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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명상/물안개/류시화

by 이강선

물안개/류시화


세월이 이따끔 나에게 묻는다.

사랑은 그후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안개처럼

몇 겁의 인연이라는 것도

아주 쉽게 부서지더라


세월은 온전하게 주위의 풍경을

단단하게 부여잡고 있었다.

섭섭하게도 변해버린 것은

내 주위에 없었다


두리번 거리는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사람들은 흘렀고

여전히 나는

그 긴 벤치에 그대로였다.


이제 세월이 나에게 묻는다

그럼 너는 무엇이 변했느냐고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도서출판 열림원, 1996


시는 꿈이 아니지만 다양한 삶을, 여러 가지 감정을 경험하게 합니다. 시인이 겪는 다양한 경험이 감정이 곧 나의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지요. 그것은 우리가 시를 감상하기 위해 집중하고 조건 없이 내 안으로 불러들여 시 속 어휘를 어루만지고 이윽고 그 시에 흠뻑 젖기 때문입니다. 행에서 행으로, 연에서 연으로, 어휘의 길을 따라가다가 어떤 표현에 붙들리고 그 표현이 나를 맑게 하거나 설움에 가득차게 하거나 그런 것들은 분명 내가 시가 이야기하는 것들에 몸을 담그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길을 잃기도 하지요. 문득 시가 끝나고 다시 나로 돌아오지만 그 시는 내 안에서 무언가를 분명히 바꾸었습니다. 극히 사소하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나는 바뀌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변화한다는 것, 성장한다는 것, 그 일에는 만남이 있고 생각이 있고 언어가 있습니다. 오늘날 아무리 언어가 오염되고 닳았다고 해도 여전히 언어는 우리를 성장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어줍니다.


류시화 시인의 「물안개』를 읽노라면 인연이 얼마나 쉽게 끊어지는지 돌이키게 됩니다.지금 이 삶을 살기까지 우리는 799번의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스쳐지나가는 사람이라 할 지라도 어쩌다 한번 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각각의 생을 799번 산 것이지요. 한 사람이 70년을 산다고 치면 거의 21000년만에 만난 것이니까요.


그런 것을 생각하면 당신과의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돌이키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연이라는 것은, 특히 사랑이라는 것은 얼마나 쉽게 부서지는지요. 마치 물안개처럼. 물안개란 해뜨기 전에는 자욱하지만 해가 뜨고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요. 어쩌면 당신과 내가 만난 것이 꿈이 아니었을까요. 지나간 모든 것은 이미 허상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지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각기 자신의 삶이 있으니까요. 내가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다른 이들 역시 자신 앞에 놓여 있는 일들을 해결하면서 혹은 해내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느라 서로는 변하지요. 그들도 변하고 나도 변합니다. 하지만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우리는 나는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나라고 생각하도록 만든 그것이 존재하고 있어 한결같은 나임을 확인하도록 만드는 것이지요. 그것은 나의 이야기, 나의 특성을 간직하도록 만든 나의 성격이기도 할 테지요. 그런 내가 보기에 다른 이들은 변했고 각자의 길을 따라 떠났습니다.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내가 보기에 그들은 흘러갔고 나는 여기 이 긴벤치, 이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희미하고 꿈만 같습니다. 삶 자체가 어쩌면 꿈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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