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ep into
코 끝이 매서워지면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쓸쓸함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나무들은 잎사귀에 숨겨놓은 여린 가지들을 헤프게 드러냈고 메마른 바람이 불 때면 그 앙상한 실루엣들이 흔들렸다. 시간의 중력은 변함없이 제자리를 찾아갔고, 그런 정직한 시간 속에 또 한 번의 계절이 새겨졌다.
영은 그 이후로도 윤의 가게에 찾아와서 술을 마셨다. 가게를 찾을 때마다 늘 혼자였다. 영은 윤과 단 둘이서만 술을 마셨고 선수를 앉히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서로를 편하게 느꼈고, 서로의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때문에 진심 어린 대화들을 나눌 수 있었다. 둘은 자신들의 현재 상황과 심정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다. 나이는 영이 3살 많았지만 둘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영은 윤의 가게에서 술을 마시다가 한번 이렇게 물었다.
"여기가 왜 두꺼비집이야?"
윤은 그 물음에 답을 하기 위해서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어렸을 때 집에 있으면 엄마랑 아빠가 싸우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어. 그 소리가 너무 듣기 싫어서 놀이터에 나가서 시간을 보냈지. 그날은 비가 왔었는데 어떤 아이가 손으로 모래바닥을 파는 거야. 자신의 옷이 젖어 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팠어. 그러더니 그 구덩이 속에 손을 넣고 크기를 가늠하고 손위로 다시 흙을 덮는 거 아니겠어? 땅을 팠던 것처럼 다시 열정적으로 흙을 쌓고 있는 거야. 마치 찰흙으로 무엇을 빚는 것처럼 보였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자신의 손이 묻혀있는 그 모래더미를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이상한 노래를 불렀어. 무슨 주문을 외우듯이 말이야.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 게 새 집 다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 게 새 집 다오. 몇 번 부르고 나서 묻혀있던 손을 아주 조심스럽게 빼내기 시작했어.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던지 보고 있던 내가 숨을 죽이고 지켜보게 되더라. 아이의 손이 완벽히 빠져나오니까 작은 동굴처럼 생긴 게 내 눈에 보이는 거야. 그 아이는 작은 동굴 속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는 웃음을 지었어. 나는 아이한테 다가가서 물었지. 이게 뭐냐고. 아이는 자신이 만든 것이 두꺼비집이라고 했고 나에게 물어봤어 너도 이 안을 들여다보겠냐고.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고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 다음 조심스럽게 그 안을 들여다봤어. 그때 처음 느꼈어. 이 좁고 어두컴컴한 작은 공간이 나에게는 천국처럼 아늑하다는 걸."
"어머 가엾어라."
영이 윤에게 측은함을 느끼며 말했다.
"어렸을 때 그 모습이 뇌리에서 잊히지가 않더라. 그 이유가 그런 공간을 가지고 싶어서였나 봐. 그래서 이 룸은 사장한테 부탁해서 모두 내 손으로 꾸민 거야. 기본 인테리어는 그대로지만 테이블, 소파, 조명, 향기까지
내 취향이 담긴 곳이지."
"여기 공기가.. 뭐랄까. 참 좋아. 이곳에 있다가 집에 가면 얼마 안 가서 여기 냄새가 그리워져. 왜 그런지 몰랐었는데. 윤. 네 냄새가 이곳에 가득 배어있어서 그런가 봐."
영은 술기운 탓인지 수줍음 탓인지 볼이 발그레해져서 윤에게 말했다. 윤은 달아오른 영의 얼굴을 보고 수줍음이라고 믿기로 했다. 그리고 그 수줍음이 머금고 있는 미열이 새하얗던 영의 얼굴을 더욱 하얗게 돋보이게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네 얘기를 듣고 나니까 기분이 좋아진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리움을 안겨줄 수 있다는 게. 난 잘 안 믿겨. 누군가에게 애틋함을 불러일으키는 거. 그런 것도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 건가? 나는 나 자신을 항상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거든."
영은 윤의 말을 듣고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
"어떤 사람은 그 존재만으로도 도움이 되고 위로가 될 때가 있어. 슬프지만 대부분 당사자들은 그 사실을 모르지만 말이야."
