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본모습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으면, ‘진정한 나’는 영영 사라지고 만다(The state of being oneself dies when set aside).” 피터 셸달
위 문장은 "국민 영웅 아니었어? 매국노 사기꾼 반전 실체에 화들짝"이라는 제목의 한국경제 신문 기사에서 가져왔습니다. 제목이 상당히 자극적이지만 내용은 진지합니다. 이 기사는 '진주 귀걸이를 단 소녀'를 그린 유명 화가, 베르메르를 베낀 남자
한 판 메이헤런(1889~1947)의 정체와 그의 삶을 묘사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는 나치 휘하에서 괴링을 비롯한 나치 고위 관리들과 부자들에게 비싼 값을 받고 위조 작품을 팔았고 그로 인해 대중의 환호를 한몸에 받았다는 것이 내용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가 위조한 작품들도 나오지만 그 자신의 그림도 나옵니다. 제법 재능 있었던 한 청년이 유명인의 그림, 특히 베리메르의 그림을 위조해 큰돈을 벌다가 자신의 재능을 잃어버렸다는 내용이니까요.
이 글을 쓴 기자는 마지막을 여러 가지 시각으로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주장이 거짓이었음을 들어, ‘사람들은 진실보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거나,.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믿고 싶은 걸 믿는다’는 것, “역시 현대미술은 사기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거나, “우리가 명작이라고 믿는 작품들은 그 자체로 명작인가, 평론가와 사회가 만든 것인가” 등의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썼습니다. 그가 언급한 다양한 시각 중 마지막이 인상 깊었습니다. 바로 이 글의 서두에 언급한 저 문장입니다. 자신의 본모습을 마주하지 않으면 진정한 나는 사라지고 만다는 저 문장은 자신다움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나'라고 말하면서 '나'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평생 나를 찾는다고 하면서 나다운 나가 어떤 모습인지 확신하지 못하지요. 타인에게 보여주는 나가 나인지, 내가 나라고 쓰는 나가 나인지도 확신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매 걸음 다른 나를 보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건너다닙니다. '어쩌면 이 세계가 나를 환영해 줄지도 몰라. 어쩌면 이번의 이 세계가 나를 나답게 만들어줄지도 몰라. 어쩌면 이 세계에서 나를 찾아낼지도 몰라'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그 일이 어리석다는 것은 아닙니다. 철학자 최진석은 끊임없는 추구의 과정을 '건너가는 자'라는 한 마디로 표현하지요. 왜 행복하지 않은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과거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왜 우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나아질 것 같지 않고 제 한몸 건사하기도 힘든 생에서 끊임없이 변해왔고 또 변해야 하는가에 대한 정답일 겁니다. 그것은 나다움은 지금 이 순간 이미 변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내가 아니듯 내일의 나는 또 다를 겁니다. 그 나는 누군가를 흉내낸 나가 아니라 유일한 나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잘난 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유일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도 모두 유일하다는 의미일 겁니다.
걷는 사람, 자코메티
나는 왜 유일할까요. 달리 말하면 내가 이 세상에 왜 왔을까 하는 질문과 동일합니다. 더 들어가면 그 질문은 왜 이 시기에 왜 이곳에 왜 나의 부모님을 택해서 태어났는지, 왜 내 형제자매들과 더불어 자랐고 왜 이런저런 공부를 했고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 왜 이런 직업을 갖고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인 것지요.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의 열두 단계, 혹은 인연(최진석 253)" 아무도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습니다. 오직 자신 밖에는. 간혹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 질문을 지닌 이들을 만나 그들로부터 답을 얻는 것 같은 착각을 하는 때가 있습니다.
아마도 저 남자, 판 메이헤런은 베르메르에게서 자기가 되고 싶은 사람의 모습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베르메르의 그림이 그에게 깊이 와 닿았던 것이겠지요. 그의 그림이 지닌 유명세가. 누군가 유명한 이의 글을 읽거나 시를 읽고 그에게 깊이 감명 받으면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마음으로 필사를 하는 것처럼.
그러나 메이헤런이 잊었던 것은 베르메르의 삶입니다. 그가 놓인 삶의 조건, 그가 겪었던 고뇌와 시련입니다. 자신답다는 것은 그가 이 세상에서 겪어낸 고통의 결과물입니다. 열심히 살아간 흔적인 것이지요. 자신의 동기를 포기하지 않고 생의 온갖 풍랑에 시달린 흔적이지요. 메이헤런은 베르메르의 작품이 지닌 분위기를 흉내내려 했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만 끝내 위작작가로만 남았습니다.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지요.
나의 본 모습을 마주하지 않으면 해낼 수 없는 그 일, 그 일은 어려워서 고개를 돌리고 싶어집니다. 그만 내려놓고 싶어집니다. 그 일은 돈도 되지 않고 그 일은 아무도 돕지 않습니다. 끝이 날것 같지 않은 그 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일. 오죽하면 헤세같은 이도 내 안에서 솟아나는 것을 살아보는 일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하고 토로하고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진정한 나'를 만나기 위해 윤회를 거듭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일을 풀지 못해 전생에서 현생까지 오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제 제가 저 기사에서 저 문장을 만나 멈칫했던 것은 저 자신이 회피하려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 살지도 못하면서 잘 나지도 못하면서 전전긍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은 행동과 행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행동은 동작이지만 행위는 의도에서 나옵니다. 생각이 행위를 하도록 만들지만 생각이 삶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삶을 바꾸는 것은 행위입니다. 의도를 가지고 내 삶을 어떤 방향으로 가도록 하기 위해 부단히 거듭하는 행동이지요.
그 비밀을 깨달은 에드가 게스트(Edgar E. Guest 1881. 8.20 –1959. 8.5) )는 아주 담백한 시를 썼습니다. 오래 전에 읽었던, 너무 평범해서 흘려버린, 이제서야 그 깊이를 깨달은 시입니다.
결실과 장미/ 에드가 게스트
크건 작건간에,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 있는
아름다운 정원을 갖고자 하는 이는
허리를 굽혀서 땅을 파야만 한다.
소망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극히 적은 까닭에
우리가 원하는 가치있는 것은 무엇이건
일함으로써 얻어야 한다.
당신이 어떤 것을 추구하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것의 비밀이 여기 쉬고 있기에
당신은 끊임없이 흙을 파야 한다.
결실이나 장미를 얻기 위해선.
그렇지요. 어떤 것을 추구하는가는 문제가 아닙니다. 끊임없이 결실을 위한 행위를 지속해야 하지요.
참고
성수영, "국민 영웅 아니었어?...매국노 사기꾼 반전 실체에 화들짝" <한국경제>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408204702i (2024.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