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2

by 김로윤

3.

유골함의 무게는 모순적이었다. 한 사람의 생은 꽤 무거웠지만 한 줌의 가루로 생이 마감되었을 때는 저울질을 할 필요도 없이 한 없이 가벼웠다. 엄마는 뼈와 가죽만 남아있을 때보다 눈을 감고 냉동실에 누워 있을 때 더 무거웠고. 염을 마치고 삼베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관에 누워있을 때 더 무거웠다. 소각로로 들어가는 그 무거운 몸 끝자락에 엄마가 좋아했던 분홍색 꽃신이 달려있었다. 하얗게 변해버린 엄마는 그제야 가벼워졌다. 찬바람에 나풀나풀 춤을 추듯 허공 어딘가에서 엄마의 유해가 부유할 것이었다. 소각로의 직원은 같이 태울 물건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여전히 졸업앨범을 만지작 거릴 뿐 쉽게 결단하지는 못했다. 발인을 마치고 얼마 뒤에 엄마가 없는 집을 찾아갔다. 그곳에 발을 딛자마자 내 기억은 돌이킬 수 없도록 멀어진 지점에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편지. 누군가 나에게 써 준 아주 오래된 편지를 엄마는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나는 집안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주인을 잃어버린 엄마의 물건들은 서서히 풍화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엄마의 서재에 들어가서 엄마가 자주 읽던 소설들을 꺼내어 보았다. 그중 헤밍웨이의 소설책 사이에 끼워진 낡은 편지지를 발견했다. 책 머리말에는 엄마의 글씨체로 이렇게 쓰여있었다. 당신이 무엇을 소유했음을 알게 되는 것은 그것을 누군가에게 주었을 때이다. 누렇게 떠버린 그 편지는 오래전 채집한 클로버처럼 손이 닿으면 바스러질 것 같았다. 나는 벽에 기대어 차가운 방바닥에 앉아 조심스럽게 편지를 펼쳐보았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잉크와 눈물이 뒤섞인 최고의 레시피답게 그 편지의 첫 문장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초점이 마구 흔들려버린 그 문장을 보면서 나는 여린 취기처럼 어떤 그리움이 동시에 강한 두려움이 서서히 번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문장 속에 깃든 떨림을 본다. 그것은 어떤 두려움일까. 그 두려움은 너무 무겁고 어두워서 내 시선마저 모조리 어둠으로 물들일 것만 같다. 두려움은 냉소로 냉소는 환멸로 환멸은 결국 스스로를 조준한 혐오로. 내 눈가에는 물기가 맺히려다 사라진다.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극진한 울음이 밀려 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손가락으로 내 목덜미를 마구 긁어댔다. 손톱자국이 여러 갈래의 붉은 길을 만들어냈다. 오랫동안 단련되어 돌덩이처럼 굳어버린 눈물, 화석 같은 눈물이라도 흘러주길 바랐지만 결국 아무것도 내 누선을 자극하진 못했다. 창 밖에서 흘러 들어오는 묽은 어둠을 무연히 바라보며 나는 편지를 곱게 접어 휴대폰 케이스 뒤쪽에 넣어두었다. 겨울을 앞둔 저녁은 꽤나 성실하다. 짙어진 어둠 속에서 창틀의 제라늄 꽃이 요염하게 붉다. 나는 저 꽃을 단 한 번도 이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 생각을 읽어냈는지 제라늄 꽃은 더 음탕하게 숨을 쉬는 것처럼 보였다. 주인을 잃어버린,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엄마의 방은 꼭 현재의 점유자에 대해 기묘한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방향성을 찾지 못한 앙심은 현재 점유자를 향한 지탄과 힐난을 유발하진 못했다. 아직 엄마의 항적이 남아있는 방 안으로 숨죽여서 웅크리고 있는 어둠이 기어들어왔다. 나는 웅크리고 누워있는 어둠 위로 내 몸을 포개었다. 추웠고, 살갗이 아려왔다. 엄마의 삶이 그려낸 무질서한 항적들로 오염된 공기를 들이마시며 잃어버린 시절들을 회상했다. 늘 무언가를 상실한 뒤에 나를 사로잡은 건 슬픔이 아니라 추위였다. 겨울의 시작과 그 끝자락의 추위는 정점의 추위보다 더 썰렁했다. 다가오는 추위를 향해 혼자 성질을 낼 때면 어김없이 상실의 편린들이 애잔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의 조각들을 환기시킬 때마다 나는 더럭 겁을 먹었다. 공허하고 황폐한, 두려워서 치를 떠는, 혼돈으로 모든 것이 흐트러진, 어딘가 깊고 어두운 곳으로 대책 없이 떠내려가는, 그런 느낌들이 나를 사로잡곤 했다. 하지만 엄마의 죽음으로 상실의 고통을 견딜만한 면역세포가 내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긴 한숨이 내 입에서 새어 나왔다. 뜨거운 숨결에 서려있는 우울과 비애의 파장은 금세 분쇄된 채 허공을 떠도는 잡음들로 변모했다. 창 밖에서 개 짖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가 죽기 전 엄마의 몸뚱이처럼 비쩍 말라버린 달빛에 어렴풋이 묻어 나오는 착각이 들었다. 두려움이 점지해 준 엄마의 오래된 은거지는 발신지를 찾을 수 없는 소음들로 서서히 메워져 갔다. 그 소리들은 끝내 각성을 호출하지는 못했고 나는 어둠과 추위와 소음들 속에서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동이 트는 중이었다. 아직 어둠이 내려앉아 있는 회색 콘크리트 건물들 사이사이로 주황색 물결들이 넘실댔다.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어 메시지를 확인해 보았다. 덕영에게 걸려온 수차례의 부재중 통화와 붉은색 메시지의 표시가 화면을 뒤덮고 있었다. 급하게 근황을 알린다는 것은 반길만한 것이 못되었다. 사람은 행복은 나누진 못할지언정 불행은 이곳저곳 널리 퍼트려 나누어가지길 원하니까. 나는 그 붉은 표시들에게서 불행의 그늘을 느낄 수 있었다.

