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김현승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生命)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들이라 하올제,
나의 가장 나아중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돌조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17세기의 프랑스 성당에 있는 그 조각에서는 돌로 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지요. 가볍고 공기처럼 부드러운 눈물을 돌로 조각해 냈다는 데 대해 놀랐지요. 그 조각상은 ‘피에타’였습니다. 우리가 아는 피에타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입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안고 슬퍼하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묘사한 조각상이지요. 이 조각상을 바티칸에서 보았습니다.
솔직히 고백하는데 저는 유리상자 속에 전시되어 있는 그 조각상을 보고 그다지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냥 어떻게 저렇게 옷 주름을 표현할 수 있지, 성모 마리아가 젊고 예쁘구나 하는 정도였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이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스치듯 보았기에 자세히 감상할 시간이 없어서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훗날 찾은 피에타 관련 일화는 제 느낌이 옳았다고 확인해 주었습니다. 사실 조각가인 미켈란젤로 자신도 이 조각상에 그다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또 다른 피에타를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론다니니 피에타’입니다.
‘론다니니 피에타’는 성모 마리아가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리는 자세를 취하고 있지요. 마리아의 왼손은 예수의 왼쪽 어깨를 잡고 있고 오른쪽 손은 아마도 예수의 오른팔 사이로 들어가 있을 겁니다. 추측을 하는 것은 오른손이 아직 돌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피에타에서 온전히 드러난 것은 예수의 다리뿐입니다. 상체도 얼굴도 아직 미완성입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이 조각상을 오래도록 곁에 두었다고 합니다. 죽기 사흘 전까지 만지작거렸던 것이 바로 이 조각상이라고도 하지요.
론다니니 피에타: 출처 위키 백과
어쩌면 미완성이기에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겁니다. 눈을 내리뜨고 있는, 예수를 상처 없이 혹은 곱게 십자가에서 잘 내리려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마리아의 시선, 그리고 고개가 숙여져 반쪽만 드러난 예수의 얼굴. 이 ‘론다니니 피에타’가 훨씬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슬픔은 이렇게 표현되지 않을까 하는 추측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얼굴은 고요합니다. 고요하다고 해야 옳겠습니다. 얼굴이 온전하지 않다고 해도 느낌은 드러나는 법입니다. 그것은 조각가가 표현하려고 했던 그 모습을 이미 얼굴에 부여해 넣었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자 할 때 몸과 얼굴은 이미 표정을 갖습니다. 그것은 그 그림에 살아 있는 인물을 묘사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기운이자 에너지입니다.
‘론다니니 피에타’의 예수와 마리아는 한 덩어리로 그들의 몸은 밀착되어 있습니다. 생명이 없어 그저 쓰러지는 아들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어머니. 평자들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은 미켈란젤로가 그 슬픔을 이 조각에 쏟아 넣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미켈란젤로는 생의 마지막에서 비로소 그 상실의 의미를 더욱 절절하게 느꼈던 것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슬픔은 상실에서 시작됩니다. 상실은 관계가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슬픔은 도망칠 때보다 고요히 멈춰 설 때 더 선명해집니다. 마치 상처가 아물기 위해서는 먼저 제대로 들여다봐야 하는 것처럼, 슬픔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할 때 비로소 그 의미를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슬픔으로 인해 우리는 한결 더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요. ‘론다니니 피에타’가 미완의 작품이지만 그 미완의 표정으로 인해 오히려 더 충만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