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후
내 인생 단 한권의 책
속수무책
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느냐 묻는다면
척 내밀어 펼쳐줄 책
썩어 허물어진 먹구름 삽화로 뒤덮여도
진흙 참호 속
묵주로 목을 맨 소년 병사의 기도문만 적혀 있어도
단 한권
속수무책을 나는 읽는다
찌그러진 양철 시계엔
바늘 대신
나의 시간, 다 타들어간 꽁초들
언제나 재로 만든 구두를 신고 나는 바다 절벽에 가지
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느냐 묻는다면
독서 중입니다, 속수무책
- 김경후,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 2024년 창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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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이의 소통 가능성을 찾아 언어의 은밀한 숨결과 울림을 일구어 보려는 처절한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라고 평가받은 김경후 시인.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녀는 이화여자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한 후,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8년 <현대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하였습니다.
‘속수무책(束手無策)’이라는 사자성어는 말 그대로 ‘손을 묶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라니,
일의 영역일까요 관계의 영역일까요 아님 내면의 영역일까요...
그 얼마나 막막하고 불안하며 무기력함을 느끼게 될까요.
살면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속수무책의 상태지만
답을 찾을 수 없을 때, 독서에서 그 길을 찾을 수 있을까요?
찾아보면서 질문하는 것이 필요하지요.
질문하지 않는 삶은 그저 상황을 받아들이는 소극적인 대응입니다.
시인 이장욱은
“함부로
겨울이 오겠어?
내가 당신을 문득
겨울이라고 부를 수 없듯이
어느 날 당신이 눈으로 내리거나
얼음이 되거나
영영 소식이 끊긴다 해도 함부로
겨울이야 오겠어? ”라고 그의 시 <겨울에 대한 질문>에서 묻습니다.
독서
책을 많이 읽는다고 위대하거나 좋은 사람이 되지는 않을 수 있으나,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데는 도움이 될 것입니다.
“주머니나 가방에 책을 넣고 다니는 것은, 특히 불행한 시기에,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 다른 세계를 넣고 다니는 것을 의미한다.” 오르한 파묵의 이야기처럼
시절과 그 시절로 인해
내면이 복잡하고 괴로울 때
가끔씩 책 속으로 쉬어가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을까요?
그림은 또 다른 언어입니다.
깊고 뜨겁고 아니 차갑고 무거운 언어!
얀 리벤스, <Still Life with Books>, 1627-1628년경,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1963년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Rijksmuseum)이 구입할 때까지 개인 소유였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전문가들은 이 그림이 렘브란트의 작품일 것이라고 오인되었다고 합니다.
리벤스와 렘브란트는 스튜디오를 공유했었다고 합니다.
겉모습이나 외모는 속일 수 있습니다. 언뜻 보면 뒤집어진 류트로 보이는 것은 단지 악기를 담는 오래된 나무 케이스입니다. 책으로 보이지만 그것들은 단지 빈 제본, 청구서나 기타 문서를 담기 위한 가죽이나 양피지로 만든 축 늘어진 덮개일 뿐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버려진 것, 가치가 없는, 일시적인 오래된 물건들입니다. 바니타스(vanitas) 장르의 하나로 볼 수 있는 그림입니다. 캔버스에는 주전자, 접시, 책, 유리잔, 몇 입 물어뜯은 빵, 지구본, 악기케이스 등이 보입니다.
빵은 아마도 갓 구운 것이겠지요.
캔버스 뒤 쪽으로는 희미하게 지구본이 보입니다.
새것과 오래된 것이 함께 있습니다.
소유와 부가 덧없고 부질없음을 의미하는 바니타스 회화입니다.
미술사학자 아서 K. 휠락 주니어(Arthur K. Wheelock Jr.)는 이 빵을 성체 성사에 대한 의미로 간주했고, 반 틸(Van Thiel)은 책으로 보이는 묘사가 실제로 책이 아니라 파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림의 바인딩의 주요 특징은 "파멸 상태"를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고 반 틸은 해석했습니다. 그림에 있는 것과 같은 제본은 환전상, 변호사, 세금 징수원의 이미지로, 타락한 장부는 타락한 사람들을 상징할 수 있으며, 장부는 "흠 없는 주전자, 반짝이는 화이트 와인 잔, 신선한 흰 빵"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 번쩍이고 신선한 물건들은 부패의 반대를 나타낼 수도 있고, 종교를 상징할 수도 있다고 해석합니다.
소유와 부 뿐이겠습니까
권력.
권력.
소유했고
믿었던
그 권력도 덧없고 부질없겠지요
얀 리벤스의 그림과 더불어
또 하나의 그림이 다가옵니다.
속수무책(束手無策)
두렵고 막막한 이 상황을 견디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질 수밖에 없겠지요
가냘프고 애처롭고 안타까운 절망적인 희망
그 희망을.........
“한 점의 그림을 통해 누구에게나 소망의 줄이 끊어질 때가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자신의 정치적 역할도 모든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데 있다는 것을 배웠다”라고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그의 자서전 <버락 오바마의 담대한 희망>에서 전합니다.
‘영국의 미켈란젤로‘라고 칭해지기도 하는 조지 프레드릭 와츠( George Frederic Watts, 1817~1904)는 영국의 화가이면서 조각가입니다. 그는 희망, 사랑, 삶과 같은 우화적인(allegorical, 비유적인)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피아노를 만드는 장인이었던 와츠의 아버지는 아들이 ’ 음악의 어머니‘로 불리는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과 같은 날에 태어나자( 2월 23일) 조지 프레드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예술에 대한 소양이 깊은 아버지였지만 사업에는 서툴러 집의 경제 상황은 곤궁했다고 합니다. 세 명의 형제가 와츠가 어릴 때 홍역으로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마저 그 후 세상을 떠나 와츠는 내향적이고 진중한 성격으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어린 와츠의 그림 재능을 알아보고 자신이 아는 조각가의 스튜디오에 보내 공부를 시켰답니다. 1835년 로열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비정기적으로 다니며 거의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하였다는군요. 어떤 특정한 학파나 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하지 않고 상징적인 주제나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를 그렸다고 합니다.
이 그림에 대해 미술평론가들은 ’ 절망‘이라고 제목을 붙였으나, 정작 화가 자신은 ”단 하나의 코드로라도 연주할 수 있다면 그것은 희망“이라면서 ”희망“이라는 제목을 고집했다지요.
전통적으로 희망의 모습은 닻으로 그려지지만 와츠는 더 신선하고 독창적인 접근 방식을 추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지구본 위에 앉아 줄 하나만 빼고 모두 끊어진 리라를 연주하는 눈먼 희망을 그렸습니다. 그녀는 가녀린 음악을 듣기 위해 고개를 숙이지만 그녀의 노력은 쓸쓸해 보입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희망보다는 슬픔과 황폐함입니다. 그림의 우울한 느낌은 부드러운 붓놀림과 떠다니는 지구본을 감싸는 반투명 안개로 인해 더욱 강화됩니다.
조지 프레드릭 와츠, <희망>,1886, 테이트 브리튼, 런던 소장
속수무책(束手無策)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앞에서
눈먼 희망을
오늘도 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