언니. 태랑언니 그 새끼한테 맞았어. 그 문신 양아치 새끼 말이야. 언니. 어디야. 그 새끼들이 우리 방송 또 훼방 놓고 있어. 언니 빨리. 여기로 좀 와줘. 언니 제발. 우리 좀 도와줘.

덕영의 메시지에는 다급함과 초조함이 깃들어있었다. 나는 황급하게 몸을 일으켜서 욕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맨 얼굴로 현관문을 열었다.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무희처럼 내 걸음은 점점 빨라져 갔다. 새벽공기에 맞닿은 맨 얼굴이 활짝 열린 창문 같았다. 리듬과 박자를 맞춘 걸음이 제발 꼬이지 않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박자를 하나라도 깨면 모든 것이 어긋나듯이 불행에서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더 많은 불행이 찾아온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불행엔 박자가 있었다. 둘, 셋. 다시 하나. 넘어지고, 일어서고, 다시 숨을 고르는 박자. 행복은 잠깐의 쉼표일 뿐. 생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반복이었다. 나는 넘어질 때마다 조금 더 정확하게 춤을 췄다. 끝이 보이지 않아 멈출 수 없는. 꼭 필요했던 불행의 춤.

부천역 앞은 아직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무 데크가 깔려있는 부천역 앞에 널브러져 있는 덕영과 태랑이 보였다. 반쯤 부서진 벤치에 널브러진 모습이 마치 개수대에서 녹고 있는 언 행주 같았다. 그 아래에는 물에 젖어 겁을 먹은 고양이가 두려움에 떠는 짐승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제야 사람의 온기가 느껴졌는지 덕영이 고개를 들었다. 바닥에 뒹굴고 있는 방송용 휴대전화의 액정은 이미 산산조각이 나있었다. 덕영은 나를 보자마자 눈시울이 붉어지며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처럼 보였다. 태랑의 하얀색 코트는 빨간 피로 얼룩져있었고 생채기가 난 광대뼈 밑으로 코피를 흘린 흔적이 묻어있었다.

