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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맨해튼- 르 아브르

by 윤재


맑은 날 우산은 무엇을 할까요?



오늘은 르 아브르(Le Havre)에 기항하는 날입니다.

빛의 다양한 변화를 순간적으로 묘사하여,

인상주의를 시작한 클로드 모네의 <인상, 해돋이>의 현장이 된 르 아브르.

선명한 태양과 붉게 물든 하늘 아래로 희미하게 모습을 보이는 배와 크레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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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 <인상 해돋이>, 1872,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그림을 분석한 전문가에 의하면, 르 아브르 항구의 아침 풍경이 그림이 그려진 날은 1872년 11월 13일로 추정하고 있답니다. 지금은 전 세계적인 인정과 인기를 얻고 있는 그림이지만, 이 그림이 처음 제시되었을 때는 평단과 관객들의 극심한 냉대와 야유를 받았다지요.


새로운 시도, 변화, 발상의 전환은 기존 주류 집단으로부터 거부나 반대에 직면하기 쉽지요.


<인생을 건너는 한 문장>의 저자 정철은, 맑은 날 우산은 무엇을 할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 문장을 읽을 때, 신선했습니다.

저 역시 그 사물의 본래적인 기능에 고착된 생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맑은 날 우산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기능적 고착(functional fixedness)은 대상이나 사물에 대해 기존 사용해 오던 방식이나 해결 방법으로만 한정시키는 인지 편향을 의미하지요.


칼 던커(Karl Duncker)는 촛불 실험(또는 양초실험, candle problem, 1945)에서 피험자들의 문제 해결에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 해결하는 것에 대해 정신적 장벽(mental block)으로의 기능적 고착을 주장하였습니다. 던커는 참여자들에게 양초 1개, 압정이 들어 있는 압정 상자 1개, 종이 성냥 1갑을 주고 주어진 재료들을 이용해 초를 벽에 붙이되, 촛농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요구하는 실험을 실시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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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압정으로 양초를 벽에 고정하려고 시도하거나, 양초를 녹여 벽에 붙이려고 하였습니다. 일부 극소수의 참여자들만이 압정상자를 비우고, 압정상자의 한 면에 압정을 여러 개 박아 벽에 고정시킨 후 성냥으로 양초의 밑을 약간 녹여 상자에 고정시켰습니다. 그리고 촛불을 켰습니다. 던커는 참가자들이 압정을 담아두는 압정상자 본래 기능에만 고착된 나머지 문제 해결을 가능케 하는 다른 사용 방법을 구안하지 못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실험은 이후에 심리학과 경영학 쪽에서 창의성, 보상, 동기 등과 관련한 주제로 실험이 반복 확대 진행되었습니다.


고착은 삶의 행동과 사고방식이 굳어져 고정관념이나 고집으로 나타나 상황 변화에 유연하지 않게 되지요. 대부분 나이가 들수록 고착현상은 심해지고요. 고착화 경향성이 심할수록 나와 타자, 세상을 경계 지으려 합니다. 진정으로 경계해야 할 일이지요. 자신의 생각과 생활 방식을 콘크리트화 하면 적응이 어려워지지요. 끊임없이 자신을 말랑말랑한 상태로 만드는 연화작업이 필요한 세상입니다.


