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린이와 중고등학생을 가르치는 일이 늘 부담스러웠다.
지식을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찬데, 그들의 인성과 예의, 사회적 규범까지 챙겨야 한다는 막연한 선입견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성인 학습자를 선호했다.
“이 사람들은 이미 사회화 과정을 거쳤으니까, 나는 내 전문 영역만 가르치면 돼.”
하지만 현실은 내 기대와 달랐다.
외국인 성인 학습자에게 한국어를 가르친다는 건, 단순히 언어만 가르치는 일이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행동하는 게 자연스러워요.”
언어 속에 스며든 문화와 관습, 암묵적 룰까지 함께 알려줘야 했다.
게다가 내가 만난 ‘성인’ 학습자들은 고작 열아홉, 스무 살 정도였다.
법적으로는 성인이지만,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그들은 여전히 어린 성인이었다.
결국 강의실에서도 나는 “수업 시간에 조용히 하세요.”,
“쉬는 시간을 지키세요”,
“숙제를 해오세요.”라는 말을 반복해야 했다.
“어, 여기 대학교 맞죠?”
내 마음속에서 의심이 흘렀다.
내가 피하고 싶었던 ‘생활지도’가 여기서도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칭찬에 참 인색했다.
경상도 출신 부모님 밑에서 자란 탓일까,
“잘하는 게 당연한 거야. 뭘 칭찬을 해?”
이 마음가짐이 체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달랐다.
아주 작은 발전이라도, 미세한 노력이라도 알아주기를 바랐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점점 나는 구체적인 칭찬을 하려고 애쓰게 되었다.
“오늘 발음, 어제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졌네요.”
“이 문법을 이렇게 응용할 줄 몰랐는데, 정말 잘했어요.”
신기하게도, 학생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그들의 예쁜 구석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태주 시인의 말처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게 사실이었다.
한 학생은 아르바이트 때문에 늦게 학교에 왔다.
“선생님… 오늘도 늦었어요.”
하지만 피곤한 얼굴에도 졸지 않으려고 꼼꼼히 필기를 하고, 질문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아, 이제 문법이 이렇게 연결되는 거군요.”
그 모습에 나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다른 학생은 반 친구들의 생일을 챙기고 싶어 고향 음식을 만들어 왔다.
“오늘은 티하씨 생일이니까, 제가 전을 부쳐왔어요.”
작게 웃으며 전을 나눠주는 손길에는 정성이 담겨 있었다.
“우와, 진짜 맛있어요! 감사합니다!”
그런 작은 순간들이 쌓이면서, 학생들은 내게 더 이상 귀찮은 존재가 아니라, 각자의 고유한 매력을 가진 인간으로 다가왔다.
물론 학생들도 만만치 않았다.
평소 온화하지만, 가끔 호랑이나 여우 같은 면모를 보이는 나를 알아차리더니,
“선생님, 오늘은 좀 장난쳐도 돼요?”
적당히 까불며 반응했다.
이런 밀고 당기기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이라고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나는 교수자로서 편견이 많았다.
성인만이 진정한 학습자이고, 어린 학생들은 단지 관리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젊은 성인 학습자들과 만나면서 깨달았다.
가르침이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만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살아있는 과정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은 학생들만이 아니라, 나 자신이기도 했다.
이제 나는 칭찬을 조금 더 자연스럽게 한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학생들의 작은 노력들을 알아보려 애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역시 그들로부터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결국 교실은 일방적인 가르침의 공간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함께 성장해가는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