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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만진 슬픔

by 윤재

8. 오래 만진 슬픔


이문재



이 슬픔은 오래 만졌다

지갑처럼 가슴에 지니고 다녀

따뜻하기까지 하다

제자리에 다 들어가 있다



이 불행 또한 오래되었다

반지처럼 손가락에 끼고 있어

어떤 때에는 표정이 있는 듯하다

반짝일 때도 있다



손때가 묻으면

낯선 것들 불편한 것들도

남의 것들 멀리 있는 것들도 다 내 것

문밖에 벗어놓은 구두가 내 것이듯



갑자기 찾아온

이 고통도 오래 매만져야겠다

주머니에 넣고 손에 익을 때까지

각진 모서리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리하여 마음 안에 한 자리 차지할 때까지

이 괴로움 오래 다듬어야겠다



그렇지 아니한가

우리를 힘들게 한 것들이

우리의 힘을 빠지게 한 것들이

어느덧 우리의 힘이 되지 않았는가




지난달 초 이후 한 달이 지나도록 안정이 되지 않습니다.

경악이 분노로

분노가 불안으로

불안이 무력감으로

그러다 보니

깊은 슬픔이 차 오릅니다.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한 빈센트 반 고흐,

그는 ‘슬픔’은 작은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손가락으로 쓱쓱 빗어 대충 넘긴 듯한 머리카락

늘어진 가슴

둥그렇게 말린 등 허리

가느다란 팔

접힌 가슴살과 아랫뱃살 사이에 봉긋하게 생명이 자라고 있는 배

우는 것일까요



sorrow.png

빈센트 반 고흐, <슬픔>, 석판화, 1882년,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불행했던 청년 빈센트 반 고흐가 돌보았던 불행한 여자.


“그녀도, 나도 불행한 사람이지. 그래서 함께 지내면서 서로의 짐을 나눠지고 있어.

그게 바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주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만하게 해주는 힘 아니겠니?

그녀의 이름은 시엔이다”라고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는 전합니다.



저의 슬픔도 작은 시작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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