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
문득 아랫도리가 시리다. 참을 수 없이 시리다. 속에 털이 들어간 바지를 입었는데도 춥다. 난로도 소용이 없다. 아래층 서재는 난방이 안 된다. 그러니 난로를 틀어놓아도 다리 정강이 부분만 따뜻할 뿐 손이 곱아든다. 바깥 온도는 영하 십 도, 일기예보는 강추위가 몰아닥칠 것이라고 했다. 따뜻한 차를 마실까 해서 보니 차가 없다. 올라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주섬주섬 물건을 챙긴다. 노트북, 충전기, 키보드, 키보드와 노트북 연결선, 마우스와 마우스 패드, 천 주머니에 넣고 부엌으로 올라온다. 부엌으로 가려면 바깥 계단을 올라야 한다. 1분이나 걸렸을까. 순식간에 아랫도리가 얼음물에라도 들어간 마냥 차갑다. 오늘 밤하늘에는 별이 보이지 않는다.
식탁에 앉으려니 마땅치 않다. 식탁은 높아 어깨가 아프다. 이리저리 생각해 보다가 화장실에 있는 나무 디딤대를 가져온다. 세면대 밑에 놓으려고 남편이 만든 것이다. 의자 위에 놓고 앉으니 높이가 안성맞춤이다. 앉으려니 식탁 위 어수선한 물건들이 눈에 들어온다. 고구마 쟁반을 치운다. 김을 넣은 락앤락을 치운다. 다시 앉으려니 싱크대 옆에 놓인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다시 일어나 치운다.
기억났다. 왜 내가 부엌에서 물러났는지, 왜 저렇게 추운 아래층으로 내려갔는지. 부엌에는 늘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치워야 할 것들이 끝없이 나왔다. 엄마가 되면 딸일 때는 알지 못하던 것들이 늘 눈에 띄는 것이다. 클레어 키건은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 끝없이 일이 이어지는 소시민의 일상을 그려낸다. 특히 빌 펄롱의 아내인 아일린은 눈뜨자마자 잠들기 직전까지 일에 시달린다. 평상시에도 쉴 틈이 없지만 크리스마스같이 특별한 날이 되면 더 바빠진다. 크리스마스 케이크와 같은 특별한 음식을 직접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딸들에게도 각기 할 일이 주어진다.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 할 일이 끝없이 눈에 띄는 곳이 부엌인 것이다.
오래전부터 부엌은 나의 일터였고 공부방이었다. 누우면 발끝이 양쪽 벽에 닿는 코딱지만 한 방이 셋인 안양 비산동 산기슭 빌라에서, 또 다른 비산동 산기슭, 겨울이면 방 안에서 물이 어는 방이 둘인 단독주택 이층에서는 큰 방에서 밥상을 펴놓고 책을 읽었다. 사방이 논으로 둘러싸인 김포 장기동 방이 셋인 아파트에서는 부엌 식탁에서 공부하고 일을 했다. 한번은 중학생이던 딸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비번을 누르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아무 기척도 내지 않고 고요히 있었다. 들어온 딸은 내가 안쪽 식탁에 앉아 있음에도 나를 찾지 못했다. 엄마를 부르면서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니 뱃속이 간질거렸다. 안양천 근처, 인덕원에서도 방 셋인 아파트에 살았다. 서른두 평, 거실이 좁아 부엌 벽에 붙여놓은 식탁에 앉아 공부와 일을 했다. 컵케이크를 구워 지갑을 찾아준 위층 아저씨에게 가져다주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방이 넷인 노량진의 아파트로 이사했고 비로소 서재라고 부를 방을 갖게 되었다. 산을 절개해서 아파트를 지었던지라 창문을 열면 바로 절개지가 보였다. 반대편 창 밑은 바로 도로였다. 창문턱은 금세 까매졌고 낮은 물론 밤에도 시끄러워서 창문을 여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겨울이면 베란다 유리창에 성에가 하얗게 얼고 산을 향한 벽에 서리가 두텁게 올라오는 남양주 아파트에서도 서재를 가졌다. 그리고는 화곡동의 이 집, 지은 지 사십 년이 넘었다는 이 붉은 벽돌집. 이사 왔을 때 처음에는 안방에 책상을 놓았다. 책상이 커서 둘 곳이 없었던 것이지만 보기가 영 껄끄러웠다.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책들과 종이들.
