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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한 생의 비밀들

by 윤재

울창하고 아름다운


리산


모퉁이를 돌면 말해다오 은밀하게 남아 있는 부분이 있다고


가령 저 먼 곳에서 하얗게 감자꽃 피우는 바람이 왔을 때

바람이 데려온 구름의 생애가 너무 무거워 빗방울 후드득후드득

이마에 떨어질 때 비밀처럼 간직하고픈 생이 있다고


처마 끝에 서면 겨울이 몰고 온 북국의 생애가 풍경처럼 흔들리고

푸르게 번지는 풍경 소리 찬 바람과 통증의 절기를 지나면 따뜻한

국물 펄펄 끓어오르는 저녁이 있어 저녁의 이마를 짚으며 가늠해보는

무정한 생의 비밀들


석탄 몇조각 당근 하나 노란 스카프 밀짚모자 아직 다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은밀하게 남아 있는 부분이 있어 다 알려지지 않은 무엇이 여기

있다고


---안희연, 황인찬 엮음,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 중에서, 2024, 창비



2006년 <시안> 신인상으로 문단에 데뷔한 시인 리산은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리산 시인의 등단 당시 “현란할 정도로 시적 몽상이 돋보이는 개성적인 작품”이라는 심사평을 쓴 오탁번 시인은 “산문체의 시가 빠지기 쉬운 고시적인 구문을 용케 벗어나서 그때그때 점화되는 이미지가 얼음꽃처럼 차갑고 냉정하다. 또 고답적 언어의 멋도 알고, 능청을 부릴 줄도 안다”라고 말했습니다. 시인은 “센티멘털 노동자 동맹”이라는 도발적인 이름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단순히 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의 비밀스러움과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소중한 가치를 탐구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시인은 우리에게 삶의 각기 다른 순간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그 안에서 우리가 놓쳤던 중요한 것들을 되새기도록 유도합니다. 시인의 섬세한 언어와 감각적인 표현은 일상의 소중함과 그 속에 숨어 있는 깊은 의미를 발견하게 합니다.


‘바람이 하얗게 피어나는 먼 곳’을 묘사하면서 자연의 미묘한 움직임을 강조합니다. 바람에 실려 온 구름의 삶은 매우 ‘무겁다’고 표현됩니다. 이 무게는 비 오는 순간, 이슬이 떨어지듯, 시인이 느끼는 인생의 비밀스러움과 감정의 중첩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인생을 비밀스럽게 간직하려는 욕망은 종종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 드러나기도 하지만, 이 시에서는 그런 드러내지 않으려는 감정이 은유적으로 표현됩니다.


‘빗방울 후드득후드득 이마에 떨어질 때 비밀처럼 간직하고픈 생이 있다’니... 인생의 소중한 순간이나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속으로 간직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마치 비밀스럽고 고요한 공간에서, 세상의 혼잡함과는 다른 깊은 평화를 추구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석탄 몇조각, 당근 하나, 노란 스카프’ 등 구체적이고 작은 사물들이 나열된 부분은 삶의 진실이 화려한 것이 아닌, 일상 속 소소한 것들 속에 숨겨져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은 아닐는지요.


은밀하게 남아 있거나, 다 알려지지 않는 그 무엇은 무엇일까요

울창하고 아름다운 것일까요

궁금함이 많은 시입니다.




리산 시인의 <울창하고 아름다운>을 읽으면서 러시아의 풍경화가로 고요하고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잘 표현한 이삭 일리치 레비탄(Isaac IIyich Levitan, 1860~1900)의 풍경화가 떠올랐습니다. 그의 그림은 겨울 풍경이나 비 오는 날,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을 묘사하며 자연의 세밀한 감정을 포착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여줍니다. 이삭 레비탄은 1860년 현재 리투아니아의 일부이지만 이후 러시아 제국의 속주인 폴란드 의회에 편입된 작은 마을인 키바르티에서 태어났습니다. 랍비의 아들이자 교육받은 사람인 그의 아버지 Ilya Abramovich는 개인 프랑스어 및 독일어 교사로 일했으며 나중에는 프랑스 건설 회사의 번역가로 일했습니다. 빈곤한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따뜻하고 깔끔하게 집을 관리하셨고 자녀들의 영적 발달에 관심을 갖고 읽기와 쓰기를 가르칠 뿐만 아니라 모스크바로 이주하여 자녀들의 사회 진출 기회를 증진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자녀들의 예술에 대한 열정을 지지하고 진로를 응원하였다고 합니다. 1873년, 13세의 나이에 아이작은 형의 뒤를 이어 "미술 학교" 또는 "모스크바 예술학교"라고도 불리는 모스크바 회화, 조각 및 건축 학교에 등록했습니다. 이 학교에서 서정 풍경화를 그린 알렉세이 사브라소프, 비판적 사실주의 그림을 그린 바실리 페로프, 외광파 기법을 도입한 바실리 폴레노프 등에게 배웠습니다. 10대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이삭은 노숙자가 되어 거의 거지처럼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배가 고픈 그는 친척이나 친구의 집, 심지어 모스크바 학교의 빈 교실에서 잠을 자곤 했습니다. 친구의 회고록에 따르면 레비탄이 그의 재능만큼이나 가난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삭 레비탄은 프랑스 화가 카미유 코로의 작품을 발견하고 사랑하게 되어, 코로에 관한 책을 읽기 위해 독학으로 프랑스어를 배웠다고 합니다.


