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도를 넘는 시간, 삶을 가로지르는 의식
세례의 바다를 지납니다.
북반구의 시간을 벗고, 적도의 태양 아래서 다시 태어나는 중입니다.
크루즈 여행 동안 - 아프리카의 왈비스베이를 지나 긴 해상일을 지나는 동안과 에쿠아도르의 만타를 지날 때 - 적도를 두 번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적도(Equator)는 지구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가상의 선(위도의 기준이며, 0°의 선에 해당)으로, 북반구와 남반구를 나누는 경계선입니다. 적도를 통과하는 것은 지구의 두 반구를 넘어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오래전부터 선원들 사이에서는 이를 기념하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15세기 포르투갈 선박이 위험한 적도를 통과하면서 무사히 통과하길 기원하면서 제사를 지낸 것이 시작이라고도 하고, 17세기 네덜란드와 프랑스 선박이 위험한 해역을 통과할 때 바다의 신(海神)에 대한 희생을 표시한 것이 기원이라고도 합니다. 적도 지역을 지나갈 때는 바다는 잔잔하지만, 당시 범선 시대에는 바람이 없는 것이 두려운 상황이었던 것이랍니다. 바람이 없는 무풍지대에 묶여 머무르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배의 승무원들이 곤혹스러운 상황이 도출될 수 있기 때문에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의미 있는 이벤트일 수 있을 것입니다.
적도를 지날 때 일종의 통과의례 이벤트를 크루즈 선사는 진행합니다.
며칠 전부터 행사에서 역할을 담당할 자원자를 모집하고, 그들에게 재미있는 역할을 수행하게 하는군요. 크루즈가 적도를 통과할 때, 그 순간은 단순한 지리적 경계를 넘는 것으로서의 즐거운 의식 뿐만 아니라 크루즈 승객들에게 기념으로 <적도 통과 증명서>를 나누어 주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선원들은 적도를 통과할 때 일종의 의식적인 청혼식을 치르거나, 장난스러운 의식을 통해 서로를 축하했습니다. 특히, 크루즈 여행 중의 적도 통과식은 선원들뿐만 아니라 승객들까지 참여할 수 있는 기회로, 풍성한 전통적 즐거움과 단합의 순간이었습니다.
요즘의 적도는 위험하지 않기 때문에 축제처럼 의식을 진행하고 그 과정은 유쾌하고 즐겁게 진행되었습니다. 풀장이 있는 14층에서 승무원들과 승객들이 함께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그의 자녀, 부하, 배심원들로 역할을 담당해서 재판을 진행하고 재판 결과에 따른 익살스러운 벌칙을 수행합니다. 바다의 신이 “ 너희는 바에서 근무하면서 칵테일에다 비아그라를 넣었다면서?” 등과 같은 엉뚱하고 발랄한 죄를 묻습니다. 배심원들이 엄지를 아래로 향하면 유죄가 되고 유쾌한 벌이 수행됩니다. 모든 재판 과정이 끝나면 모두 풀장에 입수합니다. 승객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행사로 이 행사가 끝나면 애꿎은 승무원들이 수영장 대청소를 하게 됩니다.
이 의식을 바라보면서 저는 문득 심청전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심학규의 딸인 심청이가 남경 상인들에게 공양미 삼백석에 자신을 팔아 용왕제의 제물이 되어 인당수로 칭하는 바다에 뛰어들고, 연꽃을 타고 돌아와 왕비가 되고 결국 심봉사는 눈을 뜨게 된다는 효녀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심학규 님은 눈을 뜨고 바로 청이를 알아보았을까요?
앞을 못 보던 사람이 눈을 뜨게 되면 상대를 바로 지각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은 17세기 철학자들도 가졌었고 그에 대한 답을 인지신경심리학자들은 연구로 제시했습니다. 영국의 심리학자 R.L. Gregory와 동료들이 연구한 사례를 살펴보면, 눈을 뜨게 되면 맹인으로서 예상했던 사물들의 색이 다르고, 대상 인식을 올바르게 할 수 없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했습니다.