안방은 쉬는 공간이다. 누구보다도 남편에게. 그렇게 사용해서는 안 되었다. 문득 아래층에 생각이 미쳤다. 이사 올 때부터 아래층은 비어 있었다. 남편은 세를 줄 만한 상태가 아니라고 판단했고 그래서 아래층은 각종 짐으로 빼곡했다. 책상 하나만 놓을 정도면 되었다. 남편에게 이야기했고 어느 여름날 그가 팔을 걷어붙이고 공간을 만들었다. 짐을 치우고 벽에 페인트칠을 해서 제법 살만하게 만든 다음, 아들과 남편이 그 엄청나게 무거운 책상을 날랐다. 책도 날랐다. 이사였다. 비록 수채 냄새가 약간 나기는 하지만 아래층에 내 공간이 생겼다. 그러나 수도가 잠겨서 물을 쓸 수 없었다. 당연히 화장실도 쓸 수 없었다. 괜찮았다. 큰 주전자에 물을 담아와 차를 마셨고 화장실은 일층에 가서 해결했다.
아래층은 햇볕이 덜 들어 어둡고 아무도 오지 않는다. 남편이 밖에 나가면서 나간다고 알리는 이외에는.
문제는 난방이었다. 봄에서 가을까지는 좋았다. 여름에 아래층은 위층보다 시원했고 겨울이면 더 따뜻했지만 그렇다고 오래 머무를만하지는 않았다. 겨울에는 손이 시리다 못해 곱았다. 손가락 끝만 자른 면장갑을 끼고 타이프를 쳤다. 털신을 신고 종아리를 다 덮는 발토시를 끼었다. 목도리를 둘렀고 솜을 두툼하게 넣은 잠바를 입었다. 무릎 담요를 덮었다. 낮에는 그럭저럭 견딜 만했지만 저녁이 되면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무인카페도 문을 닫아 갈 곳이 없었다. 난로도 소용없었다. 작년에도 그러했고 올해도 그러하다.
그래서 다시 부엌으로 올라온 것이다. 부엌, 특히 식탁 아래는 책을 읽기에 최적의 공간이다. 식탁에서 의자를 빼서 한구석으로 밀어두고 방석을 깔고 벽에 기대어 앉으면 더할 나위 없이 안온하다. 식탁 아래에 앉으면 눈높이가 달라진다. 식탁의 다리 외에는 안 보이고 저위는 더더욱 안 보인다. 오직 책만 보이니 집중 정도가 남다르다. 그렇게 해서 정유정의 『완전한 행복』을 읽었다. 그러나 식탁 아래에서 노트북을 가지고 작업할 수는 없다. 타이핑을 하려면 의자에 앉아야 하고 식탁을 사용해야 한다. 눈높이는 또다시 널린 일거리를 알아차리도록 만든다. 그러니 시선을 한군데 두는 수밖에 없다. 이런저런 사물들을 무시하고 집중하는 수밖에 없다.
살아가면서 일하는데 최적의 환경은 갖춰본 적이 없다. 무언가를 하는데 최고의 환경을 가져본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언제 어디서 건 각종 방해물은 생겨나고 끼어들고 이미 그 일 자체에 존재하고 있다. 환경이 좋아서 성공한다면 성공이라고 부르지 않겠지. 환경은 이미 주어진 것, 그저 결과가 될 테니까. 우리는 늘 좋지 않은 환경에서 살아낸다. 삶이란 출발 자체가 불완전한 것, 끝날 때 역시 불완전할 터이다. 불완전에서 불완전까지 가는 길이 성장이요 삶이요 과정이니 불편함과 부당함을 통과할 때 삶은 비로소 빛이 난다. 그러니 이 환경이 오히려 고마운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