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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림월 Oct 26. 2024

두꺼비집#2

윤은 또다시 전단지 스티커를 붙이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가 살고 있는 건물은 도시의 유흥가 한복판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한 20층짜리 복층형 원룸 오피스텔이었다. 오피스텔은 지은 지 10년쯤 되었는데 외관은 깨끗한 편이었다. 월세는 보증금 2000만 원에 90만 원을 다달이 지불해야 했지만(관리비까지 하면 100만 원이 넘어갔다) 고급스러운 내장재로 마감이 된 실내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었고, 옵션으로 딸린 가구나 가전제품들이 혼자 살기에 구색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13평쯤 되는 아래층 공간에 거실 겸 주방과 조그만 샤워부스가 딸려있는 욕실이 있었고 현관문에서 주방을 지나면 정면으로 3,4m쯤 되는 커다란 통유리 창이 있었는데, 그 창문으로 낮게 깔린 도심의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가끔 하늘과 구름이 근사한 날에는 마치 거대한 액자처럼 보여서 그곳을 주시하며 그날의 분위기를 음미하기도 했다. 그리고 복층으로 통하는 10개의 목조 계단을 올라가면 허리를 45도 정도 기울여야 설 수 있는 8평쯤 되는 크기의 공간이 있었다. 윤은 이곳을 침실로 두었지만, 대부분의 생활은 아래층에서 이루어졌다. 복층의 오른쪽 끝에는 베니어 판으로 만든 문이 있었는데 그걸 열고 나가면 캠핑용 테이블에 접이식 의자 두 개 정도 놓을 수 있는 발코니가 있었다. 건물은 위층으로 갈수록 뾰족해지는 형태여서 15층부터는 이렇게 작은 발코니가 있는 건물이었다. 윤은 날씨가 좋을 때면 그곳으로 나가서 햇볕을 쬐며 맑은 공기를 쐬고 인스턴트커피를 끓여서 마시기도 했다. 이 좁은 발코니는 윤이 즐길 수 있는 소확행 중에 하나였다. 윤은 이 집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자신을 지켜주는 아늑한 공간이라고 생각했고, 이곳에서 휴식과 안정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에 거친 세계에서 보호받고 있다고 느꼈다. 유흥가 한복판에서 낮이고 밤이고 상관없이 정체를 드러내는 여러 소요들은 윤이 살고 있는 15층 높이의 담장을 넘어오지는 못했다. 그래서 통유리창에 설치한 두 겹의 암막 커튼을 치면 언제든지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이틀 동안 내린 폭우 때문인지 피부에 와닿는 공기의 온도가 일주일 전 과는 확연하게 달라졌다. 살갗을 스치는 싸늘한 바람은 가로수의 잎사귀들을 서서히 물들였고, 뜨거웠던 열기에 지친 아스팔트를 차갑게 식혀주었다. 무더위 속에 수줍게 숨어있던 가을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낸 것 같아서 들뜬 마음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좋은 기분은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이 뒤통수를 서늘하게 했다. 계절의 윤곽이 뚜렷해질 때마다 윤은 설렘을 가졌다. 그 기분은 고립감이라는 멍에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안겨주었고 몸속 가득 차 있는 오물 덩어리들을 깨끗이 씻어낼 것만 같았다. 윤은 희망이 깔려있는 안온한 길을 걷고 싶었지만 항상 어느 시점에서 뒷덜미를 잡힌 채 끌려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희망이라는 건 인간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더 나은 삶으로 전진할 수 있도록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도로 앗아갈 것이라면 왜 기대만 부풀려 놓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희망은 반드시 좌절을 안겨주며 그게 바로 희망이 자기 몫을 챙겨가는 방식이었다. 때문에 윤은 희망의 동의어가 바램이나 기대가 아닌 체념이라 믿었다.


오늘은 보험회사 사무실들이 모여있는 20층짜리 건물로 가기로 했다.

보험회사 직원들은 가끔 접대를 위해 가게를 찾아오곤 했는데 제법 벌이들이 괜찮은지 적지 않은 돈을 하룻밤 술값으로 뿌리곤 했다.

그중에 어떤 여자는 자기 밑으로 기고객들이 많고 그 고객들이 꽤 높은 잠재력을 갖고 있으니 윤에게 자기 밑에서 보험영업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었다. 여자는 40대 초반의 골드미스였는데 꽤나 화려한 여자였다. 40대라고 보기에는 잔주름 없이 투명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꾸준한 운동으로 인해서 탄력 있고 매끈한 피부에 남자들이 호감을 살만한 몸매와 체형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벌어들이는 대부분의 수입은 자신을 꾸미는데 소비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것이 너무나도 잘 어울려서 혐오스럽게 비추어지진 않았다. 그녀는 술자리에서 자신의 부하직원이나 타인들에게 보험영업으로 성공하는 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영업은 사사로운 감정 즉, 인간답게라느니 진실이 어쩌고 하는 말들로 고객들을 현혹하지 않고 또한 자신도 그런 말들에 현혹되지 않아야 하며 휘둘리지 말고 휘두를 수 있게 실리를 갖추고 어떤 면에서는 냉소적이고 또한 회의적이며 염세적인 사람이 성공한다고 자신 있게 얘기했다. 그리고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을 몇 명 만나지 못했는데 그중에 한 사람이 윤이라고 말했다. 밤에 술을 팔아 그 병을 세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많은 급여를 주겠다고 약속까지 했으나 윤은 자신이 기름과 물처럼 타인들과 결코 용해될 수 없는 인간이란 걸 알기에 정중히 거절했다. 그녀는 최근에도 가게에 들러 술을 마시고는 언제든지 마음이 바뀌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말했다. 윤은 그녀가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지 아닌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득을 위해서 자신을 원하는지 아니면 윤이라는 인간 자체에 호기심이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그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윤은 타인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준다는 것 자체만으로 고마움을 가지고 만족했다.