청이의 효심을 주제로 익히 듣고 배운 이야기였으나 뒤집어 보는 해석을 접한 적이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주제가 아니라 숨겨진 핵심을 들여다보면 심봉사는 역사와 사물을 보는 주체적인 현실적인 판단의 눈이 없으며 의존적이며 감각에 의지한다는 사람이었다는 것이지요. 애지중지 키운 딸을 제물로 팔아서 눈을 뜨고자 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대해 비판적인 접근으로 해석을 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바다의 용왕신에게 어로의 안전과 풍어를 비는 용왕제를 행하고 있으며, 지역에 따라 진행 방식이나 시기가 다양하다고 합니다. 진도군 고군면 벽파․원포․금호마을과 의신면 모도․ 수품마을 등에서는 오늘날에도 용왕제를 모시고 있다고 합니다.
사진 출처: 뉴스인
사진 출처: 오마이 뉴스
크루즈 여행 중 적도를 통과할 때, 그 순간은 일종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특별한 경험이 됩니다. 뜨거운 열대의 바다를 가로지르며 항해하기 때문에, 적도를 통과하는 순간은 바다의 넓이와 힘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적도를 통과하는 그 순간, 뜨거운 햇볕과 함께 넓게 펼쳐진 푸른 바다는 그 자체로 경이롭고, 상쾌한 기분을 선사합니다. 특히, 남반구로의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은 마치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듯한 감동을 안겨줍니다. 처음에는 작고 낮게 보이던 수평선이 점차 멀리 확장되는 바다처럼 느껴지며, 그곳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비로운 여행이 되는 것입니다.
삶에도 적도 같은 경계가 있습니다. 유년에서 청소년으로, 청년에서 성년으로, 그리고 다시 노년으로. 우리는 성장의 단계마다 통과의례를 치르지요. 그것은 생물학적 변화이기도 하고, 사회적 승인 과정이기도 하며, 때로는 내면에서 홀로 감행하는 비의적 통과이기도 합니다. 적도 통과제가 선원들에게 바다의 세계에 속한다는 자격을 부여하는 것처럼, 우리의 통과의례 또한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의 이행을 선언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발 디딘 후 처음 100일의 안전한 성장을 축하 하는 100일,
첫 돌.
어린 시절,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끄며 우리는 나이 듦을 축하하고 의식합니다.
사춘기에는 성인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통과의례가 기다리지요. 어떤 문화에서는 성년식을 통해 아이가 더 이상 보호받는 존재가 아니라 사회의 책임을 질 준비가 되었음을 알리기도 합니다. 유치원, 초등학교를 비롯한 학업의 장에서 친구들과 함께 하는 공동의 사회생활을 학습하게 되는 것에 대한 기대와 마무리를 축하하는 입학식과 졸업식, 첫 직장, 첫 월급, 첫사랑, 첫 이별—각각의 사건들은 우리 삶에서 새로운 위도와 경도를 획득하는 과정입니다. 독립된 가정으로의 출발인 결혼도 빠트릴 수 없지요.
