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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강선 Aug 01. 2024

시명상/당신에게 달린 일/작자 미상

몹시 더운 날, 허덕이면서 들어왔습니다. 대체 이 더위가 언제 끝나지 하고 한숨을 내쉬다가 문득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진하지 않은 얕은 그림자였지요. 잠자리 같은데. 설마 하면서 고개를 들었습니다. 틀림없는 잠자리였습니다. 몹시도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눈부시게 흰 구름을 배경으로 잠자리가 날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언젠가 검은 물잠자리가 지하실 밖 회색 벽에 붙어 있는 것을 본 기억이 났습니다. 저 잠자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생각하니 경이로웠습니다. 주변에는 개천도 연못도 심지어는 조그만 웅덩이도 없거든요. 가장 가까운 웅덩이라면 봉제산 근린공원에 아주 작은 개천과 웅덩이가 있기는 합니다. 여기서 10여 분 걸립니다. 저 작은 몸집으로 저 그물처럼 얇고 작은 날개로 여기까지 날아왔다고 생각하니 몹시 소중해졌습니다.


 당신에게 달린 일 작자 미상/틱낫한 제공 


 


한 곡의 노래가 순간에 활기를 불어 넣을 수 있다. 

한 송이 꽃이 꿈을 일깨울 수 있다. 

한 그루 나무가 숲의 시작일 수 있고 

한 마리 새가 봄을 알릴 수 있다. 

한 번의 악수가 영혼에 기운을 줄 수 있다. 

한 개의 별이 바다에서 배를 인도할 수 있다.

한 줄기 햇살이 방을 비출 수 있다. 

한 자루의 촛불이 어둠을 몰아낼 수 있고 

한 번의 웃음이 우울함을 날려 보낼 수 있다. 

한 걸음이 모든 여행의 시작이다. 

한 단어가 모든 기도의 시작이다. 

한 가지 희망이 당신의 정신을 새롭게 하고 

한 번의 손길이 당신의 마음을 보여 줄 수 있다. 

한 사람의 가슴이 무엇이 진실인가를 알 수 있고 

한 사람의 인생이 세상에 차이를 가져다 줄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당신에게 달린 일이다. 

 


잠언시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류시화엮음, 열림원.1980


잠자리를 알아차리고 나니 더위가 멀리로 달아났습니다. 7월 말, 몸은 덥지만 마음은 생기로 가득해지고 더위가 지겹지 않았습니다. 한 마리 새가 봄을 알릴 수 있듯, 한 자루 촛불이 어둠을 몰아낼 수 있듯, 한 송이 꽃이 꿈을 일깨울 수 있듯 한 마리 잠자리가 가을을 알려주었습니다. 물론 잠자리는 가을에만 나는 것이 아닙니다. 봄에서부터 가을까지 다양한 종류의 잠자리가 날아다닌다고 하지요. 그러나 제 기억에서 잠자리는 늘 논과 함께 했고 그리고 가을과 함께 했습니다. 특히 나의 친구와 함께 했지요. 그가 해준 어린 시절 잠자리 이야기는 저를 감동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그의 반 아이들은 잠자리 붙이기 내기를 했다고 합니다. 가을날 논을 지나쳐가면 잠자리들이 꼼짝 않고 벼에 붙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건 아침 이슬을 맞아 ㅁ몸이 무거워 날지 못해서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 잠자리를 모아 가슴에 붙였고 누가 많이 붙여오나 내기를 했다고 합니다. 가장 많이 붙인 아이가 이긴다는 것이었지요. 교실에서 잠자리들은 몸이 마르고 따뜻해져 일제히 날아올랐다고 하는데 마치 동화의 한 장면처럼 정겹고 아름다웠습니다.




화곡동 어느 빌라 앞의 도라지


그의 이야기 덕분에 잠자리는 늘 가을과 함께 했던 것이지요. 잠자리를 본 순간, 가을 기운을 알아차렸고 그리고 더위가 물러났습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달린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더위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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