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불 함락 직후 탈레반과 국내 첫 인터뷰를 하다

by 고대영

8월 중순,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을 점령하면서 국제부도 바빠졌다. 외신 보도는 분단위로 나왔고 아예 라이브(LIVE) 코너를 만드는 매체도 있었다. 라이브 코너가 생긴 건 코로나19 발생 후 거의 처음이다. 알자지라는 홈페이지 메뉴에 아프간 사태를 넣을 정도로 탈레반의 아프간 장악은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다.


아프간 시민들은 카불 국제공항에 몰려들었고 떠나는 군 수송기에 몸을 날렸다. 007 시리즈나 월드-Z의 한 장면이 아니다. 이들은 살기 위해 몸을 날렸고 이 장면을 담은 사진이나 영상은 SNS를 통해 급속도로 퍼졌다. 이게 21세기에 가능한 장면이구나 싶을 정도로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수송기나 여객기에 착석한 시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겠지만, 그러지 못한 사람들은 살아남으려 발버둥 쳤다.


많이들 접했겠지만, 이 과정에서 비행기에 매달렸다가 추락한 가여운 시민도 있었다. 끔찍함은 외신을 거쳐 국내에서도 자주 보도됐다.


나 역시 외신들을 인용해 보도에 열을 올렸다. 탈레반 점령 첫날은 그렇게 보냈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본격적인 취재에 들어갔다. 아무래도 탈레반이 아프간을 장악한 후 여성 인권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기에 그것부터 취재했다. 현지 여성 인권 운동가나 국제기구 담당자 등을 컨택했다.


다행히도 컨택은 쉬웠다. 하지만 답을 받는 게 쉽지 않았다. 내가 컨택했던 첫 번째 여성은 내 질문에 답하기 앞서 CNN 질문에 먼저 답해야 했고, AP통신 기자를 만나야 했다. 라이브로 보도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IAEA 사무총장 때처럼 왜 내 질문은 안 받아주냐고 성을 낼 순 없었다. 상황이 분명 달랐으니 말이다. 사실 지금 내가 기사를 쓰고 안 쓰고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결국 다른 여성들을 컨택했고 다행히 인터뷰가 성사됐다. 그렇게 세 명의 인권 운동가와 국제기구 국장, 비영리단체 회장 등의 목소리를 담았다. 카불 점령 후 72시간 만의 첫 기사였다.

당시 일요일 근무자였던 나는 보도 다음 날인 금요일부터 이틀간 휴무에 들어갔다. 그래도 ‘기사 하나는 썼구나’ 생각하며 ‘푹 쉬고 일요일에 열심히 해야지’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때만 해도 난 정신이 온전하진 않았던 것 같다. 아니, 내가 쉰다고 그들이 쉬는 것도 아닌데 어쩜 저딴 생각을 했을까 싶다.


그렇게 금요일 아침을 맞은 나는 넷플릭스를 켰다. (조슈아 웡 취재를 떠올리게 하는 또플릭스다.) 아프간 사태도 있고 해서 오랜만에 ‘제로 다크 서티’를 틀었다. 한 열 번은 본 거 같다. 오사마 빈 라덴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미국 CIA의 실화를 다룬 영화다. 수도 없이 봤지만, 금세 또 몰입했다.


그렇게 계속 영화를 보던 나는 제시카 차스테인이 빈 라덴의 수족들 얼굴 사진을 칠판에 붙여 놓고 고민하는 장면에서 잠시 멈췄다.


그리고선 넷플릭스를 끄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왜인지는 모른다. 그냥 수첩 하나를 펼치고 탈레반 공식 웹사이트에 소개돼 있는 대변인 이름을 옮겨 적었다. 모하마드 나임, 요소프 아흐마디, 자비훌라 무자히드, 수하일 샤힌. 그리고는 그들의 페이스북을 뒤지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페북의 정책 때문에 이들의 계정은 이미 정지 상태였다.