하지만 모든 통과의례가 축제인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어떤 문턱은 고통스럽고, 혼란스럽고, 때로는 깊은 상실감을 동반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맞이하는 애도의 순간, 신체적 노화로 인해 더 이상 이전처럼 움직일 수 없게 되는 순간, 또는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야 하는 순간. 우리는 그럴 때마다 삶의 또 다른 적도를 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바다는 경계를 긋지 않지만, 우리는 스스로의 항해 속에서 수많은 경계를 경험합니다. 적도를 넘을 때, 크루즈는 지구의 남반구로 진입하지만, 그 순간의 경험은 단순한 위치 변화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장과 변화의 문턱을 넘을 때마다 단순히 시간 속에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 자체를 갱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계를 넘는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 있습니다.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J.M.W. Turner)의『난파선, The Shipwreck, 1805』과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1818』가 있습니다. 이 작품은 한 남성이 안개로 덮인 산을 바라보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인간이 미지의 세계를 마주하는 순간을 상징합니다. 또한, 인간의 발달 단계를 묘사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토마스 콜(Thomas Cole, 1801~1848)의 『인간의 항해, The Voyage of Life, 1842』 연작이 있습니다. 이 네 개의 그림은 어린 시절, 청년기, 성년기, 노년기의 단계를 각각 표현하며, 삶의 각 시기가 지닌 의미와 도전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폭풍을 그린 화가, 윌리엄 터너 :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 ~ 1851)는 빛과 색채, 그리고 자연의 거대한 힘을 화폭에 담아낸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였습니다. 그는 런던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왕립 아카데미에서 미술 교육을 받았으며, 풍경화와 해양화를 통해 명성을 얻었지요. 특히 바다와 하늘을 묘사하는 그의 역동적이고 감각적인 표현 방식은 이후 인상주의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터너는 전통적인 기법을 따르는 대신, 거친 붓질과 강렬한 색채로 자연의 웅장함과 변화무쌍함을 그려내며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윌리엄 터너, <난파선, The Shipwreck>, 1805, 테이트 모던, 영국
터너는 평생 바다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터너가 활동하던 당시는 바다는 영국인들에게는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해가 지지 않는 영국의 자긍심은 바다로부터 오는 것이었지요. 난파선과 바다에서의 기타 재난은 낭만주의 회화에서 반복되는 주제였습니다.
경제적 여유가 생긴 터너는 주문자의 요구보다는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조건, 상황이 되었고, 터너가 그리는 바다는 희망과 기대의 공간이며 또한 비극의 공간이었습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난파선』은 격렬한 바다와 인간의 연약한 운명을 극적으로 담아낸 작품입니다.
이 그림이 실제 난파선에서 영감을 받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만, 터너는 난파선의 트라우마와 공포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그림 속에서 우리는 거대한 파도가 배를 뒤흔드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바다는 온통 소용돌이치고, 하늘은 불길한 색으로 물들어 있으며, 배는 폭풍 속에서 방향을 잃은 듯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터너는 이러한 장면을 통해 자연의 압도적인 힘과 그 앞에서 무력한 인간의 모습을 극적으로 대비시켰습니다.
이 작품을 바라보면, 단순한 해난 장면을 넘어서 인생의 항해에 대한 깊은 은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이처럼 예상치 못한 폭풍을 맞이하곤 합니다.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불어닥친 변화 속에서 길을 잃고 흔들리며, 때로는 좌초할 것 같은 위기에 처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폭풍은 늘 끝나고, 바다는 결국 잔잔해집니다. 정지된 캔버스에서 역동을 강렬하게 표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터너 자신의 체험과 관찰을 바탕으로 역작을 만들어냈습니다. 터너의 그림이 전달하는 것은 단순한 절망이 아니라, 그 격렬한 순간을 지나야만 도달할 수 있는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암시입니다.
터너는 빛과 색을 통해 자연의 힘을 극적으로 표현했지만, 동시에 그 안에 담긴 인간의 내면적 여정을 포착하고자 했습니다. 『난파선』은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라, 변화와 도전, 그리고 극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수많은 시험과 그 속에서 발견하는 우리의 강인함을 상기시킵니다.
이처럼 예술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인간이 맞닥뜨리는 변화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터너, 프리드리히, 콜의 작품들은 모두 우리가 삶 속에서 지나야 할 문턱을 보여주며, 그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줍니다. 우리의 삶도 항해이고, 통과의례는 바다의 거친 파도 속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비추는 순간입니다.
적도를 통과하는 순간은 단순히 지리적 경계를 넘는 일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내딛는 의미 깊은 순간입니다. 크루즈에서 적도를 지나며, 우리는 그저 한 번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새로운 삶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다의 위대함과 자연의 변화를 깊이 느끼며, 여행의 의미와 인생의 여정을 더욱 풍성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