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
시가 그렇고
술이 그렇고
아가의 뒤뚱한 걸음마가
어제 만난 그의 지친 얼굴이
안부 없는 사랑이 그렇고
지하철을 접수한 여중생들의 깔깔 웃음이
생각나면 구길 수 있는 흰 종이가
창밖의 비가 그렇고
빗소리를 죽이는 강아지의 컹컹거림이
매일 되풀이 되는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렇다
누군가와 싸울 때마다 난 투명해진다
치열하게
비어가며
투명해진다
아직 건재하다는 증명
아직 진통할 수 있다는 증명
아직 살아 있다는 무엇
투명한 것끼리 투명하게 싸운 날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오르지 않는다
--- 김경민저, <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 한다>, 2020, 포르체 중에서
최영미 시인의 <살아가는 이유>는 일상 속의 작은 순간들에서부터 인간 존재의 깊은 내면까지를 섬세하게 탐구하는 작품입니다. 이 시는 단순히 삶의 의미를 묻는 것이 아니라, 투명하고 쉽게 사라져 버릴 수 있는 순간들을 통해 살아 있다는 감각을 되새기게 합니다. "투명한 것이 날 취하게 한다"는 첫 구절부터 이 시는 강력하게 빨아들입니다. 투명함은 물리적인 상태로서나 정신적인 상태로서 모두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의미할 수 있는데, 시인은 이를 통해 자신이 처한 현실과 내면의 감정에 대한 불확실함을 드러냅니다.
시에서 묘사되는 여러 이미지들은 일상 속에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것들, "어린아이의 흔들리는 걸음, " "안부 없는 사랑, " "여중생들의 웃음, " 그리고 "창밖의 비"와 같은 장면들이 삶 속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순간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투명한 것끼리 투명하게 싸운 날"이라고 표현한 구절은, 외부의 세계와 내면의 감정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순간을 예상해보게 합니다. 투명한 것들이 싸운다는 표현은, 그 자체로 실체가 없이 갈등하는 상황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아무리 마셔도 술이 올라오지 않는다"는 부분은 감정의 소모와 회복 불가능한 상태를 의미하며, 삶의 무력함, 무기력을 전하는 것 같습니다. 매우 쓸쓸합니다.
이 쓸쓸함과 비애감에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반복적인 고통과 그 속에서 느끼는 무력감을 생각할 때 안현미 시인의 <비굴 레시피>가 저만치에서 다가옵니다.
안현미
재료
비굴 24개 / 대파 1대 / 마늘 4알
눈물 1큰술 / 미증유의 시간 24h
만드는 법
1. 비굴을 흐르는 물에 얼른 흔들어 씻어낸다.
2. 찌그러진 냄비에 대파, 마늘, 눈물, 미증유의 시간을 붓고 팔팔 끓인다.
3. 비굴이 끓어서 국물에 비굴 맛이 우러나고 비굴이 탱글탱글하게 익으면 먹는다.
그러니까 오늘은
비굴을 잔굴, 석화, 홍굴, 보살굴, 석사처럼 영양이 듬뿍 들어 있는 굴의 한 종류로 읽고 싶다
생각건대 한순간도 비굴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으므로
비굴은 나를 시 쓰게 하고
사랑하게 하고 체하게 하고
이별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고
당신을 향한 뼈 없는 마음을 간직하게 하고
그 마음이 뼈 없는 몸이 되어 비굴이 된 것이니
그러니까 내일 당도할 오늘도
나는 비굴하고 비굴하다
팔팔 끓인 뼈 없는 마음과 몸인
비굴을 당신이 맛있게 먹어준다면
--- 김경민저, <내가 사랑한 것들은 모두 나를 울게 한다>, 2020, 포르체 중에서
음식의 조리법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복잡한 감정과 관계를 탐구하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시는 단순히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 그치지 않고, 그 속에 담긴 의미와 상징을 깊이 있게 풀어내며, 인간의 내면과 존재를 탐색합니다.
시의 첫 구절인 “24개의 비굴, 1개의 대파, 4개의 마늘, 1큰술의 눈물, 전례 없는 시간 24시간”은 하나의 요리 재료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인간의 감정과 시간에 대한 묵직한 은유가 숨어 있습니다. 굴은 자주 소비되는 영양가 높은 식재료이지만, 이 시에서는 단순한 재료를 넘어서, 삶의 고통과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시인의 마음을 대변하는 상징적 존재로 다가옵니다.
"그러니까 내일 당도할 오늘도 나는 비굴하고 비굴하다"는 표현에서, 시인은 자기 자신을 내어주고, 희생하고, 때로는 비굴함을 수용하는 존재의 모습에 대해 고백합니다. 결국 그는 이 비굴함 속에서 자기 자신을 찾고, 그것이 그의 삶의 일부로 자리 잡음을 인정합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가치관과 욕망 속에서 살아가고, 그 속에서 각자의 존재 이유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비굴함과 혼란이 가득하지만, 그 속에서도 우리는 자신을 찾고, 살아가려는 의지를 잃지 않으려 애씁니다. 투명해지려는 노력은 때때로 술에 취한 듯 혼란스럽고, 시린 현실을 마주하는 일일 수 있습니다.
"투명함이 나를 취하게 만든다"는 구절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들—진실을 마주하거나 숨겨진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취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현실이 고통이 됩니다. 비굴 레시피가 사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희망을 의무로 생각해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