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법의 틀
오늘도 칠판에 문장을 써 내려간다.
"나는 가요."
"나는 갔어요."
"나는 갈 거예요."
세 개의 시제가 흰 칠판 위에서 나란히 서 있다. 현재, 과거, 미래. 한국어 초급 교재 14과의 내용이다.
서윤의 목소리가 외국인노동자센터의 좁은 교실에 울렸다. 외국인노동자센터의 좁은 교실 안에서 열두 명의 학생들이 따라 읽는다. 학생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글라데시, 베트남, 우즈베키스탄, 필리핀... 저마다 다른 고향을 가진 이들의 눈동자에는 한국어라는 미로에서 길을 찾으려는 간절함이 어려 있었다.
"나는 가요."
방글라데시에서 온 하산의 발음이 가장 또렷하다. 그는 언제나 앞자리에 앉아 성실하게 받아적는다. 베트남에서 온 투언은 받침을 어려워한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파리다는 조사를 자주 빼먹는다.
나는 간다. 나는 갔다. 나는 갈 것이다.
"현재, 과거, 미래를 나타내는 표현들입니다."
하지만 이 문장들을 쓰면서 서윤은 자신의 삶을 떠올렸다. 과연 자신에게 명확한 현재가 있을까? 과거는 너무 아프고, 미래는 너무 막연했다.
7년 전, 이혼 법정에서 판사가 물었던 말이 떠올랐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신가요?"
그때 서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갈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확실한 미래가 없었다. 아들 민우는 전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었고, 그녀에게는 완성되지 않은 박사 논문과 점점 악화되는 건강만 남아 있었다.
"선생님, '나는 살 것이다'와 '나는 살겠다'는 어떻게 달라요?"
베트남에서 온 히엔이 손을 들고 물었다.
서윤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의지와 예정의 차이를 설명해야 했지만, 정작 자신은 살겠다는 의지와 살 것이라는 예정 사이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건... 의지의 차이예요. '살겠다'는 더 강한 결심을 나타내죠."
그렇게 대답했지만, 서윤 자신에게는 그런 강한 의지가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하나둘 나가자, 서윤은 빈 교실에 혼자 남아 의자를 정리하면서 그녀는 오늘도 또 한 번의 거짓말을 했다는 생각에 무거워졌다. 학생들에게는 명확하고 질서정연한 문법을 가르치지만, 정작 자신의 삶은 그 어떤 문법에도 맞지 않았다.
휴대폰에 메시지가 와 있었다.
"서윤아, 오늘 저녁 시간 어때? - 윤주"
대학 시절 친구 윤주는 현재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정규직 교사로서 안정된 삶을 살고 있는 윤주와 달리, 서윤은 계약직으로 겨우 버티고 있었다.
"미안, 오늘은 피곤해서. 다음에."
사실 피곤한 것이 아니라 부끄러웠다. 윤주 앞에서 괜찮은 척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서윤은 가방을 챙기며 오늘 칠판에 썼던 문장들을 떠올렸다. 나는 간다, 나는 갔다, 나는 갈 것이다. 문법적으로는 완벽한 문장들이었지만, 왜 이렇게 허무할까?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서윤은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언어를 가르치는 사람이 정작 자신의 삶을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아이러니였다.
원룸에 도착한 서윤은 냉장고 문을 열어봤다.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 하나와 김치만 덩그러니 있었다. 오늘도 편의점에서 뭔가 사와야 했다.
책상에 앉아 내일 수업 준비를 하면서 서윤은 문법 교재를 펼쳤다. '조사의 활용'이라는 단원이었다.
은/는, 이/가, 을/를...
서윤은 예문을 만들려다가 펜을 멈췄다.
나는 아프다. 내가 아프다.
같은 말인 것 같지만 뉘앙스가 달랐다. '나는'에는 다른 사람과의 대조가, '내가'에는 강조가 담겨 있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아픈지 아프지 않은지는 알 수 없었다.
호르몬 치료약을 복용한 지 1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몸의 균형이 잡히지 않았다. 감정 기복이 심했고, 늘 피로했다. 의사는 괜찮다고 했지만, 정말 괜찮은 걸까?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이서윤 선생님이신가요? 김민석 학부모입니다."
고3 수험생 민석이의 어머니였다. 서윤은 주말마다 민석이에게 논술을 가르쳤다.
"아, 네. 안녕하세요."
"죄송한데, 다음 주부터 수업을 그만두려고 해서요."
서윤의 심장이 덜컥했다.
"혹시... 제가 부족한 점이 있었나요?"
"아니에요. 민석이가 대형 학원으로 옮기기로 했거든요."
전화가 끊어진 후 서윤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월 40만원의 과외비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센터 급여 120만원과 합쳐도 빠듯한 생활인데.
잠이 오지 않았다. 서윤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자신의 문장들을 되짚어봤다.
나는 가르친다. 나는 가르쳤다. 나는 가르칠 것이다.
마지막 문장에서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정말 계속 가르칠 수 있을까? 센터가 언제까지 유지될지도 모르고, 과외 학생들도 하나둘 떠나고 있었다.
3년 전 대학교 어학당에서 해고당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건강상의 이유로 당분간 수업 진행이 어려우실 것으로 예상됩니다."
행정실장의 말은 정중했지만 단호했다.
"네, 죄송합니다."
서윤은 그때도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때부터였다. 서툰 변명을 늘어놓는 대신 '괜찮다'는 말로 모든 것을 덮기 시작한 것이. 서윤은 일어나 책상에 앉았다. 노트에 문장을 적었다.
나는 괜찮다. 나는 괜찮았다. 나는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장들이 얼마나 공허한지 알 수 있었다. 문법적으로는 완벽하지만 감정적으로는 텅 비어 있었다. 말은 완성됐지만, 마음이 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