영의 말을 듣고 윤의 머릿속에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영원히 타인을 사랑하지 못한다'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언제 어디서 읽은 문장인지 헤아려보았지만 결국 기억해 내지는 못했다. 저주에 걸린 것처럼.
이 날밤 윤과 영은 처음으로 같은 침대에 누웠다. 차갑게 칠해진 새벽에는 예고도 없이 첫눈이 내렸다. 윤은 영을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갔다. 영은 집을 둘러보더니 미소를 머금고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주 마음에 들어. 딱 당신 같아."
윤의 집 통유리창 너머에서는 달빛이 부서지며 어둠이 내려앉은 세계를 은은하게 비추었고 아직 꺼지지 않은 도심의 네온사인과 가로등 불빛들이 점멸하고 있었다. 크고 작은 불빛들 사이사이로 투명한 눈송이가 소리도 없이 흩날렸다. 영은 유리창 앞에 서서 어둠이 하얗게 물들어가는 풍경을 바라보았고 윤은 뒤에서 영을 안아주었다. 등뒤에서 느껴지는 윤의 체온에 한동안 꽁꽁 얼어붙어있던 영의 가슴이 녹아내렸다. 영은 깍지를 끼고 있는 윤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고개를 비스듬히 뒤로 젖혀 윤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었다. 둘은 통유리창 앞에 있는 소파에 누워서 차갑게 스며드는 창백한 달빛에 온몸을 적시며 서로의 옷을 벗겼다. 그리고 엉켜있는 서로의 몸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으며 눈 내리는 새벽을 탐닉했다. 하나의 체온으로 달아오른 둘은 마지막 순간을 위해 발화하려 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영의 몸은 불씨가 메말라가면서 끝내 열리지 않았다.
영은 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윤은 그런 그녀를 품속에 꼭 끌어안은 채 괜찮다고 속삭이며 다독여주었다.
"괜찮아. 정말 괜찮아."
영은 윤의 따듯한 품속에서 잠이 들었다.
둘의 관계는 그날 이후로 더욱더 깊어져갔다. 영은 윤이 사는 오피스텔 도어록 비밀번호를 알게 되었고, 윤은 가끔 영의 식당에 가서 밥을 먹거나 일손이 바쁠 때 서빙이나 주방일을 도와주었다. 영은 혼자 사는 남자의 집 비밀번호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친한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었지만 알릴 사람도, 그 사소한 기쁨을 알아줄 것 같은 사람도 곁에 없었다. 그런 자신의 처지를 딱하게 여겼지만, 한편으로는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동안 전 남편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라는 의문이 들었으나 얼마 안 가서 사라져 버렸다.
윤은 영과의 만남이 불편하거나 이질감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식당에 혼자 있을 것 같은 시간 때에 홀연히 찾아가 영의 평범한 하루를 다채롭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윤에 대한 영의 마음은 조금씩 봄비가 내려서 얼어있던 땅을 적시며 계절을 물들이는 것처럼 짙어져 갔다. 하지만 윤은 그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사랑인지 연민인지 명확하게 결론 낼 수 없었다. 그저 자신도 확신하지 못할 펄펄 끓어오르는 설익은 감정에 윤은 영 몰래 가끔씩 혼란스러웠다.
영에게는 아이가 있었다. 이름은 세아. 4살짜리 여자 아이였다. 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에 대해 궁금해했지만 영과 함께 있을 때에는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남편 없이 홀로 아이를 키워나가야 한다는 책임감이 인생의 짐으로 다가와서 영의 어깨를 짓눌러 버릴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녀 곁에 윤이 있어서 이혼의 아픔과 오랜 행복을 빼앗겼다는 박탈감을 잊을 수 있었을 텐데, 굳이 아이 이야기를 꺼내서 시련을 또다시 환기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영도 마찬가지로 윤에게 자신의 아이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이 홀로 아이를 키워가야 한다는 사실이 윤에게 거북함과 부담감을 안겨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자신의 집에 윤을 단 한 번도 초대하지 않았다. 윤 또한 자신이 초대받지 못하는 이유를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다.
