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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승빈 Jan 04. 2021

지금까지 기억하는 이유

1월 4일. 네번째

노후되어 재개발 예정인 서촌의 한 가옥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기억.

학교에 가려면 집을 나서 약 15분 정도 걸어야 했다. 가는 길에는 작은 도랑이 있었고, 그 옆으로 교회가 있었다. 교회 앞쪽에 나있는 길은 등교 시간을 고작 1-2분 정도 단축시키는 지름길 같지 않은 지름길이었고, 오르막이라고 하기엔 낮고 평지라고 하기엔 적당한 짧은 언덕길이었다. 이른 아침이기도 했고 딱히 사람들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길이었지만, 이 날은 한 할머니가 앞서 걷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얼마 안가 할머니 옆을 후다닥 걸어서 지나쳤다.


“아이구야 저 쪼매난기 금방 확 지나가뿌네, 하이고야”


할머니의 혼잣말은 몇 걸음 앞 선 내 귀에도 선명히 들렸지만, 어린 마음에 그저 ‘나는 할머니보다 빨라요’라며 속으로 흐뭇해했던 것 같다.


사람도 물건도 심지어 나무나 기계조차도, 동시대의 모든 것들은 함께 나이 들어간다. 하지만 주름이 늘고 점점 노화되어 간다는 것은 누구나 좋아할 만한 사실은 아니지.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는 것 정도일까.


첫 번째 포르투갈 여행과 두 번째 포르투갈 여행에서의 내 걸음의 속도와 거리는 처음에 비해 조금 줄었다. 무거운 배낭에 양 어깨에 피멍이 들고 결국 찢어져서 피가 흐를 때에도 여행자로서의 자세가 아니라며 한 번도 쳐다보지도 않던 캐리어. 여행에서 돌아와 결국엔 사버렸고, 이 좋은걸 그간 왜 안 샀을까라며 즐거워했다. 한 살 늘어갈 때마다 조금씩 편한 것들을 찾게 되었다는 것은 내 체력이나 건강이 한 살 뒤쳐지고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저 먼 거리를 지금처럼 하루 동안 부지런히 걸어서 다녀올 수 있을까.

12시간이 넘는 거리를 비행기 안에서 꼼짝도 못 하고 견뎌낼 수 있을까.

가파른 오르막과 계단을 한 번도 쉬지 않고 여전히 금세 오를 수 있을까.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그 할머니를 지금까지 기억하는 이유는,

이제야 알아버린 할머니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한 미안함 때문인 것 같다.






하루 한 장의 드로잉, 하나의 단상.

1장 1단. 네 번째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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