남은 건 트위터. 트위터는 그들에게 관대했다. 덕분에 트위터에 이들의 이름을 검색하고 되는대로 팔로우부터 했다. 그리고 이들이 평소 리트윗을 자주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팔로우했고, 이들이 이미 팔로우하고 있는 인물들 역시 팔로우했다. 특히 언론에 자주 노출된 샤힌을 중심으로 목록을 뒤졌다. 그렇게 파도를 타고, 또 타다 보니 지나치게 많은 인물들이 탈레반의 이름으로 SNS상에서 활동 중인 게 아닌가.


잠시 고민을 했다. 난 차스테인이 될 수 없는 걸까. 하지만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사실 내가 못 찾는 것뿐이지 방법은 늘 있다. 탈레반 계정들을 하나하나 의미 없이 뒤져보던 중 IEA라는 단어를 보게 됐다. IEA는 이슬라믹 에미레이트 오브 아프가니스탄의 약자다. 탈레반이 자신들을 지칭하고 대외적으로 활동할 때 쓰는 명칭이다. 이들은 국가 명칭도 아프가니스탄에서 IEA로 바꾸고 싶어 한다.


수백 명의 계정 가운데 프로필에 IEA라고 표시한 사람들만 찾아보기로 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다만 조금이라도 걸러보자는 마음이었다. 거르다 보니 수십 명으로 좁혀졌다. 그렇게 나는 여러 조직원들을 알게 됐다. 발음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수첩에는 사이드 코스티, 하마드 아프간 셰르자드, 아나스 하카니가 적혔다. 그중 하카니는 핵심 인물이었다. 나는 자체 조직도 이끌고 있던 그가 탈레반이 수도를 장악하기 직전 하미드 카르자이 전 아프간 대통령과 회담을 한 기록을 확인했다.


그렇게 하카니를 다시 파헤치다 보니 아흐마둘라 무타키와 무하마드 잘랄을 알게 됐다. 무타키는 탈레반 문화위원회 소속 정보국장이란 타이틀을 갖고 있었다. 국내 언론에선 나중에 멀티미디어 국장이라고 보도됐는데 그때 당시 그의 계정엔 정보국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특이하게도 왓츠앱 번호를 공개하고 있었다. 연락을 취했지만, 답은 받지 못했다.


잘랄은 탈레반의 언론을 담당하고 있었다. 영어를 구사할 줄 알았고, 과거 도이체벨레가 그를 인용해 보도한 기록이 있었다. 잘랄이라면 답을 해줄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때가 이미 금요일을 지나 토요일 저녁이었다.

잘랄이 마침 트위터에 글 하나를 올린 상황이었다. 아직 휴대폰을 쥐고 있겠거니 하고 그에게 디엠을 보냈다. 간단한 내 소개와 함께 인터뷰를 요청했다. 역시나 답이 바로 왔다. 그는 내게 전화번호 하나를 건넸다.


“이름은 압둘 카하르 발키. 이 친구한테 네가 원하는 걸 물어보면 답을 해줄 거다. 말을 걸 땐 내 이름을 대면된다.”


일이 풀리기 시작했다. 곧바로 발키라는 작자에게 왓츠앱으로 말을 걸었다. 잘랄 소개를 받은 기자라고 소개하고 얘기 좀 하자고 했다. 잠시 후 연락이 왔다. 자신이 지금 이동 중이니 좀 이따가 답해주겠다고.


그렇게 질문지를 보낸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 부여잡고 제로 다크 서티를 마저 봤다. 사실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날 수백 명을 리스트업 하느라 잠을 설쳤던 터라 눈이 감겼다. 늘 그랬듯 눈을 떠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다. 새벽 3시경. 놀라서 휴대폰을 보니 이미 발키가 답변을 보내 놓은 상황이었다.

