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소련 묵시록
러시아에서 온 친구가 선물해 줬던 블린니(блины)* 믹스 소비 기한이 위태로운 상태라 겸사겸사 마슬레니짜(масленица) 기념을 하게 되었다.
블린니는 마슬레니짜에서 반드시 만나는 대표 음식이다.
* 블린니(блины): '러시아 크레페' 정도로 볼 수도 있는데 넣는 재료에 따라 디저트부터 식사까지 활용 범위가 넓다. 슈퍼마켓 반찬 코너에도 속을 넣지 않은 것과 여러 가지 소를 넣은 블린니를 팔고 있으며, 카페에도 간단한 먹을거리로 진열되어 있다.
마슬레니짜 주간 즈음 친구 집에 초대를 받아서 간 적이 있는데, 사과 케이크를 만드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그의 뒤로 잔뜩 쌓인 블린니와 갖은 토핑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이듬해였는지, 요리에 그리 취미가 없는 또 다른 친구도 저날만큼은 블린니를 먹어야할 것 같다며 또또 다른 친구를 불러 출장 부침 노동을 시켰다. 덕분에 나도 연유와 스메타나(сметана)*를 잔뜩 펴발라 먹었다.
* 스메타나(сметана): 사워크림 또는 무가당 요거트같은 러시안 아이템. 견과류가 잔뜩 들어간 흑빵을 살짝 구워서 얹어먹으면 맛있다.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하는 이 축제 주간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로, 시기는 2월 말~3월 초쯤이며 매년 바뀐다.
이는 역시 매해 날짜가 다른 부활절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올해 마슬레니짜(масленица) 기간은 2월 24일부터 3월 2일까지였다.
그러나 봄을 맞이한다고는 하지만 정말로 봄 공기가 퐁퐁 올라오는 상황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스크바 기준으로 4월에도 눈이 펄펄 내리곤 하는 곳이다.
온몸을 외투와 모자, 목도리로 휘감은 채 견고히 다져진 눈길을 걸어가서 달콤한 잼이나 치즈를 넣은 블린과 뜨거운 차를 주문한다.
아직 안 온 봄을 다들 그렇게나 기다리고 있구나, 하고.
한편 마슬레니짜 주간 날씨로 1년을 예측해보기도 한다.
마지막날에 날씨가 안 좋다면 맑고 따뜻한 봄을 맞이한다든가, 축제 주간 지붕에 고드름이 많이 생기면 그해 풍년과 성공이 따를 것이라든가.
부푼 기대들이 동동 떠다니는 축제이다.
아무튼 사제들이 경건히 부활절을 준비하는 기간인 사순절 시작 일주일 전부터 고기 섭취가 금지되는데, 그동안 허용되는 버터, 우유, 치즈를 실컷 먹게 된다.
러시아어로 버터 또는 기름을 마슬라(масло)라고 하므로 마슬레니짜*가 되었다고 한다.
이름만 봐도 보들보들 기름지고 부드럽다.
* 날짜는 조금 다르지만 서양에서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전에 기념하는 Fat Tuesday나 Pancake day, Mardi Gras와도 의미가 비슷하다.
첫 3일은 마슬레니짜 도입부, 나머지 4일은 본격 마슬레니짜로 매일매일 다른 의미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날은 역시 마지막 날인 ‘용서의 일요일’이다.
모든 일을 용서하고 정리하여 깨끗이 다음 스텝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인류가 구분한 시간 단위는 새로이 마음먹게끔 하는 훌륭한 장치들이라는 생각이 다시 치고 올라온다.
일(day), 주(week), 달(month), 해(year), 세기(century)…
중간중간에 마슬레니짜 같은 명절도 있고, 자주 사용되는 좀 더 작은 단위로는 ‘5분만 더…’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태와 태만이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것을 다스리려는 노력으로 시간을 구분해서 계획하고 의식을 만들곤 하는 것이다.
용서의 일요일에 새로운 시작을 기원하며 마슬레니짜 인형을 화형에 처하듯이.
마지막으로 어떤 러시아 블로그에서 본 글을 남긴다.
어떤 느낌의 축제인지 좀 더 와닿을 수 있을 것 같다.
<마슬레니짜를 온전히 즐기는 방법>
1. 블린니는 필수 음식! 평소 먹던 재료 말고 실험적인 도전도 해보길.
2. 축제 분위기를 만끽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으세요!
3. 나쁜 일들은 종이에 적어서 마슬레니짜 인형과 같이 태워버리세요.
4.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또 용서하세요. 과거의 모든 원한 없이 순수한 영혼으로 사순절을 맞이해요.
처음 구운 블린 모양이 울퉁불퉁하더라도 즐겁게 먹도록 해요.
밀가루를 다 썼다면 걱정하지 말고 손님과 같이 사러 가는 것도 좋죠.
축제가 끝나고 몸무게가 늘었나요? 그보다 중요한 건 기쁨과 즐거움임을 잊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