오늘 기항지인 르 아브르의 재건은 고착에서 벗어난 신선한 시도 중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르 아브르(Le Havre)라는 도시 이름은 프랑스어로 ‘항만’ 또는 ‘항구’를 의미하며, 르 아브르는 마르세이유에 이어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큰 항구지요. 센 강어귀에 있어 전략적 요충지로 인정받았지만, 본격적인 항구 건설이 시작된 것은 1517년 프랑수아 1세의 지시에 의해서라고 합니다. 노예무역과 국제 무역으로 성장한 항구도시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 중 하나인 르 아브르는 군사 지리적으로 중요한 항구였습니다. 모네와 같은 인상파 화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아름답고 고전적인 미가 있던 옛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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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퇴하던 독일군을 완전히 밀어내기 위한 미국과 영국의 폭격으로 도시의 90%가 파괴되었던 르 아브르는 지금은 중요한 유럽의 관문항으로 성장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 5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된 드골은 전쟁으로 인해 초토화된 르 아브르를 재건할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당시 르 아브르 시장은 도로나 도시 계획을 전쟁 이전과 동일한 모델로 건설하려고 했는데, 이와 다르게 프랑스 정부에서는 프랑스에서 가장 심하게 파괴되었던 이 도시를 한 건축가에게 맡겨 재정비하게 하여 다른 유럽의 도시들에게 모범으로 삼게 하려고 했습니다. 건축가 오귀스트 페레(Auguste Perret)를 비롯한 100여 명의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르 아브르 재건 사업에 참여하면서 콘크리트 도시 ‘바다의 맨해튼’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는 재건 사업을 이루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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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페레(Auguste Perret, 1874~1954)는 벨기에 익셀에서 석공의 아들로 태어나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 건축과정에서 공부하고 건축물에 철근 콘크리트를 처음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유럽의 대부분의 도시는 석조들을 전통적으로 사용하여 건축되었고 당시 보수주의적 건축관을 지닌 많은 사람들과 격렬하게 충돌하면서 철근 콘크리트라는 단순하고 실용적인 재료를 시도하여 오랫동안 비난을 받았지만, 철근 콘크리트를 이용한 건축물의 새로운 역사를 열었다고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콘크리트의 장점은 빠르고 튼튼하게 건물을 짓는다는 것입니다. 폐허가 된 도시를 빠르게 복원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전쟁 이후 복구에서는 도시 재건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격자구조, 바둑판식 도시 구조를 형성하게 되었고, 다른 프랑스의 도시와는 다르게 레고 블록을 쌓아 올린 듯한 반듯한 비슷한 건물구조는 삭막한 외양으로 충격을 주었지만 콘크리트 건물의 잠재력을 보여 주었다고 합니다.



전쟁 전의 르아브르.png

전쟁 전의 르 아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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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후의 건축물들



지금은 건축학이나 도시공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는 살아있는 교재가 될 수 있는 도시라고 하네요.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전쟁 난민을 수용하기 위한 페레의 아파트는 르 아브르 시민들의 생활양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게 되었습니다. 공간과 채광, 실용성을 강조한 주거시설 아파트는 가족이 늘어나면 방 하나를 늘릴 수 있고, 반대로 자녀들이 집을 떠나면 방의 개수를 줄일 수 있도록 콘크리트 기둥의 철거와 부설이 가능한 구조로 건설되었습니다. 공간을 분리할 수 있는 파티션, 가스레인지와 싱크대의 모습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변변한 가구를 구입할 수 없었던 당시 실용적인 붙박이 장의 설치는 전쟁 난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콘크리트의 혁신적인 이용 방식 특허 등 새로운 기술 공법이 도입된 뛰어난 도시 계획을 높이 평가받아 2005년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화단과 분수가 예쁘게 꾸며져 시민들의 휴식처로도 인기 있는 르아브르 시청사와 세인트-조셉 교회, 현대적인 구조의 앙드레 말로 미술관 등의 다양한 볼거리가 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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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의 하나인 ‘르 아브르의 여름’에서 조성된 구조물로, 2017년부터 설치된 Vincent Ganivet의 선명하고 강렬한 멀티컬러 컨테이너입니다. 대형 아치 2개에 다양한 컬러를 입히고 레고 조립하듯이 만든 설치 미술품입니다. 이제는 르 아브르를 상징하는 구조물이 되었지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운동을 조금 한 후 천천히 거리로 나섰습니다. 밝은 햇빛도 좋습니다. 크루즈 터미널을 벗어나자 바로 어시장이 있는데, 노르망디 해안에서 갓 잡은 싱싱한 생선들의 판매하는 부지런한 아침 장사가 끝난 뒤, 뒤늦게 찾아온 새떼들이 어시장 뒤처리를 하고 있습니다.



