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스페인의 서쪽 땅끝마을인 피스테라에 도착했을 때는 씨에스타를 즐기는 로컬의 분위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한껏 늘어져 있었다. 두 시간쯤 뒤에는 석양이 질 무렵이라 나는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피스테라 등대로 올라가는 도로는 완만한 언덕이었지만 도보로는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나는 배낭을 메고 낯선 피로와 익숙한 상념으로 지쳐버린 내 의식을 단단히 비끄러맨 뒤에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배낭은 검은 모래가 담긴 파우치 때문인지 전보다 더 무거웠다. 등대에 올라 대서양의 수평선 너머로 석양이 지는 풍경을 감상하면서 와인을 마시고 싶었다. 씨에스타로 대부분의 상점들이 문을 닫았지만 그곳으로 올라가는 도로의 입구에 위치한 작은 식료품점 한 곳이 아직 영업 중이었다. 하지만 상점에 들어갔을 때 와인은 보이지 않았다. 내 등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올라.(hola)>
검은 눈동자와 검은 곱슬머리의 청년의 눈가에 주근깨가 잔뜩 뿌려져 있었다. 하루 종일 바깥에서 햇빛을 쬐었는지 광대가 발갛게 달아오른 에스파냐 청년은 갈색의 구아야베라 셔츠를 입고 싱그럽게 미소 지었다. 청년의 인사에 나는 미소로 화답하며 친절하게 말했다.
<우노 비노 포르파보르(uno vino por favor)>
스페인어로 포르파보르는 영어로 플리즈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는 그의 말을 잊지 않고 나는 문장의 끝에 항상 포르파보르를 덧붙였다. 상점의 청년은 이방인의 낯선 억양이 익숙한 듯 엷은 미소를 머금고 나에게 물었다.
<틴토? 블랑코?(tinto? blaco?)>
레드와인을 살건지 화이트 와인을 살건지 묻는 청년에게 나는 틴토(tinto)라고 대답해 주었다. 상점에서 파는 와인은 모두 5유로 이하의 값싼 와인들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2유로짜리 와인 한 병을 사서 배낭에 넣은 뒤 등대로 향했다. 도로의 갓길에는 나처럼 도보로 등대를 향해 올라가는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대부분 경비를 아껴야 하는 가벼운 차림의 젊은 배낭여행객들이었다. 갓길은 다행히 그늘로 가려진 뒤라 씨에스타의 강렬한 햇빛을 피할 수 있었다. 등대를 향해 뻗쳐있는 도로 위로 몇 대의 차들이 지나갔다. 서행하는 차의 열린 창문 사이로 어떤 젊은 연인들은 달콤하게 입을 맞추었고 누군가는 누군가와 시끄럽게 통화를 했으며 노부부는 무표정하게 정면만을 응시하고 과거에서 현재로 들어서는 모퉁이를 들어서기도 했으며 생애처음 가져보는 추억이라는 걸 눈치챘는지 부모의 따스한 품에서 까르르 웃는 아기의 웃음을 엿볼 수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파란 바탕에 노란색 조개껍데기가 그려진 순례자 이정표에 0km라고 새겨진 걸 보았을 때 나는 고개를 들었다. 완만한 경사가 점점 평지로 바뀌는 걸 실감했을 때 내 시야에는 붉은 태양빛을 잔뜩 머금고 쉴 새 없이 반짝이는 파란 대서양의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가파른 절벽 끝에 위치한 등대로 한 발자국씩 다가갈수록 눈부신 바다는 거대하고 푸른 융단을 깔아놓은 것처럼 수평선 너머까지 우아하게 누워 있었다. 해 질 무렵 대서양의 파도는 황금빛으로 물들어 푸른 바다 위를 장식했고 따스한 곳 어딘가에서 불어온 눈부신 푸름을 가로지르는 바람에서는 한기를 느낄 수 없었다. 