽃을 그린 정물화였기에 꽃을 전문으로 그린 화가 정도로 추측할 뿐이며 다른 작품에도 같은 종의 튤립을 그린 것으로 보아 그도 튤립 투자에 관심을 가졌거나 당시의 광풍을 알고 그렸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답니다. 한스 볼롱기에르의 그림에서 하얀 꽃잎에 빨간 줄이 그려진 튤립은 ‘셈페르 아우구스투스(영원한 황제)’라는 이름의 별종 튤립이 한가득 화병에 꽂혀있고 화병 옆 탁자 위에는 말라버린 꽃과 도마뱀, 달팽이와 애벌레가 그려져 있습니다.
‘가장 비싸고 아름다운 꽃과 조금 시든 꽃, 떨어져 말라버린 꽃을 함께 그려 우리 인생의 순리를 표현한 것이다. 도마뱀은 인간의 기만과 죄, 끊임없이 풀을 갉아먹는 애벌레는 탐욕과 허무한 욕망을 상징한다. 달팽이는 짐을 지고 땅에 붙어 기어 다녀야 하는 운명이므로 원죄를 지고 세상에 온 인간을 뜻한다’ (진병관저 ‘기묘한 도서관’에서 인용)
지금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재배되어 그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봄의 꽃 튤립.
봄이 길고 밤이 시원하며 겨울에도 춥지 않고 습한 토양의 네덜란드는 튤립을 재배하기 위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터키인들이 투르반이라고 부르는 튤립은 16세기 후반에 터키에서 들어온 후 네덜란드에서 급속도로 퍼져 나갔고 지금은 튤립을 국화로 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 튤립 구근 수출의 8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1600년대 초에 벌어진 튤립 투기 열풍은 주식투자자들의 교훈이 되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일명 ’ 황제 튤립‘은 당시 암스테르담 시내의 집 한 채에서 4채까지 구입할 수 있는 가격으로 치솟기도 했다고 합니다.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 빛과 어둠의 화가‘ 렘브란트도 대출까지 받아 튤립 투자를 했다가 파산하였다니 미래 수익에 대한 낙관적 기대가 크면 클수록 무리한 투기가 일어나는가 봅니다. 그런데 꽃 투기는 네덜란드만 유일한 것이 아니라 이미 7세기 초 중국 당나라에서 모란꽃 투기가 있었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부를 향한 투기는 여전한 것 같습니다.
단시일 내에 이익이나 부를 얻을 수 있다고 기대하는 심리와 욕망이 투기를 불러일으킵니다. 연구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빈곤층이 불행한 이유는 점점 더 가난해져서가 아니라 부자만 더 부유해졌기 때문인데 주류경제학에서는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군요. 그저 가진 것이 없거나 부족한 자들의 아둔한 질투로 부러우면 ’노~~ 력‘을 하라고 대안을 제시한답니다. 사회의 안정성을 낮추고 경제적 비효율성을 발생시키는 주요 원인을 무시하거나 비중을 낮게 둔다는 것이지요. 투기 심리의 다양한 요인으로 시장에 대한 과도한 낙관론이나, 주변인의 성공사례, 정보의 비대칭성등로 후발 주자들이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된다고 추론합니다. 한스 블롱기에르의 튤립꽃에서 투기로 확장된 시간이었습니다.
국립미술관 연구도서관은 거장들의 명작 못지않은 국보급의 희귀 도서와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2층에서는 도서관 서가에 꽂혀있는 책들과 시민들이 책을 읽거나 공부하는 열람실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가지런히 꽂혀있는 알록달록한 책과 나선형 계단 무거운 밤색의 색이 도서관의 분위기를 고요하고 침착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많은 화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예술이 시대와 사람을 연결하는 힘이 얼마나 큰지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비록 프란스 할스의 그림들은 못 보았지만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의 경험은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고,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국립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나서 운하 크루즈로 암스테르담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았습니다. 도시 전체를 둘러싼 운하 시스템은 17세기 골든 에이지의 상징으로, 도시를 흐르는 물길은 마치 예술작품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기지요. 그 물 위를 떠다니는 작은 배들이나, 물가를 따라 늘어선 고풍스러운 건물들은 잊을 수 없는 풍경을 만들어냅니다. 암스테르담의 운하를 따라 보는 것만으로도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겠지요. 그곳의 물결은 시간의 흐름을 잔잔하게 보여주고, 도시의 역사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열정적인 가이드가 설명을 해줍니다.
암스테르담에서의 하루가 충만한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컨디션은 저조한 하루였습니다.
목소리가 잠겨 소리가 나오지 않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