오귀스트 페레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성 조셉 교회(l’église St. Joseph)를 먼저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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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페레(Auguste Perret)가 설계한 이 교회의 건축은 1951년에 시작되어 그가 사망한 후 1957년에 그의 작업 그룹에 의해 완료되었습니다. 12,768개의 색유리창을 포함하는 107m 높이의 탑은 시내 어디에서나 보이는 영적인 등대이자 도시의 랜드마크입니다. 스테인드 글라스의 색상은 교회의 규정에 따라 정해졌고, 빛이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과할 때 건물 안에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폭탄 테러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성 요셉 교회는 유럽 재건 시기를 상징하며 20세기 건축 걸작 중 하나로 돋보입니다만, 익숙한 전통적인 유럽 도시들의 성당과 달라 약간 거부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성당은 겉에서 보면 투박하고 거칠지만 내부는 아름다워 반전의 묘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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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조셉교회를 둘러본 다음 앙드레 말로 현대미술관으로 향했습니다. 미술관 개관 시간 전에 도착을 해서, 주변 바닷가 산책로를 걸어보기도 하며 인상파 화가들이 어느 장소에서 그림들을 그렸을까를 나름 추측해 보는 즐거움도 누렸습니다.



미술관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천장과 벽면 대부분이 유리로 되어 있어 밝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빛이 건물 내부로 들어오기 전에 filtering 하는 장치를 마련하고 빛의 투과를 약화시키는 유리창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이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외젠 부댕 사망 후 동생이 약 230여 점의 작품을 기증했고, 미술애호가 엘렌 센 역시 200 여점의 인상파 그림을 기증하였답니다. '르 아브르'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프랑스 인상파의 거장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그림과 그의 스승 외젠 부댕(Eugène Louis Boudin, 1824~1898)의 작품이 많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부댕의 작품이 매우 많았으며, 모네의 '수련', '페캉, 바닷가',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탑과 의회당', '바랑주빌의 해안 절벽'과 '테오도르 제리코'의 '늙은 이탈리아 농촌 여인', 에두아르 마네의 '바다 위의 배들, 해지는 풍경'을 비롯해'카미유 피사로'의 '오후 태양 아래 거센 바다, 르 아브르의 작은 만', 알프레드 시슬리, 장 프랑수아 밀레 등의 유명 작품들이 전시돼 있습니다. 19세기와 20세기 초 프랑스 예술계의 가장 위대한 거장들의 해변 작품을 감상하면서 건물 바로 너머 센 강 하구를 오가며 스쳐가는 온갖 종류의 배를 감상해 볼 수 있는 것은 덤입니다.



거의 독학으로 공부한, 모네의 그림 스승 부댕은 모네에게 ’ 야외에 나가 물에 비치는 빛의 움직임과 밝은 색조에 집중하라 ‘고 조언을 했고, 훗날 모네는 자신이 진정 화가가 된 것은 외젠 부댕 덕분이라고 했답니다. 모네는 부댕과 함께 한 순간에 대해 “그는 너무도 자상하게 가르쳐 주었다. 나는 서서히 눈을 떴고, 자연을 이해하게 되는 한편 자연을 사랑하는 법을 깨달았다”라고도 추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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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실내.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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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젠 부댕의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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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젠 부댕의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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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젠 부댕, <Still Life with Peonies and Syringa>, 1856-1862





모네 Rough Sea at Etretat, 1883.png

클로드 모네, <Rough Sea at Etrtetat>, 1887







모네의 수련.png

클로드 모네, <수련>, 1904





장 푸이 still life.png

장 푸이, <Still Life, Bunch of Oranges in a Pitcher>,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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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프랑수아 밀레, <Portrait of Charles-Andre Langevin>, 1845




시슬리 풍경 The Bridge in Moret, Storm Effect, 1887.png

알프레드 시슬리, <The Bridge in Moret, Storm Effect>, 1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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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 피사로, < Quai du Pothuis on the Banks of the Oise>, 1882




