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에 12,000원이나 주고 팔았던 책을 운 좋게 얻었다. 그 해에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유치원 때 동화를 쓰고,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시를 썼다는 나는 그저그런 조용한 학생이었다. 부모님이 엄해서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텔레비전을 볼 수가 없었다. 그때는 스마트폰도 없던 시대다. 그래서 어린 날의 나는 집에 있던 이상문학상 수상작이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목민심서 따위를 학교 쉬는 시간마다 틈틈이 읽곤 했다. 3학년이 이런 책을 보냐며 담임 선생님의 놀람 섞인 말투를 들었을 때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중학교에 가서는 학교 사서 선생님과 친하게 지냈고, 영화라는 세계에 빠졌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나는 읽는 자일 뿐 쓰는 자는 될 수 없다.’ 라는 마음이었지만, 학교 내 비공식 동아리인 문예창작부에 기웃 거릴 수 있었다. 학교에 국어 선생님이 여럿이셨는데 그 비밀스런 장소를 만든 분은 나를 가르치지 않아서, 우연찮게 친구를 통해 글쓰기 대회를 나가곤 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지만 나는 국문학과 문예창작학을 복수 전공 했다. 취업 시장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인 것을 입시 때부터 알고 있었다. (담임과 부모 몰래 지원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을 거역한 일이다.) 심지어 다른 학과인데 과목명이 같은 수업도 있었으니 대기업에서 날 뽑을 리가 없었다.
휴학 2년 동안은 뮤지컬의 재미를 알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여섯 살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무튼 졸업은 원하지 않아도 다가 왔고, 논문과 졸업 작품을 동시에 쓰며 펑펑 울었다. 선배들은 등단 하는데 나는 고작 단편 소설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해 밤새운 날이 많았다.
그 이후 돈을 벌어야 했던 20대의 나는 우리나라 500대 기업이라는 리스트를 훑어 보며 내가 넣을 수 있는 회사에는 모조리 지원 했다. 자소서를 얼마나 썼는지 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여러모로 자본주의와는 거리가 먼 스펙이었던 나를 써 주는 곳이 다행히 있었고, 열 아홉 부터 하루도 빠짐 없이 일을 했다. 아르바이트든 계약직이든 정규직이든 말이다. 그럼에도 책은 놓지 않았다. 쓰는 일은 내게 너무 무겁게 느껴져서 닥치는 대로 읽었다. 지옥 같은 출퇴근길을 소설집으로 이겨 냈다. 일산에서 수원으로 통학 했던 나에게 종로, 강남은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학교 가는 지하철에서는 숙제인 글을 쓰거나 토익 L/C를 들었다는 게 조금의 차이이다. MOS 자격증, 토클, 토익, 토스, 오픽을 따면서도 문학은 목 뒤에 붙어 있었다.
지금 나는 전업 작가가 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서른 일곱 한국 여성이다. 여전히 돈을 벌지만 이제는 저울이 바뀌었다. 일하는 시간 보다 문학에 할애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늘어났다. 작가라는 것이 내게는 너무 큰 무엇이라 함부로 도전하지 못했으나 포기하지는 않았다. 결국 동기 중 글을 쓰는 사람은 나만 남았다.
뭘 얘기 하려고 이토록 길게 문장을 나열 하는지 설명 하려면 맨 위로 되돌아 가야 한다. 이 책의 제목은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이다. 짧게는 부모님 뻘, 길게는 조부모님 뻘의 작가 일흔한 명이 썼다.
그 중 나와 궤를 함께 한 작가의 페이지만 찍어 올려 보았다. 나머지 예순 한 명도 당연히 비슷한 정서를 가지고 있지만, 유달리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분들을 추려 보았다. 문학 때문에 살았다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니, 성별과 시대를 초월하였으나 너무도 동일한 이유를 가지고 쓴다는 것이 위안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다. 좋은 작품은 이미 쓰여졌는데, 내가 그 언덕을 오를 수 있을지 두렵다.
하지만 누누히 말했듯이 내가 고르지 않았다. 문학이 날 선택했다. 문학이 날 구원 했고, 문학이 날 살게 했다. 다수가 말한다. 니가 말하는 순수 예술, 문학이라는 허울을 벗으라고, 이제 그런 것은 없다고 한다. 08학번인 나는 육이오를 겪지도 않았고 오일팔을 살지도 않았다. 제주 사삼을 알 수도 없었으며 기껏해야 등록금 반값 요구 집회, 박근혜 탄핵 시위가 다이다. 머리를 깎던 총학생회장이 있었고 물대포를 맞았지만, 이런 사건이 잊혀지지 않기 위해 내가 쓰는 것은 아니다.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사람을 알아야 하고 그러려면 쓸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고 동시에 시작이다. 결핍된 사랑과 유달리 발달된 감각으로 사는 사람은 읽을 때 기쁘고 쓸 때 쾌락과 고통을 함께 느낀다. 나라는 인간이 인류의 대서사를 쓴다는 게 아니란 말이다.
(인스타에서는 여기까지 밖에 쓰지 못했다. 글자 수의 제한이 있다는 걸 몰랐다.) 저번 일기에도 적었지만 문학은 나에게 유희이며 구원이고 작은 자살이다.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운명 같은 것이다. 40년 가까이 종이를 집어 삼키며 살았으니 이제 잘 배설할 일만 남았다. 감히 말하자면 내 글로 인해 누군가의 삶이 위로가 되었으면… 나를 읽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세상 곳곳에 살고 있는 이매송이 같은 존재가 힘을 얻었으면… 하고 바란다. 내 작품이 세상을 다정하게 만드는 데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쓴다.
*인스타에 올렸던 사진을 밑에 첨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