둘은 봄이 오기 전에 겨울 바다를 보기 위해 제주도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영은 윤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마다 자신의 집에서 40분가량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친언니에게 아이를 부탁하곤 했다. 영의 친언니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어린이집 원장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좋아했고 조카를 마치 자신이 낳은 딸처럼 조심스럽고 사랑스럽게 돌봐주었다. 친언니는 영의 사정을 모두 알고 있었고 혼자 아이를 키우는 일은 몹시 힘들 테니까 언제든지 도움을 청하라고 말했다. 윤은 영에게 너그러운 자매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영은 제주도라는 곳이 생애 처음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들떠있었다. 도시의 생활이 무료해질 때마다 혼자 여행을 다니는 게 취미였던 윤은 이번이 다섯 번째 제주도행이었다. 윤은 상기되어 있는 영의 모습을 보고 순진한 어린아이 같아서 그녀 몰래 흐뭇해했다.
제주도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섬의 모습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에메랄드색의 바다는 섬을 품고 수평선 너머로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같은 색의 하늘은 경계선이 지워진 채 바다와 맞닿아 있었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굴곡진 봉우리들은 서늘하게 색칠을 한 겨울의 얼굴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육지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섬의 기운이 아득해 보이는 땅 속에서부터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비행기에서 내려 렌터카를 픽업해서 서쪽으로 향했다. 차는 하얀색 소형 SUV였다. 영은 운전면허가 없었기 때문에 윤이 운전을 했다. 해안도로를 달릴 때에는 종려나무 사이로 바위에 부서지는 크고 작은 파도들이 둘을 반겨 주었다. 그렇게 한 시간쯤 달려서 대정읍에 위치한 숙소에 도착했다. 애월을 지나 한림에서 30분가량 차를 타고 들어가야 나오는 작은 어촌 마을이었다. 4층짜리 숙소는 해안도로와 맞붙어 있어서 정면으로 바다가 보였고 짠내가 느껴질 정도로 바다와 가까웠다. 1층에 위치한 카페 겸 카운터에서 남자 주인이 마중을 나왔다.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는 그을린 피부에 키가 크고 다부진 체격이었지만 공손한 말투였다. 웃을 때 가지런한 하얀 치아가 드러나면서 미소에서 단정함이 느껴졌다.
"이틀 동안 투숙객은 손님들 밖에 없어요. 운이 좋으시네요. 마음껏 즐기다가 가세요."
윤과 영은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체크인을 한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갔다.
숙소 문을 열자 눈부신 풍경에 둘 다 입이 벌어졌다. 한 면을 다 차지한 커다란 통유리 창이 푸른 서쪽 바다의 광경을 가득 담아내고 있었다. 너무 높지도 않고 너무 낮지도 않은 위치 때문에 풍경이 더 입체적으로 보였다. 바다에서는 돌고래 가족들이 파도에 몸을 싣고 유영하고 있었고 멀리 내다보이는 커다란 암초위에서 낚시꾼들이 채비를 준비하고 있었다. 진주색 실크로 만든 커튼이 달려있는 유리창을 기준으로 가장 왼쪽에 커다란 침대가 누워있었다. 주름하나 없이 말끔히 펼쳐진 하얀색 시트는 각이 잡힌 침구류와 짝을 이룬 것처럼 보였다. 침대의 왼편으로 네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 그레이 색 타일이 꼼꼼하게 붙여진 욕실 안 세면대에는 물기 하나 없을 정도로 건조하고 깨끗했다. 유리창에서 가장 오른쪽에는 창 너머 바다를 보면서 스파를 할 수 있는 욕조가 있었는데, 성인 두 명이 즐기기에 크기가 딱 적당했다. 원목과 검정 스테인리스로 마감이 된 숙소의 인테리어는 꽤 우아했다. 윤과 영은 아름다운 제주의 풍경을 가득 담고 있는 숙소가 마음에 들었다. 비행기를 타고 차를 빌려 숙소에 도착하니 오후 5시쯤 되었다. 영은 커다란 침대에 몸을 뉘이고 천장에 달린 검은색 샹들리에와 유리창 너머의 겨울바다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말했다.
"나. 배고파."
윤은 영의 옆에 몸을 뉘이고 머리에 팔베개를 한 뒤 유리창에 비치는 하얀 얼굴을 응시하며 말했다.
"제주도에 왔을 때는 세 가지를 꼭 먹어야 해. 고등어 회, 보말칼국수, 흑돼지."