16세인 1877년 전시회에 학생 작품으로 전시된 그림이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호평을 받아 대중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주의적인 화풍을 유지하던 레비탄은 말년에는 인상주의적인 화풍을 그리기 시작했고, 달빛이 비치는 풍경, 여명, 고요한 마을의 모습 등을 주로 그렸습니다. 생의 마지막 해를 크림반도에 있는 체호프의 집에서 보냈습니다. 레비탄과 러시아의 세계적인 소설가이자 극작가 안톤 체호프(Anton Chekhop, 1860~1904)는 좋은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레비탄의 어려운 경제상황을 알고 있던 체호프는 물감을 사 주기도 하고, 자신의 별장으로 초대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조력했습니다. 레비탄은 사랑받고 존경받았던 활동기의 명성에 비해 그의 일생은 너무 짧았습니다. 풍경을 통해 감정과 영성을 전달하는 그의 재능은 그의 그림을 보편적인 공명을 지닌 영원, 자연, 인류에 대한 성찰로 변화시켜 그 가치에 철학적, 현상학적 차원을 더합니다.


Isaac Levitan 1898.png

이삭 레비탄, 1898




레비탄은 20세기가 시작되기 전 러시아에서 가장 사랑받는 풍경화가였으며, 그의 그림에는 서정과 철학,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화가의 고뇌가 담겨 있다고 평론가들은 말했습니다. 그의 그림은 러시아어 교과서 표지에도 실렸다고 합니다. 비애감과 고요함이 담겨 있는 레비탄의 그림은 <무드풍경화, 분위기 풍경, mood landscape painting>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의 전기 작가 페데로프-다비도프(Federov-Davidov)는 "레비탄 이후 러시아 풍경화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 완전히 새로운 성격을 획득했다고 과장하지 않고 말할 수 있습니다. “라고 썼습니다. 이삭 레비탄은 1900년 7월 22일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모스크바 유대인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1941년 그의 시신은 노보데비치(Novodevichy) 장례식장으로 옮겨져 그의 사랑하는 친구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의 무덤 옆에 묻혔습니다. 나란히 묻힌 그들이 생전에 미처 못 나눈 우정을 더 깊이 나누고 있을 것입니다.







sunny day 1876.png

이삭 레비탄, <sunny day>, 1876, 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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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 레비탄, <비 온 후, 폴리오스>, 1889,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조용한 수도원 1890.png

이삭 레비탄, <조용한 수도원>, 1890,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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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 레비탄, <영원한 평화 위에> , 1894,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이 그림 <영원한 평화 위에, Above the Eternal Peace>는 이삭 레비탄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넓은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의 교회를 조망하게 합니다. 교회 옆에는 묘지가 있고 호수 가운데는 작은 섬이 있습니다. 호수는 거대하고 고요하며 평화롭고 흰색으로 칠해져 언덕 위의 푸르름과 대조를 이룹니다. 다가오는 저녁을 예측하는 보라색 하늘은 저녁의 어둠을 암시하며 인상적입니다. 자신이 하찮은 존재로 느껴졌다고 체호프에게 쓴 편지에서 고백한 이삭 레비탄은 이 그림을 그릴 때 연인이었던 소피아 페트로브나에게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 중 '3월의 푸네브레'를 피아노로 연주해 달라고 부탁하곤 했답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그는 이 작품에 자신의 감정이 스며들게 하여 철학적이고 서정적인 특성을 불어넣었나 봅니다. 이 그림을 구입한 Tretyakov에게 "나는 온 마음을 다해 그 안에 있습니다"라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Haystacks Twilight 1899.png

이삭 레비탄, <Haystacks, Twilight>, 1899,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우리 주위를 둘러싼 이 아름다움의 광대무변함을 느끼고, 또 그 속에 담겨있는 신비를 볼 수 있으면서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 거대하고 압도적인 느낌을 우리가 가진 능력으로도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보다 더 큰 비극이 있을 수 있겠는가? ".... 이삭 레비탄



다시 또 다른 날의 시작입니다.

2월 1일, 두 번째 달의 첫날.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을 기다리는 날, 차가운 공기가 아직도 우리의 피부를 스치지만,

그 안에는 이미 봄의 예감이 은밀하게 스며들고 있습니다.

너무 성급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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