압둘 카하르 발키. 출처 알자지라 방송

발키에게 고마움을 전하며(이게 진정 고마움인지는 모르겠다) 직책을 물으니 문화위 소속 간부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자신을 무자히드 대변인 보좌관이라고 추가 설명했다. 무자히드. 이틀간 샤힌에 꽂혀 샤힌의 남자들에게 돌아오지 않을 질문을 계속 보냈던 게 떠올랐다. 내 착오다. 사실상 당시 언론 창구는 무자히드와 발키가 쥐고 있었다.


그렇게 답변을 검토하고 나니 일요일 아침이 밝았고, 그대로 출근했다. 출근 후 평소대로 발제를 올리고 오후에 기사를 내보냈다.


그때만 해도 내 보도가 국내 언론 중 최초인 줄 알았다. 근데 아니었던 것 같다. 보도 다음 날 아침 알자지라가 영어권 단독으로 발키와의 인터뷰를 내보낸 걸 보며 ‘아 내가 지구 최초였나…’ 싶었다. (사실 기자는 이때 아니면 나대기 힘들다. 주변에 이런 기자가 있으면 그냥 봐줄 필요가 있다.) 그날 오후 국내에서도 연합뉴스가 발키와의 인터뷰를 내보내면서 언론사 대부분이 발키의 존재를 알게 됐다.


발키는 끝으로 기사 링크를 내게 부탁했다. 그와의 대화는 따봉 이모티콘으로 끝났다. 물론 발키가 보낸 거다. 난 그들에게 따봉을 하지 않는다.


조회수는 역시나였다. 오랜만에 그런 숫자를 봤다. 알고 보니 국내에 있는 거의 모든 커뮤니티에서 공유를 한 모양이다. 조회수에 연연할 필요는 없지만, 이럴 땐 연연하고 싶다. 사실 이 직업은 자기만족과 주변 관심이 전부다.


이후에도 아프간 취재는 계속했다. 여성과 탈레반을 취재했으니, 이제 저항군 입장도 들어봐야 했다. 판지시르 저항군. 국내에서도 이들에 대한 관심이 생각보다 뜨거웠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들은 내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싸우느라 바빴던 것 같기도 하다.


대신 나 포함 23명의 외신 기자들에게 왓츠앱 단체방을 만들어줬다. 지금은 아마 100명도 넘는 기자들이 그곳에 있을 거다. 그곳에서 판지시르 공보 담당자가 그날그날 찍은 사진이나 영상, 글을 게재한다. 여기서 나오는 내용은 매번 보도하기 어려워 대신 브런치를 통해 종종 소개하고 있다.


나는 이후 아프간 경제를 다뤄봤다. 전직 아프간 재무차관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안다증권의 에드워드 모야 애널리스트가 귀한 시간을 내줬다. 덕분에 경제지로서 최소한의 역할도 할 수 있었다.


미얀마 사태가 그렇듯, 홍콩 운동이 그렇듯, 아프간 사태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탈레반은 국제사회로부터 합법 정부로 승인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고 판지시르 저항군은 그들의 공격을 버텨내고 있다. 어쩌면 올해 가장 큰 이슈가 아닐까 싶다. 세간의 관심 수준을 봐도 그렇고, 주변 돌아가는 형국을 봐도 그렇다.


일련의 보도 후 기자협회보 기자와 잠시 통화할 기회를 가졌다. 외신으로 접하던 사람들을 직접 접했을 때 기분이 어떻냐고 물어왔다. 발제 거리가 생겼구나, 안도한다고 답했다. 예상한 답변이 아니어서 그런가, 그 답변은 그의 기사에 실리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발키는 보도 직전까지 구글에 검색해도 관련 뉴스가 전혀 없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나는 그저 보도를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인터뷰가 성사됐다고 혼자 신나서 팔딱 뛰던 때는 지난 거 같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더 그랬던 거 같기도 하다. 근데 협회보 기사 본문에 ‘내가 저렇게 말했었나?’ 싶은 멘트가 들어갔다. 그래서 난 앞으로도 아프간을 취재해야 할 것 같다.


“상대와 시차를 느끼지 않고 대화하려면 밤을 새워야 하긴 하지만, 탈레반과 아프간 취재를 계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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