나는 등대 근처 완만한 경사에 앉아 한껏 무거워진 배낭을 벗고 윤곽도 없는 바람이 내 몸을 휘감는 걸 느끼면서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잔은 필요 없었다. 술은 달았고 향긋했으며 땀에 젖은 몸을 식혀주며 동시에 몸속 깊숙한 곳 어딘가를 조금씩 데워주었다. 어느덧 하늘에서는 보랏빛 황혼이 찾아왔고 불타는 노을은 대서양의 바다의 깊은 바닥으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나는 배낭에서 검은 모래가 담긴 파우치를 꺼냈다. 파우치에 담긴 검은 모래는 방금 연소한 뼛가루처럼 부드러웠고 뜨거웠으며 몸서리치도록 하얗게 빛이 났다. 한 움큼의 검은 모래가 내 손에 쥐어졌을 때 나는 누워 있던 그의 흉터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당신 기억나? 순례길을 떠나기 전에 배낭은 가볍게 해야 한다고. 배낭의 무게가 지금 삶의 무게라고. 이게 내 무게인가 봐. 당신이 보고 싶어 했던 당신의 검은 모래. 뼛가루도 불에 탄다면 이 검은 모래처럼 새카매질까? 당신의 뼛가루. 세계의 끝이라던 이곳 피스테라에서 나는 재가 되어버린 당신의 영혼을 뿌릴 거야. 그러면 당신의 영혼은 세계의 끝에서 시작되는 바람을 타고 조금 더 자유로워질까? 당신 알아? 그리움보다 강한 미움 말이야. 슬픔보다 더한 미움. 그런 게 있어. 사람들은 날 괴롭히는 게 미안함과 슬픔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니야. 미움과 부끄러움이야. 왠지는 몰라. 그런데 당신은 밉고 난 부끄러워. 왜 밉고 부끄러운지는 순례가 끝난 뒤에 알게 되겠지. 그때 왜 다시 돌아온 거야? 헤어지자 해놓고.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하려고. 당신 가슴에 얼마나 녹슬었던 말이 많이 남았었기에. 비가 많이 와서 과일이 맛이 없던. 터질 듯 습기를 가득 머금었던 그 여름밤. 그날 우리는 이별했었는데 당신은 왜 다시 나를 찾아왔을까. 헤어지지 말자고. 너 없이는 안된다는 맹세라도 하려고 그랬던 거야? 당신의 지킬 수 없는 맹세 때문에 난 지옥에서 살았어. 그럼 나는 누구를 미워해야 하지? 모든 일의 원인인 나를 증오해야 되나? 순례가 끝나면 올해가 지나겠지. 다른 해에 도착한 순례자는 지은 죄의 절반을 속죄받는다잖아. 신이 나에게 정해준 날짜가 그렇듯 나는 절반의 죄를 짊어지고 살아갈 거야. 그건 아마도 당신을 미워한 죄일 거야. 내가 뿌리는 우리의 눈부신 시절은 검은 모래에 파묻혀 영원한 바닷속으로 가라앉게 될 거야. 눈부신 시절은 눈이 멀기 쉬우니까. 나는 더 이상 어둠 속을 헤매고 싶지 않아. 나는 거꾸로 걸어볼까 해. 당신 때문에 지옥이었던 나의 부끄러운 나날들에서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나만의 순례가 이제 시작되는 거야.>
손 끝에서는 마지막 한 움큼의 검은 모래가 붉게 물든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그것은 검은 뼛가루처럼 뜨거운 눈물을 머금고 멀리 아주 멀리 내가 찾아갈 수 없는 차가운 어딘가로 흔적도 없이 흩어져버렸다. 내 눈에서는 마지막 일 것 같은 눈물이 흘렀다. 수 없이 흘렸던 눈물은 이름 붙일 수 없는 수많은 감정들을 머금고 있었다. 그에 대한 감정이 어떠한 것인지, 정확히 무엇인지, 이름만 붙일 수만 있다면 그것이 외로움이든 슬픔이든, 증오나 부끄러움이든, 미움이든 분노든, 배반이든 모멸이든,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익숙한 정념이 사방에서 몰려와 무방비하게 방치된 누선을 자극할 때면 너무 많은 익명의 감정들이 간헐적으로 뜨겁게 예고도 없이 솟구쳤다. 그때마다 나는 매번 소스라쳤고, 매번 화상이었다. 마지막 한 모금의 와인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델만큼 뜨거운 39도의 눈물이 마지막일 것처럼 두 뺨을 적셨다.
