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3가역에서 3호선으로 갈아탈 일이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묘하게도 이 시와 마주쳤습니다.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이 시를 여러 번 읽었습니다. 한여름은 물론이지만 한겨울에도 개구리 소리가 들립니다. 이 시를 지은 이는 농부가 아니었을까요? 꼭 농부는 아니었다고 해도 농토와 익숙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유월, 무논을 읽다/ 우경화
유월 무논은 푸른 경전이다
바람이 읽고 가는 이유가 있다
논두렁에 숨은 풀벌레들과
개구리들도 떼를 지어
무심한 세상 귀들을 향하여
큰 소리로 경전을 읽는다
밥심으로 살아가는
이 땅 위의 어느 누군들
질퍽한 논바닥 흙과 무관하랴
농부들이 흘린 땀방울 되새기듯
맨발로 찰방거리며
종아리가 젖도록 걸어보고 싶은
해거름, 논두렁에 앉아
찬찬히 푸른 잠언을 읽는다
몇 마지기 경전을 읽는다
무논은 물을 채운 논을 말합니다. 제목에서도 나오지만 유월이니까요. 그 유월이 음력인지 양력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유월이건 여름이 한창입니다. 벼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왕성하게 자라는 시기입니다. 음력 유월이라면 벼꽃이 피었겠지요.
무논이 경전이라는 데서 귀가 황홀해집니다. 경전은 땀과 고통의 결산이니까요. 경전은 그 이름만으로 경이라고 하는 데서 보듯 변치 않는 진리이자 도리로 핵심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는 논을 경전이라고 부릅니다.
논에는 벼가 자랍니다. 벼는 우리의 주식인 쌀의 원형적인 형태입니다. 논은 벼가 자라는 곳, 우리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되 노동의 가치를 일깨워 주는 곳입니다. 볍씨를 뿌리고 키워 모를 논에 옮겨심는 과정을 거쳐 열매를 맺기까지, 그 몇 개월 동안에는 가꿈과 돌봄이 있고 기다림이 있습니다. 기다림은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열매가 맺힌 다음에도 여러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자르고 말리고 탈곡하고 또 우리 입에 들어오려면 익혀야 하고. 삶의 이치와 지혜가 들어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매일 쌀을 먹습니다. 무심코 먹습니다. 그러나 그 쌀은 내가 삶을 이어 나가는 원천이 됩니다.
경전은 또 어떤지요. 우리는 굳이 경전이라는 책 없이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전은 책이 아닙니다. 화자에에게 경전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진리와 이치를 모두 담고 있는 자연입니다. 그러니 바람과 풀벌레와 개구리 모두가 경전을 읽는다고 하지만, 그 소리들,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 풀벌레가 그리고 개구리가 울어대는 소리, 이 모든 것이 경전이 됩니다. 논두렁에 앉아 찬찬히 푸른 잠언을 읽는다는 표현은 단순히 벼를 바라보는 일이 아니라 자연과 삶의 이치를 읽는 일, 지혜를 읽는 일입니다.
논처럼 삶의 진리와 이치를 모두 담고 있는 당신의 경전은 어디 있는지요. 당신의 삶 그 자체가 경전이 아닐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