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명상/감각/랭보

by 이강선

감각/랭보


푸른 여름 저녁마다 나는 들길을 가리라

보리 이삭에 찔리고, 잔풀을 밟으리:

꿈꾸듯, 발밑에서 신선함을 느끼리.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날리도록 두리.


말하지 않으리,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리.

그러나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끝없는 사랑만이 솟아오르리,

나는 가리라, 멀리 저 멀리, 방랑자처럼

자연 속으로, 연인과 가는 것처럼 행복하게.




영화 <타이타닉>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아마 주인공 로즈가 배의 갑판 앞머리에 서서 바람을 맞는 장면일 겁니다. 로즈는 팔을 양쪽을 활짝 벌리고 부드럽게 불어오는 미풍을 느끼지요. 머리칼이 뒤로 휘날리고 석양이 그녀의 몸을 감쌉니다. 이때 로즈가 아름다운 것은 외모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녀는 팔을 활짝 벌리고 바람을 맞는 모습에서 외모를 넘어선 자유와 해방감이 느껴집니다. 고국에서의 억압적인 삶에서 벗어나 자연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태양과 바람과 바다, 그 모든 것은 생명의 근원이지요. 우리는 그녀를 통해 생명을 보고 있기에 그토록 자유롭고 아름답고 편안하다고 느낍니다.



아르튀르 랭보의 시, 「감각」은 로즈가 불러일으켰던 그 감각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불과 15살에 썼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감각 어휘가 풍성합니다. 시를 따라가다 보면 다양한 감각을 만납니다. 시원함, 찔림, 상쾌함을 거쳐 연인과 가는 것처럼 행복하게 자연 속으로 간다는 마지막 구절은 로즈가 만났던 그 자유로움이자, 평온함이자 생명력을 정확히 구현해내고 있습니다. 혹시 타이타닉의 감독은 랭보의 이 시에서 느꼈던 감동을 로즈의 모습으로 구현했던 것이 아닐까 라고 여겨질 정도입니다.



화자가 말하는 이 일은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일은 아닙니다. 첫 줄에 보면 "가리라" 라고 되어있으니까요. 또한 시원한 여름 저녁마다라고 말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화자는 들길을 가는 때를 한정하고 있군요. 그때는 시원한 여름 저녁입니다. 유럽의 여름은 한국보다 시원합니다. 특히 랭보가 살고 있던 샤를빌은 여름 저녁은 약 12도 내외, 선선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여름 저녁이 상쾌하겠지요. 아마 우리의 초가을 정도 날씨일까요?



즉 화자는 과거의 경험을 불러와 그 장면의 특징을 기억해 내면서 미래에 어떤 일을 하겠다, 들길을 걷겠다는 의도 혹은 소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흔히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과거를 기억하면서 미래에 무언가를 하리라는 의도를 갖지요.



그러면 화자는 들길을 걸으면서 무엇을 겪을까요? 여름철이니 들에는 곡식이 자라고 있습니다. 아마도 보리는 누렇게 익어가고 있을 겁니다. 혹은 아직 파란빛을 띠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찌 되었건 분명 이삭에 찔리게 됩니다. 자칫 비틀거려서 일수도 바람 때문 일수도 있지요.



발밑은 풀로 덮여 있습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풀이 부드럽게 눕습니다. 신발 밑바닥을 통해서 전해지는 신선하고 부드러운 감촉. 지금 막 일어나고 있는 현재는 신선합니다. 가끔 나를 찌르는 보리이삭은 늘 거기에 있는 고통입니다. 없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항상 존재하지요.



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을 날립니다. 부드럽게 화자의 머리칼을 흩트려 놓습니다. 쓰다듬는 듯한 그 바람.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려 귀를 스치기도 하고 눈앞에서 흔들리기도 합니다. 화자는 그저 걷습니다. 말없이 눈앞의 풍경을 바라볼 뿐입니다. 초록빛과 황금빛과 저녁과 바람과 부드러운 황혼. 바라보는 동안 마음은 흐뭇하고 끝없는 사랑이 솟아오릅니다.



그 사랑은 흐뭇함에서 혹은 부드러움에서 충만함에서 나오는 사랑일 겁니다. 들판을 걸으며 느끼는 편안함과 안정감이 생명에 대한 사랑, 자연에 대한 사랑, 그리고 지금 젊고 아름다운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습니다. 지금 화자는 방랑자처럼 자유롭게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끝없는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으니까요.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자 생명에 대한 사랑일 겁니다. 이 사랑은 소유하거나 집착하는 사랑이 아닌,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경외와 존경에서 비롯된 사랑일 겁니다. 그러니 타이타닉의 로즈가 느꼈던 그 자유로움과 평온함, 그리고 생명력이 내 안에서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읽는 우리가 시의 화자가 된다면, 즉 시를 경험한다면 우리 또한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소리내어 읽음으로써, 그 장면을 떠올림으로써, 나의 감각으로 경험함으로써 화자처럼 겪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시를 읽을 때, 단순히 글자를 해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의 리듬과 은유는 논리를 담당하는 좌뇌를 잠시 멈추게 하고, 직관과 감정을 담당하는 우뇌를 활성화시킵니다.



특히 '보리 이삭에 찔리는' 따끔한 감각이나 '풀을 밟는' 부드러움과 같은 시각적, 촉각적 언어는 뇌의 감각 피질에 저장된 실제 기억을 소환합니다. 이미지를 그려내고 촉감을 느끼도록 하는 것입니다. 뇌는 시어를 통해 상상하는 경험을 마치 실제로 겪는 것처럼 인식합니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감정적 기억에 다시 접속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보리 이삭의 찔림을 떠올리는 것은 단순한 기억 재생이 아니라, 그 순간 느꼈던 고통이나 불편함과 같은 감정을 다시 느끼는 일입니다.



시명상은 이처럼 언어와 감각을 매개로 억눌린 감정을 표면 위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합니다. 고통과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길을 걸으며, 우리는 불안이나 슬픔과 같은 감정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고, 그 감정들을 안전한 방식(시)으로 풀어내게 됩니다.



결국, 시명상은 언어의 힘을 통해 마음을 재구성하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 우리의 뇌는 고통과 즐거움을 함께 포용하고 수용하는 새로운 감정 회로를 만들게 됩니다. 마음의 창을 새로이 열어 마음 근육을 단련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시가 단순한 글을 넘어 우리에게 평온과 자유그리고 그 너머를 선사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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