6.
뭐 좀 마실래라는 그의 건조한 물음에 나는 그냥 아. 아라고 말해버린다. 사소한 것에 기호와 취향을 주장하기엔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 근거 없는 열등감은 아무래도 그의 움직임 속에서 이별의 암시가 빈번해진 이후에 생긴 병이다. 제대로 된 병명을 붙일 수 없는 그 병은 때때로 그의 곁을 서성이던 나를 더욱 자격이 모자라는 사람처럼 만들어주기도 했다. 차창에 매달린 빗방울은 조급한 계절의 속도감을 느끼며 흘러내리고 있었고 창 틈으로 불어온 바람결에서는 마른 꽃냄새가 묻어났다. 그가 커피를 손에 든 채 운전석에 다시 앉았을 때에는 쌉싸름한 담배냄새가 풍겨왔다. 커피는 냉장고에 들어있던 잉크 같았고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차에 앉아 피어오르는 어둠을 응시했다. 종이컵에 너절하게 구겨진 그의 담배는 더 이상 푸르스름한 연기를 피워 올리지 않았고 위태롭게 쌓여있던 흰 재가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불어온 가벼운 바람에 차 시트 위로 소리 없이 흩날렸다. 그가 재킷주머니에서 새 담뱃갑을 꺼냈다. 그가 담뱃갑의 비닐을 뜯는 순간 밀봉된 것이 함부로 뜯어질 때의 모독감과 서늘한 긴장감이 내 귀전을 맴돌았다. 다 뜯어진 투명한 비닐을 창 밖으로 던지는 그를 보며 나는 함부로 취급받고 있다는 치욕스러움에 몸서리쳤다.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문 그의 입에서 미욱한 문장이 새어 나왔다.
<어머니는 당신을 반대하는 게 아니야. 우리의 결혼을 조금 염려하시는 것뿐이야.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나랑 같이 찾아뵙고 다시 인사드리면 허락하실 거야.>
부모 없이 자란 티가 난다는 그의 어머니말에 나는 상처를 입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보험회사의 본부장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직감만이 알아볼 수 있는 것. 성장환경, 습성, 기질 같은 조건반사의 구조들을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인간의 행동양상에는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 양식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둘러싼 환경을 결코 무시하면 안 된다는 게 그의 어머니의 원칙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그런 직관은 그녀가 여태까지 이룬 커리어를 대변해 주었다.
<그렇게 결혼을 하면 우리가 행복할 거 같아?>
<아이가 생겼다고 하면 어머니도 반대 못하실 거야.>
나는 이미 한 차례 그의 아이를 지웠었다. 당시에 그는 아버지가 된다는 것을 두려워했고 나는 청신호가 켜져 있는 그의 회사 생활에 올가미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임신사실을 숨기고 혼자 중절수술을 마쳤고 내가 복통으로 쓰러졌을 때 병원에 찾아온 그는 나의 중절수술의 이력을 의사에게 전해 듣고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신의 그 잘난 어머니가 내 배에서 나온 아이를 좋아하실 거 같아? 더러운 유전자를 가졌다고 증오하기만 할걸?>
<말 좀 그렇게 하지 말아 주겠어?>
<내 말이 틀려?>
<미경아. 너는 왜 네 생각만 하니? 내 생각은 안 해? 내가 어머니랑 너 사이에서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네가 더 잘 알잖아.>
<당신 힘들어하는 걸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어머니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에 당신이 힘든거겠지. 속이려 하지 말고 진실을 말해. 헤어지고 싶다고. 너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고. 이제 끝내자고.>
<말을 꼭 그렇게 해야만 네 속이 후련하겠어?>
눈시울이 붉어진 그의 얼굴을 나는 무연히 바라보며 그를 조소하듯 내뱉었다. 내 목소리는 우리 사이에 세워진 차가운 냉기와 정적 속을 기묘할 정도로 침착하게 그리고 한없이 묵직하게 가로질렀다.
