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함에 이르기 위해 사막을 건너다:사막/도종환

by 이강선



사막/도종환



옛날에 이곳은 진나라 땅이었다

영웅들이 갖고 싶어 하던 땅이었다

무엇이 이곳을 사막으로 변하게 하였을까

그대도 숲이 무성하고 계곡이 아름다우며

강물이 흘러넘치던 땅이었다

무엇이 그대를 사막이 되게 하였을까

무엇이 그대를 황폐하게 만들었을까


『고요로 가야겠다』 열림원 2025



식탁에 앉았습니다. 며칠 전 꺾어온 국화 향을 맡으면서 아일랜드 시인 존 오도나휴의 『신성한 아름다움』을 읽던 중에 이 시집을 받았습니다. 제목도 인상적이었지만, 이 시 「사막」은 책장을 넘기던 손길을 멈추게 했습니다. 오도나휴가 말한 ‘상냥함’과 이 시가 보여주는 황폐의 모습은 서로 대조적으로 보이지만, 달의 뒷면과 앞면 같은 물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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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나휴는 우리 시대를 상냥함이 사라진 시대, 기계적 정신이 앞서는 시대라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풍요는 넉넉함을 뜻합니다. 인심은 곳간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듯, 우리는 흔히 넉넉함이 관대함을 가져다줄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사방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미얀마에서의 전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 전쟁은 어느 시대건 존재해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시대의 전쟁을 당연하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전쟁은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무엇보다도 분노하게 만듭니다. 상대에 대한 분노가 눈을 가리고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우리는 누구와 전쟁을 해왔을까요? 인류는 평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쟁을 해왔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잘 살기’를 실행하기 위해 몸부림쳐왔습니다. 편안하게 살고 싶어서 혹은 내 아이에게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내가 겪은 힘듦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노력해왔습니다. 가난과의 싸움은 역설적입니다. 가난은 내가 상냥해질 수 있는 온유해질 수 있는 여지를 없애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그토록 힘든 고됨을 견딥니다. 고됨을 달래는 것은 희망, 온유함으로 가고자 하는 희망입니다.


혹자는 마음속 내면 아이를 달래기 위해 싸워왔습니다. 놀라운 것은 아무리 잘 살아도 내면 아이는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사랑을 받아도 내면 아이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면 아이가 사라지지 않아도 계속 나를 살아갑니다. 달래기 위한 싸움은 역설적입니다. 달랜다는 것은 상냥함이자 온유함이고 관대함입니다. 그 상냥함을 얻기 위해 반대의 면모를 동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멈칫했습니다. “한때 영웅들이 갖고 싶어하던 땅.” 그 땅은 백성을 위한 땅입니다. 영웅은 백성을 위한 야망을 지녔고, 실현했기에 영웅인 것입니다. “진나라 땅”이 지금 사막이 되었습니다. 한때 숲이 무성하고 계곡이 아름다우며 강물이 흘러넘치던 땅이 사막이 되었으니 아무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오도나휴가 말했던 아름다움은 풍요로움에서 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떤 고정된 질서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아름다움은 함께 존재하도록 허락하는 조화에서 옵니다. 각자의 빛을 발하도록 상냥하게 어루만지고, 있는 그대로 존재하도록 관대하게 내버려 둠에서 옵니다


시 속 숲과 계곡과 강물은 존재가 함께 할 수 있도록 하는 생명 없는 존재들입니다. 당신 안에 있던 숲과 계곡과 강물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이 눈을 뜨며 만났던 새벽의 빛, 그 어스름을 뚫고 들려오던 새소리, 그리고 아침 햇살을 막 받은 나뭇잎에 매어 달린 이슬, 낙엽 위에 하얗게 돋아 있던 서리, 마당을 쓸던 빗자루 소리, 그 모든 것은 지금 어디로 갔는지요.


지금 여기 멈추어 읽는 동안 국화향 한 줄기에 이토록 풍요로워지는데.


화자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무엇이 그대를 사막이 되게 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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