<언니. 그 새끼가 갑자기 다가오더니 주먹을 휘둘렀어. 그 패거리들은 주변에서 팔짱 끼고 낄낄거리고 있고, 우리 둘 뿐인데 속수무책으로 두들겨 맞았지 뭐. 지나가는 행인들이 그렇게 많은데 아무도 말리지 않았어. 우리가 트랜스젠더라는 걸 알았나 봐.>

예상외로 덕영의 입술은 침착했다. 불행에 익숙한 자들이 가진 체념이 그나마 덕영을 안정시켜 주었다. 덕영의 안정감 덕분인지 잠깐 눈을 붙인 태랑의 얼굴도 조금 편안해 보였다.

<그 새끼들 어디 있어?>

건조한 나의 물음에 덕영은 턱 끝으로 길게 뻗은 골목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로 간 거 같은데. 잘 모르겠어.>

<방송 켜. 오늘 그 새끼들 잡는다.>

<안돼. 오늘 그 패거리 머릿수가 꽤 돼. 우리가 당할게 뻔해. 오늘은 그냥 집에 가서 쉬자. 태랑 언니도 다쳤으니까. 병원도 가야지.>

<계속 도망만 다니다 인생 종 칠 거야? 그 유명한 대사도 있잖아.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언니. 우린 낙원 같은 거 아무래도 좋아. 낙원보다 유배지라면 차라리 좋겠어. 그럼 우릴 가엾게라도 볼 텐데. 우린 편하려고 낙원을 원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자유롭고 싶을 뿐이야. 내 말 이해 할 수 있겠어?>

<자유는 대가를 원해. 그것도 아주 거대하고 위험한 대가.>

나는 내 휴대전화로 라이브 방송을 켜고 그것을 덕영의 손에 쥐어주었다. 머뭇거리던 덕영의 손이 휴대전화를 거치대에 올려놓았을 때 골목 어귀에서 패거리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고 있었다. 나는 점퍼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달콤하고 씁쓸한 담배연기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면서 두려워하는 자의 몸에서 풍겨오던 냄새가 코를 스쳤다. 비에 젖은 털냄새. 그건 두려움에 떠는 날짐승의 냄새였다. 만용, 오만, 교태 따위로는 결코 숨길 수 없는 강렬한 냄새. 나는 패거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언니. 안돼. 다쳐. 가지 마.>

<방송이나 잘 찍어. 지금부터 쇼타임이니까. 똑똑히 보라고.>

공포와 위험을 알리는 덕영의 음성을 뒤로하고 나는 그들에게 향했다. 일시에 스커트를 올려 속옷을 보여주듯 노출하는 시간. 잘 봐. 이게 나야. 존재 증명의 앞에 어떤 금기도 힘을 잃는 시간. 금기는 열정의 풀무다.

자기도취가 제공하는, 엑스터시. 그 마취의 황홀경에 빠진 내 발걸음은 또다시 박자를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4.

<야, 이 개새끼들아.>

국밥집 앞 텅 빈 주차장에서 패거리들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술을 마셨는지 하나같이 불콰한 얼굴들은 붉은 사막의 사구들처럼 보였다. 별안간 허공에서 난무하는 욕설은 불콰한 얼굴들을 일제히 나를 향하게 만들었다. 패거리의 중심에 내 발걸음이 멈춰 섰고 그 진영은 도저히 용해될 수 없는 물과 기름처럼 이질적으로 보였다. 진영의 한가운데에 서있던 사내의 시선이 드디어 내 얼굴을 겨냥했다. 겨울이 코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불구하고 짧은 반바지에 반팔티를 입고 있는 사내의 몸에는 이레즈미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도약과 추락이 공존하는 무질서의 천국 같은 부천역에서 나는 몇 번이고 그 사내와 마주한 적이 있었다. 갱생과 교화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사내에게서는 고름 같은 악취가 풍겨졌다. 어느새 그의 주변에는 거대한 교리를 만들어낸 창시자를 신봉하는 신도들의 예배당처럼 둥그런 원이 만들어졌다. 나는 그 폐쇄된 원 안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 폐곡선은 너무 두꺼웠고 선명하며 날카로웠다. 내가 사내에게 가까이 다가서자 그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파르르 떨려오는 검은 눈가에는 배척당해야 마땅하다는 경고와 각인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 씨발놈아. 네가 쟤네들 때렸어?>