<당신 때문에 아이를 지운 건 아니야. 그러니까 나한테 더 이상 죄책감이나 책임감 따위 안 가져도 돼. 그거 알아? 당신이 결혼에 집착할 때마다 나는 당신에게서 도망치고 싶어.>
분노와 증오, 혐오와 괄시로 가득 찬 그의 입에서 날카로운 파열음이 흘러나왔다.
<이런 젠장. 그래. 그럼 당신 말대로 해주지. 헤어져. 헤어지자고.>
날이 선 언어들로 좁은 공간이 메워지고 그것들이 곧 우리 사이를 갈라놓기 시작했을 때 빗방울은 조금씩 두꺼워지면서 이내 모든 것을 뚫어버릴 기세로 맹렬하게 쏟아져 내렸다. 그가 손가락에서 뺀 반지를 창틈으로 내던지는 걸 보고서야 나는 어둠 속에서 울음을 삼킨 채로 맹렬하게 쏟아붓는 폭우 속을 걸어 들어갔다. 오피스텔 일층에서 공동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를 때 나는 내 뒤에 누군가 서성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배달주소를 착오한 배달기사가 손님과 전화통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전화기를 붙잡고 연신 굽신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문이 열리자 그는 내 뒤를 따라 들어온 후 계단으로 올라갔고 나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집에 도착하니 그제야 몸이 떨려왔다. 비를 맞고 오랫동안 걸어서인지 이별의 슬픔이나 미련이라는 유예기간이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냉소적인 고독감 따위는 느낄 수 없었다. 그저 따듯한 물에 샤워를 하고 소파에 앉아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일층에서 보았던 배달기사가 여전히 전화기를 붙잡고 헤매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그를 지나쳐 문 앞에 서서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현관에 들어서서 등 뒤로 문이 닫힐 때쯤 뒤에서 기분 나쁜 숨소리가 들려왔다.
배달기사는 칼을 꺼내서 내 목에 겨누었다. 경직된 몸은 이미 공포로 휘감겼고 나는 그의 손에 이끌려 침대로 끌려갔다. 그는 내 옷을 모두 찢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러운 혀로 내 몸을 더듬어내려 갔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내 몸은 농밀한 암흑 속에서 짓밟혔다. 내가 할 수 있던 것은 가망 없는 몸부림뿐이었다. 폭력으로 물든 어둠 속에서 나는 눈을 감고 내가 해체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관조된 시간이 어둠을 헤집고 있을 때 밖에서 누군가 도어록을 눌렀다. 문을 열고 그가 들어왔을 때 배달기사의 칼 끝은 내가 아닌 그를 향해 있었다. 날카로운 외마디 비명이 들린 후에 어둠은 더욱 폭력으로 짙어졌고 곧 피비린내가 방을 메우기 시작했다. 시뻘건 비극이 묻어난 칼날이 바닥에 떨어진 것을 알아차렸을 때에는 현관문이 열려 있었고 집 안에는 적막만이 고요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그곳에는 불길한 온기와 질퍽이는 축축함만이 바닥에 고여있었다. 오피스텔 복도와 계단에는 선명한 핏자국들이 떨어져 있었다. 나는 그 붉은색을 따라 거리로 나왔다. 늦은 밤이었지만 도로에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차에 치여 깔렸는지 사람은 머리가 반쯤 떨어져 나간 채로 차 밑에 깔려 있었는데 그 옆에는 멀쩡하게 보이는 사람이 엎드려 있었다. 나는 엎드려 있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차가운 바닥에 구겨진 휴지처럼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그의 손에는 내가 끼운 반지와 똑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찬피 동물의 어둡고 축축한 몸속에서 붉고 푸른 내장들이 푸르륵 경련을 하듯이 엎드려 있는 그의 몸 여기저기에서 차갑고 붉은 피가 쉴 새 없이 새어 나왔다.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