윤의 말을 듣고 영은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소중한 무언가를 담고 있는 것 같은 새카만 눈.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불투명하고 두꺼운 막 같은 것에 가려져 있었다. 그 검은색 눈동자를 한없이 들여다보면 알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부유했다. 그러다가 여러 가지 생각들은 공복이 만들어 낸 험준한 파고에 부딪혀 포말이 되어 사라졌다. 영은 그런 자신이 우스워서 픽 소리를 내며 실없이 웃었다. 그리고 윤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둘은 차를 타고 근처 항구로 가서 고등어회를 먹었다. SNS나 블로그에 소개된 유명 맛집들이 있었으나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식당의 소란이 싫었다. 숙소 사장에게 전화로 물어서 도민들만 가는 한적한 식당을 찾았다. 고등어 회는 신선했고 같이 나오는 밑반찬들도 정갈하고 맛있었다. 회와 곁들여 먹을 수 있게 샤리와 구운 김이 같이 나왔는데 식당 사장이 직접 테이블로 서빙을 하며 먹는 법을 알려주었다. 김에 샤리를 올리고 그 위에 고추냉이 간장을 찍은 고등어 회와 식당에서 직접 담은 백김치를 올려서 먹으라고 알려주었다. 둘은 알려준 방식대로 음식을 먹었다. 입 안에서 제주바다가 느껴질 정도로 풍미가 좋았다. 노포 스타일의 식당이라 소주, 맥주, 막걸리만 파는 줄 알았지만 해산물과 잘 어울리는 화이트 와인을 팔길래 주문해서 페어링 했다. 뉴질랜드산 쇼비뇽 블랑이었는데, 음식들과 궁합이 좋았다.
음식을 다 먹고 식당에서 나와서 해변을 걷기로 했다. 항구에서 200m쯤 떨어진 곳에 작은 해수욕장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밤바다의 정취를 느꼈다. 바람에 흐느끼는 파도소리는 온몸을 휘감다가 귓가에서는 고요함으로 머물렀다. 그 고요가 마음의 안정을 주며 몸속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둘은 말없이 걸으면서 바닷바람으로 술기운을 걷어내고 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윤은 스파욕조의 전원을 켜고 욕조에 따듯한 물을 받았다. 윤과 영은 옷을 벗고 욕조에 들어가서 서로의 몸을 끌어안은 채 몸을 녹였다.
둘은 기다란 욕조 안에서 서로의 몸에 기대어 어둠이 가라앉은 바다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듯이.
검게 물든 창에는 연리지처럼 두 남녀가 엉켜있었다. 그 먹빛의 창에서 영혼들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창에 비추어지는 그 모습에서 영은 안온함을 느꼈다. 동시에 자신이 처한 현실에게 등을 돌린 채 이런 행복에 도취해도 되는지 의심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딸이 보고 싶어졌다.
윤과 자신이 비치는 유리창에 윤곽선이 지워진 딸의 모습이 비치는 것 같았다. 순간 영의 마음속에 그리움이 범람했다. 한 줌의 바람에 출렁일 것만 같은 그리움이 창가에 맺힌 물방울이 되어 천천히 흘러내렸다.
"나. 세아 보고 싶어."
영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흘러내리는 물방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윤에게 말했다.
윤은 레드와인을 한 모금 마시면서 농담 섞인 어조로 말했다.
"올라가자마자 세아한테 뛰어가면 되겠다."
"아니 당신이랑 같이 보고 싶어."
자신의 딸을 함께 보고 싶다는 영의 말에 윤은 당혹스러웠다. 그 기색을 감추려고 했지만, 심장박동이 점점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그 진동을 영도 느꼈을 것 같아서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언제 초대해 줄 건데?"
윤의 물음에 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윤은 창에 비치는 영의 작은 눈동자를 응시하면서 가족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가족을 가질 수 있는 인간인가?' '나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타인으로 구성된 가족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래도 만약 가족이 생긴다면 나는 가족을 지킬 수 있을까?' '아니면 반대로 가족이 생기면 그제야 타인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건가?' 끊임없이 나열되는 의구심이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헝클어졌다. 하지만 그 실타래를 풀어보기도 전에 검게 물든 창 너머로 윤곽도, 무게도 없는 얼굴들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