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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용연 Jan 01. 2022

기억에 남기고 싶은 순간들 in 제주 - 3일 차

애써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는 여행(feat. 잠과 쉼)

일상도 그렇듯, 모든 여행에는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나타나기 마련이고,  그 변칙적인 순간을 즐기는 것도 여행의 묘미인 것 같다. 제주로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연말을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여행이니 뭔가 제대로 된 의미 있는 여행을 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제주에 오니 계획을 세우고 의미 있는 하루를 채우기보다는 그냥 쉬고 싶었다. 아마 고즈넉하고 인적이 드문 동네의 분위기가 한몫한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쉬어가는 2021년의 마지막 날이자 셋째 날 여행을 이어갔다.


우리가 묵었던 방의 이름처럼 '오롯이' 쉬어가는 여행중


느지막이 눈떠지는 대로 일어나 아침으로 해장국을 한 그릇 했다. 어제 친구와의 오랜만에 만남에 너무 들떠서 무리를 했는데, 함덕 해장국 국물을 한 수저에 모든 게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이런 걸 바로 소울푸드라고 하는 건가... 주차장의 차들만 봐도 번호판이 '하'로 시작되는 차는 우리밖에 없었고 대부분 제주 현지인 분들이었다. 제대로 찾아왔구나라는 뿌듯함이 들었다.

배를 뜨뜻하게 채우고 어제 찾아두었던 다원으로 향했다. 만원에 1시간 동안 다도를 배울 수 있는 곳이었다. 북적거리는 핫플레이스가 아닌 숲 속에 위치한 다원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 올해의 마지막을 차분하게 차를 배우며 정리하면 좋겠다 싶어 망설임 없이 신청했다.

제주 동부에 위치한 '올티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수업은 정말 좋았다. 숲과 상호작용하며 차 밭을 키우는 다원이라, 주변에 작고 큰 숲들이 둘러싸고 있었고 그래서인지 풍경은 더할 나위 없이 고즈넉했다. 차분한 팽주(다도 클래스 선생님)님의 목소리, 차에 대한 풍성한 이야기들, 한모금한모금 마실 때마다 몸을 정화하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해준 네 종류의 따뜻한 차들, 유리창 너머로 초록초록하게 펼쳐진 다원의 풍경들. 그리고 얼마남지않은 12월의 반나절도 안되는 시간들. 모든게 빈틈없이 어우러지는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시간까지 시간이 남아 행원리 동네를 걸었다. 큰 호텔이 아닌, 마을에 위치한 로컬 숙소를 여행하면 꼭 시간을 내서 동네를 걸어본다. 내가 사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풍경들을 눈에 담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언젠가 장기로 시간을 낼 수 있다면 꼭 로컬주민처럼 살아보는 여행을 하고 싶은데, 행원리같은 마을에 한달살기를 해보면 참 좋을것 같았다. 물론 여행자로서 이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충을 모르기 때문에 로망만 가지고 하는 소리일지도...

12월 마지막의 저녁은 행원장 숙소에서 운영하는 와인바 '도립' 이었다. 호텔뷔페나 근사한 뷰의 레스토랑도 물론 좋지만 요즘은 조금 느리고 규모가 작아도, 운영하시는 사장님의 개성과 취향이 온전히 녹아있는 공간이 좋다. 도립도 그랬다. 5가지 음식이 다른 식당에 비하면 느린 속도로 나왔지만, 덕분에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동안 동반자와 와인을 마시며 더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고, 그 공간의 분위기를 배로 만끽할 수 있었다. 9시라는 영업제한 시간때문에 더 길게 분위기를 즐기지 못한건 아쉬웠지만 정말 더할나위없는 2021년의 마지막식사였다.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아듀2021년을 만끽하려 자체 2차를 즐겼다. 와인과 함께 선택한 영화는 <안녕,헤이즐>. 이 영화에 대해 분석하는게 사치일만큼 거스와 헤이즐의 사랑은 온전하고 아름다웠다. 모든 사람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인만큼, 사랑하는 사람과 하고 싶은걸 하며 사는 2022년이 되자고 배우자와 다짐했다.

다른 해처럼 뭔가 진지하게 마무리한 마지막날은 아니었지만, 그냥 마음가는대로 깊게 생각하지않고 보낸 2021/12/31일이 더 기억에 많이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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