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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함의 세계

by 윤재

23. 다정함의 세계



『다정함의 세계』


김행숙



이곳에서 발이 녹는다

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않다


괜찮아요, 작은 목소리는 더 작은 목소리가 되어

우리는 함께 희미해진다


고마워요, 그 둥근 입술과 함께

작별인사를 위해 무늬를 만들었던 몇 가지의 손짓과

안녕, 하고 말하는 순간부터 투명해지는 한쪽 귀와


수평선처럼 누워 있는 세계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오를 때


무릎이 반짝일 때

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간다


--- 김행숙, <이별의 능력>, 2007. 문학과 지성사


김행숙(1970~ ) 시인은 1999년 <현대문학> 등단하였습니다. 시집 『사춘기』,『이별의 능력』,『타인의 의미』,『에코의 초상』이 있으며 [노작문학상], [미당문학상], [전봉건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현재 강남대학교 한영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장석주시인은 “김행숙의 화법은 낯설고 모호하다. 발이 녹고 무릎이 없어지는 세계는 어떤 세계를 말하는가? “수평선처럼 누워 있는 세계”라는 단서에 기댄다면, 그것은 우리를 범속한 평면에 가두는 세계다. 그 평면을 깨고 도약하는 “검은 돌고래”는 무의식 안에 숨은 열망을 보여주는 것일까? 만남과 헤어짐으로 이루어지는 세계일지라도 솟구쳐 오르는 다정함은 키우고 장려해야 할 인류의 덕목이다. 그런 덕목들이 사라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당신에게] 한없이 다가”가야 한다. 다정함이야말로 삶에 의미의 빛을 더 비추고 우리를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평했습니다.


김행숙시인의 시 『다정함의 세계』는 언어의 유희와 감각적인 이미지 속에서 다정함이란 무엇인지 사유하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이 시는 부드러운 속삭임과도 같은 분위기 속에서 점차 흐려지는 존재의 경계를 그리며, 인간관계와 감정의 변화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 연에서 ‘이곳에서 발이 녹는다’라는 표현은 물리적 소멸을 암시하면서도 이어지는 표현에서 마치 현실에서 벗어나 해방이나 안락함 속에 머물고 싶은 욕망을 담고 있는 듯합니다. 이어지는 연에서는 다정함 속에서도 결국 우리는 흐릿해지고, 함께 사라질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이 시는 다정함이라는 감정의 본질을 탐구하며, 그것이 필연적으로 소멸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각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시 속에서는 일상적인 따뜻한 다정함이 다른 감각으로 다가오는 변화를 보여줍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느껴지는 정서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그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Nighthawks, 1942』을 생각나게 합니다. 호퍼의 작품 속 인물들은 서로 가까이 있으면서도 고독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이는 시 속에서 표현된 다정함과 소멸, 그리고 관계의 흐려짐을 시각적으로 잘 구현하는 작품으로 생각됩니다. 조용한 풍경과 빛의 활용은 이 시의 감성과 깊이 공명하며 교류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png

에드워드 호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Nighthawks>, 1942, 시카고 미술관




미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로, 밤의 정적 속에서 홀로 남겨진 듯한 인간의 고독을 강렬하게 보여줍니다. 어두운 모퉁이의 커다란 직사각형의 창 안으로 형광빛처럼 차가운 카운터 불빛 아래 모인 네 사람은 서로 가까이 있지만, 대화를 나누는 이는 없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제각각이며, 유리창 너머의 거리는 텅 빈 채 정지한 듯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호퍼는 이 작품을 통해 현대인의 소외와 단절을 그려내지만, 동시에 그들이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희미한 연대감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속의 등장인물들은 서로 연결되지 않은 듯 보이지만, 어쩌면 그 존재만으로도 서로를 위로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깊은 밤, 불 꺼진 거리와 대조되는 카운터의 빛이 그들을 감싸며, 그 빛 아래에서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견디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그림에 대해 호퍼는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대도시의 외로움을 그리고 있었을 것입니다."라고 회상했습니다. 철야 식당에서 세 명의 고객이 종업원 맞은편 카운터에 앉아 있는데, 각자는 생각에 잠겨 서로 떨어져 있습니다. 거리는 깨끗하고 조용하지만 정지 화면 같은 수수께끼 같은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들이 대화는 나누는지, 나눈다면 어떤 이야기들인지 궁금해집니다.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1882~1967)는 사실주의적인 작품을 많이 남긴 미국의 화가로 주로 도시의 일상적인 모습을 그렸으며 소외감이나 고독감을 표현하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김행숙의 시 『다정함의 세계』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곳에서 발이 녹는다 / 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는 구절은 마치 "Nighthawks"속 인물들의 감정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그들은 어딘가에서 지쳐 흘러와, 잠시 그 공간에 머물며 자신의 무게를 내려놓습니다. 시에서 "괜찮아요, 작은 목소리는 더 작은 목소리가 되어 / 우리는 함께 희미해진다"라고 말하듯, 카운터에 앉은 인물들 또한 희미해지는 존재감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행숙의 시가 단순한 소외나 고독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호퍼의 그림 역시 단순한 단절만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시의 후반부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 오를 때 / 무릎이 반짝일 때 / 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간다"는 구절은, 마치 인간이 고독을 넘어 타인에게 다가가는 순간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호퍼의 그림 속 인물들이 깊은 밤 같은 현실 속에서도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희미한 유대감을 느끼는 것처럼, 시에서도 '다정함'이라는 감각은 희미하게 존재합니다.



“나비효과”,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요인에서의 우연하고도 사소한 변화가 어떤 문제에 큰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뜻이지요. 예를 들면, 제주도 유채밭에 있는 한 마리의 나비의 날갯짓이 수주 후에 미국 동부 지방에 허리케인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는 서로 연관되어 있고, 또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인간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모인 사람들 간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이런 영향은 의도적인 것도 있고, 나비효과처럼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생각지도 못하는 방식으로 순기능으로 또는 역기능으로 일어나는 영향도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추운 요즈음 서로의 다정한 온기가 불러올 순기능적인 나비효과를 기대하게 됩니다.





나비효과.png





박노해 시인은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 / 무엇으로 따뜻한 포옹이 가능하겠느냐/ 무엇으로 우리 서로 깊어질 수 있겠느냐”라고 『겨울사랑』에서 떨리는 겨울사랑을 그립니다.


정말 춥습니다.

요즘은.


온기를 나누는 진정한 다정함이 서로 함께 하면 참 좋겠습니다.

따뜻한 포옹이, 깊어질 수 있는 함께 나누는 연대감이, 추위를 낮출 수 있겠지요 .




다정함의 세계 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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