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 선생님
오랜만에 형철 선생님의 책을 꺼내 들었다. 내 마음 속에서는 ‘느낌의 공동체’ 와 ‘정확한 사랑의 실험’ 사이에 있는 글이다.
나와 친한 이들은 알 것이다. 선생님의 수업 때마다 맨 앞에 앉아 빤히 그를 바라 보며 사랑에 빠진 나를. 담배를 피지 않아,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흡연하는 선생님의 저 한 개피가 되고 싶다며 노래하던 시절이 있었다. 종강 뒤풀이 날, 어떻게든 옆자리에 앉고 싶어, 결국 성공했지만 이상한 질문만 잔뜩 던져서 부끄러워 했었던 어린 날의 나.
선생님은 문학을 너무 사랑해서 늘 지고 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생명의 일부를 주고 쓰는 자였다. 문학이 나를 구원했다고 믿는 나는 비슷한 무게를 지니고 연모하는 선생님께 위안을 받았던 것 같다.
선생님은 글짓기가 건축학과 유사하다 하셨다.
문장은 쓰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라고도.
특정한 인식을 가감없이 실어 나르는 단 하나의 문장이 있다는 플로베르적인 가정을 믿는다고 쓰셨는데 이에 매우 동의한다.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면 나는 문장이 찾아 온다는 것이다. 길을 걷다가 문득 완벽한 낱말과 문장이 내 머릿 속에 들어 와서 빠르게 입력된다. 아마 저장돼 있다가 그들끼리 정리하고 때가 되면 내게 오는 거겠지.
또한 공학적 글쓰기. 필요한 단락의 개수를 계산하고 각 단락에 들어가야 할 내용을 배분하고, 단락의 길이를 맞추려 노력해야 한다고… 이 시각적 균형은 사유의 구조를 반영해야 된다는 의견이셨다. 나도 글을 쓸 때 보여지는 문장, 읽힐 때의 문장을 모두 신경 쓴다. 단어들은 물론, 단락, 띄어쓰기 마저도 내 눈에 아름다워야 마음이 편하다. 이건 탐미주의자인 내 성격 탓이겠지.
이런 모든 과정을 걸치다 보면 남는 글은 너무도 조그만 무엇이다. 완성된 것을 보면 나는 죽어가고 그것은 살아간다. 하지만 상상치 못할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멈추지 않는 손, 쉼 없이 돌아가는 머리, 수정할 필요가 없는 문장, 길 한 가운데 서서 5분이 채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30분도 넘게 지난 시간에 놀라 작은 소풍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선택하는 걸 포기한다고 말하는 선생님의 수업이 그립다. 평생 사랑을 알고 싶지 않아 이매송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나. 깨닫게 되면 더이상 아무것도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렇다. 나는 사랑을 완성하기보다 함께 찾아갈 사람을 원한다. 이매송이는 길을 헤매기 보다 만드는 사람이니까. 아마 죽기 바로 직전에야 아, 하며 사랑의 정의에 가장 가까이 가닿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