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이 남긴 빨래방망이 자국

by 연목

트라우마는 삶에서 겪은 충격적인 경험이 마음속 깊이 남아, 오랜 시간이 지나도 우리를 괴롭히는 기억이다. 어떤 경우에는 아주 사소한 사건이 평생의 상처가 되기도 한다.


내게 그것은 바로 ‘시험’이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시험’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지고, 어린 시절의 무거운 공기가 되살아났다.


친정 엄마는 초등학교 교사셨다.

엄마는 내가 다니던 학교 근처 관내 학교에서 일하셨기에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생딸이 공부를 못하는 것은 엄마 얼굴에 똥칠하는 거다."

어른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온전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 말이 품고 있던 기대와 압박은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교사인 엄마의 딸이라는 것 — 그것은 나에게 주어진 숙명이자 짐이었다.


나는 ‘모범생 딸’, ‘엄친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의 나는 내성적이고 부끄럼이 많았고, 엄마가 만족할 만큼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그 간극은 우리 모녀에게 끝없는 고통을 불러왔다.


중간·기말 시험이 다가오면 엄마와 나는 새벽까지 함께 공부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분명 아동학대였다.

피곤해도 참고 책을 붙들었고, 이해가 안 되는 문제 앞에서는 이해하는 척, 아는 척을 했다.

엄마의 화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험장에 들어서면 온몸이 떨리고 손이 떨려 아는 문제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심장은 터질 듯 뛰고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결과는 늘 실망이었고, 우리는 그 실망 위에 또 다른 시간을 쌓아갔다.


일찍부터 예체능에 소질이 있던 여동생은 공부에 손을 놓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 시간만이라도 엄마가 나를 신경써주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또 엄마의 애처롭게 애쓰는 모습을 보면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 애처로움이 오히려 나를 더 옭아맸다. 사랑과 기대가 만든 족쇄였다.


어느 날, 시험을 망쳤지만 엄마에게는 잘 봤다고 거짓말을 했다.

엄마는 한껏 기분이 좋아져 내게 예쁜 옷을 사주셨다.

엄마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고,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거짓말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결국 통지표가 나오는 날 진실이 드러났다.

그날 나는 세상에서 가장 많이 맞았다.

빨래방망이에 남은 자국은 피부보다 마음에 더 깊은 자리를 남겼다.

엄마의 실망과 분노, 나에 대한 자괴감이 뒤섞여 숨이 막혔다.


그 사건 이후 우리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어떤 상처는 말로 치유되기보다 침묵으로 덮어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초등학교 5학년쯤 되자 엄마가 서서히 나를 포기하기 시작했다.

해도 안 되는 것을 아셨던 것일까.


훗날 대학교 때 만난 교수님들과 여행을 하면서, 엄마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며 슬쩍 흘리셨다.

"이러다 애를 잡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묘한 안도감과 동시에 깊은 슬픔을 느꼈다.


그 이후로 나는 혼자 공부했다.

더 이상 엄마와 새벽까지 씨름하지 않았고, 나만의 속도로 나아갔다.

결국 엄마가 바라고 원하던 대학에 갈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인생의 끝은 아니었다.


이제는 시험을 봐도 그렇게 긴장하지 않는다.

아는 만큼 맞고, 틀리면 배우는 것이고, 아는데도 틀릴 수 있는 것이니까.

인생에는 정답만 있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그때는 맞아도 지금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시험이라는 트라우마는 나에게 고통을 주었지만, 동시에 인생의 깊은 진리를 깨닫게 해주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시험에 실패해도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하고 싶은 마음이 때로는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 그 어린 시절의 나를 포근히 안아주고 싶다.
그저 이렇게 안아주는 것, 그것이 내가 엄마에게 바랐던 전부였다.


그리고 엄마에게도 전하고 싶다.
당신의 사랑을 나는 알고 있으며, 그 무거운 기대조차 결국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해한다고.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