르누아르 니니 로페 초상화.png

오귀스트 르누아르, <니니 로페즈 초상화>, 1876



미술관에서 ’ 바틱부부‘를 만났습니다. 늘 바틱 셔츠를 입고 다녀서 우리는 그들을 바틱부부라 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쿨렐레를 할 때 옆 좌석에서 조용히 커피 한 잔을 놓고 책을 읽고 있습니다. 우리가 댄스홀에 있을 때 그들도 자리하며 술 한 잔을 앞에 놓고 홀을 응시하다가 나와 춤을 춥니다. 키가 무척 큰 그의 아내는 기다란 팔을 이리저리 휘휘 휘적휘적 천천히 자신의 속도로 그러나 리드미컬하게 춤을 춥니다. 남편이 어깨를 다쳐 부목을 대고 있을 때는 혼자서 홀에 나와 연주에 맞춰 자신만의 댄스를 즐깁니다. 그들은 호주의 태즈메이니아에서 왔다고 합니다. 조용조용 천천히 말하는 그들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고요한 사찰에서 진행하는 명상의 시간에 이야기를 듣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한국 서울에서 왔다고 알려줬지만 뉴욕 메트로박물관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일본관의 전시물들이 흥미롭고 좋았다고 제게 말합니다. 서울 한국 대신에 그들에게는 일본인으로 입력이 되었나 봅니다. 나중에 굳이 수정해 주지는 않았습니다. 3,000여 명의 승객 중 한국에서 온 승객은 우리뿐이었는데.....

뭐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그들에게는 중요하게 고려할 사항은 아니었던 듯싶습니다.

아무렴 어떻습니까

서구인들이 대부분인 승객들에게 한국인 승객이 탔는지의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기항지 르 아브르는 동명의 영화 < 르 아브르>를 생각하게 합니다. 핀란드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감독한 착한 성품의 인물들이 여럿 등장하는 잔잔하며 따뜻한 감동을 주는 영화입니다. 착하지만 가난한 중년의 구두닦이 마르셀은 외상값에 시달리면서도 그 금액만큼 자신이 단골이라고 엉뚱하게 응수하기도 하며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하지요. 항구에는 밀입국한 가봉 출신들이 들어있는 컨테이너가 발견되고, 한 소년이 도망을 칩니다. 밀입국한 소년 이드리사와 우연한 만남 이후 마르셀은 도와주게 되고 마르셀의 이웃 사람들도 한 마음으로 조력합니다. 생존을 위해 밀입국할 수밖에 없는 그들이 만일 우리 땅, 우리 앞에 등장하면 우리는 어떤 태도로 대처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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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장면 .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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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선내에서 짧은 프랑스어 강좌를 영국 출신인 크루즈 디렉터가 진행하였는데, 거기서 배운 문장 중, I'm lost에 해당하는 불어, Je suis perdu(e)를 배울 때 떠 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요즘이야 똑똑하고 편리한 통신과 IT 기기인 스마트폰 덕에 길 잃을 염려는 덜 하겠지만

심리적 길 잃음일 경우,

성취하고자 하거나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실패했을 때,

아님

목표마저 모호해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가고는 있으나 이 길이 이 방향이 맞는 것인지

혹여 엉뚱한 곳에서 시간과 열정을 쏟는 것이 아닌지 헷갈리고 불안할 때,

나는 어떻게 했지 되돌아보게 되었지요.


“인생은 너무 이르면 알 수 없고, 알고 나면 너무 늦다”라고 셰익스피어는 말했다지만, 지름길과 성공의 길만 가고 싶은 이 마음을 어찌하겠습니까



앙드레 말로 현대미술관에서 크루즈터미널까지 천천히 걸으며 "괜찮다고~" 조용히 말해보았습니다.


모든 승객들이 안전하게 귀선을 하고 배가 출항하려고 할 때 선장의 안내 방송이 있습니다.

선장이 바뀌었군요.

전 선장의 방송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가 힘들었는데 그래도 이번 선장은 좀 낫습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동유럽이나 그리스 또는 이탈리아 출신 선장의 영어는 알아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녁 식사 시간에 웨이터 위로즈에게 선장이 새로 왔나 본데 방송 안내 목소리가 그래도 알아듣기 낫더라 했더니, 자기들도 전 선장의 방송을 들을 때마다 서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하고 논의들을 했답니다.


선장의 경우는 전에는 4개월씩 근무했었는데 최근에는 2개월마다 교체된다는군요.

아마도 과중한 책무와 업무 강도로 2 개월씩만 근무하나 보다고 설명해 줍니다.

안전을 책임지고 신속한 의사 결정을 해야 하는 자리인 만큼 그의 몸과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고려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도 괜찮은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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