<이거, 완전 미친년이네. 큭큭.>

사내의 섬뜩한 웃음소리에는 혐오와 괄시가 묻어났다. 패거리들은 길바닥에 가래침을 뱉으며 나를 겨냥한 조소를 하나 둘 뱉어내기 시작했다. 나를 둘러싼 폐곡선의 지름은 그들의 천대와 굴종의 압박으로 점점 좁혀져 갔다. 사내의 불거진 광대뼈 위로 선명한 아침햇살이 비추었다. 그것은 마치 무수한 화살처럼 적의를 곤두세우고 있었다. 현실은 결국 내게 복종을 원한다. 근거 없는 용감함은 폭군과 같은 현실에 무릎을 꿇고 만다. 어쩌면 용감함이란 용감하지 않은 것에 대한 강렬한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나는 물에 젖은 날짐승의 털에서 풍겨오는 두려움의 냄새를 감추기 위해 애를 썼다. 패거리들은 상대방의 감정을 점거하는데 능란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빌었다. 의심을 허용하지 않는 확신으로 나 자신을 밀어붙여 야만 하노라고. 서릿발 같은 긴장감이 좁아진 원을 메워갈 때쯤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때렸다. 이 꼴 같지 않은 년아. 아랫도리 잘라버리고 사내구실 버린 것들이 사람 새끼들이냐? 부천역에서 저것들 쌍판때기만 마주하면 성질이 나서 몸이 근질거려. 그래서 흠씬 두들겨줬다. 왜. 너도 저 치들처럼 밟아줄까. 엉?>

<좋아. 어디 붙어보자. 이 새끼야.>

나는 사내의 턱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사내는 허리만 반쯤 돌려 보란 듯이 내 주먹을 피했고 사내의 발길질이 내 옆구리를 강타했다. 윽. 비명을 지를 수 조차 없는 강력한 고통이 내 몸의 느슨해진 근육과 신경들을 빈틈없이 수축시켰다. 이내 사내의 주먹이 내 얼굴과 명치로 수차례 날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은 뜨거운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고통은 맥박 치듯 살아 날뛰었다. 어떻게 서든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덕영과 태랑이 이 광경을 라이브 방송으로 송출하고 있었다. 태랑은 이제야 정신을 차린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암흑의 공간에 갇혀 빛과 천의 조롱을 당해 흥분해 버린 검은 소가 되어 사내의 허리춤으로 강하게 파고들었다. 너와 함께 지옥 끝까지 가겠노라는 의지가 사내를 벽으로 몰아붙였다. 사내의 팔꿈치와 주먹이 내 등짝을 후려치는 동안 나는 사내의 발치에 놓인 붉은 벽돌을 보았다.

어떻게 서든 우연이 가져온 이 희박한 가능성을 붙들어야만 했다. 나는 일부러 체력이 모두 소진된 것처럼 몸에 힘을 빼고 사내의 허리춤에서 슬쩍 빠져나왔다. 사내의 무릎이 그 틈을 노리고 내 아랫배를 향해 날아왔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나는 쥐고 있던 벽돌로 사내의 무릎을 내리쳤다.

<으악, 이 씨발년아.>

휘청대는 사내를 향해 나는 있는 힘껏 주먹을 날렸다.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무언가 깨지는 것 같은 감각이 손가락 끝을 타고 온몸으로 전해졌다. 사내는 한 손으로 입을 막고 시멘트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의 투박한 손가락 사이로 빨간 피가 새어 나왔다. 사내는 반쯤 정신이 나갔는지 비틀거리면서 내 허리춤으로 파고들었다. 능숙한 투우사에게 몇 차례 칼을 맞아 피를 흘리는 검은 소처럼. 나는 다리를 걸어 그를 시멘트 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그리고 그의 배 위에 올라가 그의 머리채를 잡았다. 얼굴에서 흐르는 피가 사내의 얼굴에 한 방울씩 떨어졌다. 느닷없이 벌어진 싸움 구경으로 주위는 어느 순간 북새통을 이루었다. 아무도 경찰에 신고는 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는 초점 잃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끝내 언어로 맺히지는 못했다. 그의 목젖이 무언가를 꿀꺽 삼킨 것처럼 꿀렁거렸다. 그것은 공포에 빠진 불가항력, 불가사의한 힘에 대한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저항과도 같았다.

