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디 매매 할아버지

by 연목

할아버지가 떠나신 지, 어느덧 세 해의 시간이 흘렀다.
시간은 흘렀지만 그날의 장면은 조금도 옅어지지 않는다.
코로나19로 격리된 요양병원의 한 방, 홀로 마지막을 맞으시던 할아버지.
그리고 그와 같은 시간 속에서, 나는 갓 태어난 딸을 품에 안고 서 있었다.

“할아버지, 이 아이가 제 딸이에요.”

끝내 전하지 못한 그 한마디는, 말이 되지 못한 채 오래도록 가슴속에 머물러 있다.
작고 따뜻한 손을 당신의 손 위에 얹어드리고 싶었으나, 그 소망은 끝내 닿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날 이후, 그 말은 내 안에서 계속해서 되풀이된다. 늦게 도착한 인사처럼.

할아버지는 내 삶에서 하나의 세계였다.
영남 8대 학자라 불릴 만큼 깊은 학문을 쌓으셨고, 평생을 배움과 가르침 속에서 사셨다. 젊은 날에는 경찰로, 이후에는 사업가로 살아가며 시대의 여러 굴곡을 온몸으로 지나오셨다.


언제나 단정히 여민 옷깃, 흐트러짐 없는 걸음, 곧게 세운 허리. 어린 내 눈에 그 모습은 한 인간이라기보다 하나의 기준에 가까웠다.

바둑판 앞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어린 손녀라 하여도 한 수도 양보하지 않으셨다. 흑과 백이 엇갈리는 그 정갈한 긴장 속에서, 나는 자주 패배를 배웠다.
그리고 늘 마지막에는 같은 말씀이 남았다.

“단디 해라, 매매.”

그 말은 단순한 훈계가 아니었다.
삶을 대하는 방식이었고, 세상을 견디는 태도였다.
흐트러지지 말 것, 어설프지 말 것, 스스로를 끝까지 밀어붙일 것.
그 단단한 언어는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단단함은 때로, 부드러움을 밀어내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기준은 분명했고, 그 기준은 가까운 이들에게 더욱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아버지는 장남으로서 그 기대를 짊어지고 살아야 했다. 더 잘해야 했고, 더 버텨야 했으며, 더 완전해져야 했다. 나는 그 무게를 다 알지 못했지만, 그늘만은 느낄 수 있었다.

작은아버지는 다른 길을 택했다.
자유롭게 살고자 했던 한 사람은 결국 집안의 질서와 부딪혔다. 명절마다 쌓여가던 말들은 끝내 균열이 되었고, 관계는 점점 멀어졌다.
어린 나는 그 갈등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시간은 누구도 비껴가지 않았다.
그토록 또렷하던 정신은 서서히 흐려졌고, 치매라는 이름의 안개가 할아버지를 감싸기 시작했다. 기억이 사라지고 말이 흐려질수록, 나는 처음으로 ‘무너지는 어른’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끝내, 우리는 서로를 충분히 알아보지 못한 채 마지막을 맞이했다.


이제 나는, 할아버지를 하나의 빛으로 기억한다.
곧고 높은 빛. 그러나 때로는 너무 밝아,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웠던 빛.

그래서 나는 다짐한다.
그 빛을 그대로 닮기보다, 조금은 다른 온도로 이어가겠다고.


내 딸에게는 더 넓은 세상을 건네주고 싶다.
원칙을 지키되 사람을 품을 줄 알고, 자신의 길을 가되 타인의 다름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 단단하지만 부드럽고, 또렷하지만 따뜻한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바란다.

할아버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당신이 평생 입버릇처럼 남기셨던 그 한마디의 무게를.

“단디.”

그 말은 단순히 정확함이나 철저함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끝내 다 전하지 못했던 마음, 서툴게 감추어 두었던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

꼼꼼하되 따뜻하게,
확실하되 유연하게.

이제 나는,
그 단단함 위에 온기를 얹어
나만의 방식으로 ‘단디’ 살아가려 한다.

그리고 그 삶을 통해,
당신이 미처 다 건네지 못한 사랑까지도
조용히 이어가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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