<그만. 이제 그만.>

패색이 짙어진 사내의 입술에서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런 그에게 나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말해질 수 있는 건 고통이 아니야. 아픔을 표현할 수 있다는 건 참을 수 있다는 거야.>

쾌감을 동반한 숨 가쁜 살의의 절정에서 나는 마지막으로 피범벅이 된 그의 얼굴을 가격했다. 기어코 마지막 칼자루를 상대의 급소에 꽃아 넣는 마타도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둘러싼 패거리들을 쏘아보았다.

<자, 다음은 누구야.>

나는 누구든 상대해 주겠다고 큰소리치며 다리를 벌리는 노련한 창녀처럼 그들을 도발했다.

나를 둘러싼 폐곡선은 서서히 지름을 넓혀가며 희미해져 갔다. 북새통을 이루던 주차장의 인파도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차장에 나 혼자 남게 되었을 때 극심한 추위와 통증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나는 자리에서 휘청거렸다. 누군가 내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부축했다. 끝까지 지켜보던 덕영과 태랑이었다. 덕영이 들고 있는 휴대전화는 여전히 라이브 방송이 송출되고 있었다. 카메라는 만신창이가 된 내 몰골을 찍고 있었고 채팅창은 수많은 시청자들의 채팅으로 도배되고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슈퍼챗으로 후원금을 보낸 것이 눈에 띄었다.

<언니. 괜찮아? 봐봐요. 여러분. 우리 미강언니가 부천역 먹었어요. 이제 부천역은 우리 나와바리니까. 건들면 면 다 죽어. 하하하. 소감 물어보라고요? 언니. 이 한바탕 전쟁에서 승리한 기분이 어때?>

나는 태랑이 손에 쥐어준 물티슈로 얼굴을 닦아내며 말했다.

<아, 죽겠어. 너무 아파. 큭큭. 여러분. 만약에 내가 죽으면 묘비명에 이렇게 써줄래요? 그녀는 죽네 마네 해대던 것치곤 의외로 오래 살았다. 큭큭.>

방종을 한 우리 셋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발로 걷어 차인 옆구리가 시큰했다. 비맥을 먹자는 내 말에 덕영은 은 잰걸음으로 편의점으로 향했다. 덕영이 들고 온 비닐에서 큼지막한 플라스틱 얼음컵을 꺼내 비타민 음료를 모두 쏟아 넣고 캔맥주를 부어 넣었다. 입안의 상처들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맥주는 차가웠다. 하지만 흥분을 가라앉히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온도였다. 끓어올랐던 혈관을 통해 정직한 취기만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취기는 세포들을 헐겁게 만들었다. 불판에 얹은 냉동고기에서 물이 새어 나오듯 헐거워진 세포들에서 알 수 없는 허탈함이 빠져나왔다. 차가움은 금세 상쇄되었고 미열은 극심한 두통을 몰고 왔다.

병원을 가자는 태랑의 말에 우리 셋은 동시에 발걸음을 옮겼다. 아침이 밝아왔지만 부천역 지하상가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두꺼운 박스로 몸을 덮고 있는 노숙인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언니. 허기진다. 이거 좀 먹고 가자.>

덕영과 태랑은 분식집 앞에서 어묵꼬치를 집어 들었다. 나는 그들의 뒤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왜인지 좁고 아늑한 곳에 들어가고 싶었다. 다락방과도 같은. 저 멀리 사람 두 명이 누울 수 있는 사방이 막힌 종이 박스가 보였다. 나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몸이 들어갈 입구를 도려낸 박스는 육면체가 아닌 오면체였다. 그 안에는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여자가 솜 패딩을 겹겹이 입은 채로 잠에 빠져있었다. 공간은 두 사람이 눕기에 적당해 보였다. 나는 몸을 구부려 그 비좁은 입구로 들어가 노숙인 여자와 함께 나란히 누웠다. 아늑했고, 따듯했다. 눈을 감았을 때 나는 꿈을 꾸길 바랬다. 네가 나오는 꿈. 제 아무리 꿈이라도 손 끝에 네가 만져졌으면 좋겠다. 귓가에 내 이름을 부르는 덕영과 태랑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사람들의 구두굽소리에 내 이름이 묻혀버리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잠에 빠져 들었다. 꿈속의 네가 내 이름을 불러주기를 바라면서.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