윤은 평소처럼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층을 눌렀다. 평일 화요일에 아직 정오가 되기 전이라 모두 사무실에서 근무 중인지 건물 로비와 엘리베이터에는 지나칠 정도로 사람들이 없었다. 건물 자체에 모종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타서 버튼을 눌렀지만 기묘할 만큼 고요했고, 허공에서 공기의 입자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아서 소름이 끼쳤다. 엘리베이터 문은 소리도 없이 닫혀 윤과 외부세계를 단절시켰고 곧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구석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몇 초가 지나 중력이 제자리를 찾은 것을 느끼고 눈을 떠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곧바로 화장실이 있는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왠지 모를 불길한 기운이 자신의 두 다리를 조종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낡은 컨버스화를 신은 탓에 리놀륨 바닥에서는 금속이 갈리는 것처럼 신경질적인 소리가 났다. 빨리 해치우고 가서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가방에서 스티커를 꺼냈다. 화장실 첫 번째 칸에 스티커를 붙이고 두 번째 칸 문을 열려고 하는데 갑자기 누군가 튀어나왔다. 윤은 최근 들어 이런 식으로 작업을 하다가 여자를 마주쳤던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바로 "어? 죄송합니다."라고 빠르게 사과하고 퇴장하면 별 다른 일은 없었다. 간혹 상대가 "뭐야. 저 얼빠진 놈은. 재수 없는 인간이네."라는 말을 중얼거렸지만 안 들리는 척하고 잽싸게 뛰쳐나왔다. 실수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윤은 아까의 불길함이 이 사태를 예고한 거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실수인 척 자리를 뜨려고 뒤돌아서는데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방금까지 폭포처럼 눈물을 쏟아내다가 지쳐서 눈물이 말라버린 듯한 목소리였다.


"이거 뭐예요?"


그녀의 물음에 윤은 다시 뒤돌아서서 여자와 마주했다. 역시나 여자는 오열한 탓인지 눈화장이 심하게 번져서 검은색의 눈물이 그녀의 뺨에 한 줄기 선을 만들었고, 짓궂게 번진 화장 사이로 붉게 충혈된 눈이 부어올라 있었다. 중단발의 머리를 뒤로 묶은 그녀는 얼핏 보면 20대처럼 앳되어 보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슬림한 하얀색 진에 크롭한 검은색 캐시미어 니트를 입고 있었는데 바지는 오염이나 얼룩 한 점 없이 깨끗했다. 대낮의 화장실에서 한 여인이 울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이런 장소에서 남몰래 슬픔을 토했다는 건 분명히 무슨 사연이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이 여자가 자신을 경찰에 신고할까 봐 두려웠지만 그녀의 처연한 목소리를 듣고 엉겁결에 말문이 열렸다.


"아, 이거 외롭고 고독할 때 오시라고요. 저희 가게 전단지예요."

윤은 멋쩍게 웃으면서 고개를 숙이고는 더듬거리는 말투로 대답했다.


"술 파는 곳이에요?"


"네, 술도 팔고 노래도 부르고 근사한 친구들이랑 아늑한 공간에서 재밌게 대화도 나누면서 스트레스 푸는 곳이죠."


"술 파는 곳이면 밤에 문을 여나? 몇 시부터 영업해요?"


"24시간이긴 한데 근사한 친구들 보려면 저녁 8시는 돼야 하는데."


두 손바닥으로 양 쪽 볼을 닦으며 그녀가 말했다.

"근사한 남자는 지금은 필요 없고요. 지금은 술 마시면서 얘기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데."


정오도 안된 이 시간에 다짜고짜 술을 마시고 싶다는 여자가 윤은 이해가지 않았지만 사물의 부피와 그 용적에는 온통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만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또다시 환기하며 여자에게 말했다.


"그럼 지금 같이 가시죠."


윤은 화장실에서 울고 있던 그녀와 함께 택시를 타고 상남동의 가게로 향했다. 10분 내지의 거리였지만 도로에 통행량이 많지 않아서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가게는 10층짜리 건물에 5층에 위치해 있었었고 7층부터 10층까지는 모텔이 있었다. 1층에는 트렌디한 이자카야와 활어와 해산물을 취급하는 캐주얼한 일식당이 있었고, 2층에는 헌팅포차라고 불리는 룸 형태의 소주방, 3층에는 당구장과 PC방이 4층은 3,40대들의 취향에 맞는 위스키바와 와인바가 있었고 6층은 노래방이었으나 김사장의 가게가 성업하는 바람에 문을 닫고 현재는 공실 상태였다. 5층에 위치한 가게로 가려면 당연히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기에 둘은 택시에서 내려서 건물 안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1층에는 사방이 커다란 통유리로 되어있는 일식당이 보였는데, 식당 출입구 앞에는 투명한 관을 연상케 하는 커다란 수족관 6개가 있었고 싱싱한 활어들과 해산물들이 그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점심영업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식당은 아직 한산했고 그 탓에 식당사장은 출입구에서 세네 발자국 떨어진 자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대낮부터 손님과 동행하는 윤을 보고 약간 놀란 듯한 표정으로 눈을 커다랗게 뜨고 몇 번 끔뻑거렸는데 그 의미는 아마도 '이 시간에 벌써?'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윤은 자영업자들끼리의 무언의 인사를 나눈 뒤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과 단 둘이 가게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경우를 수도 없이 겪었지만, 윤은 어색함을 느꼈다.

울음을 그친 여자에게서 아직 미묘하게 남아있는 슬픔의 기운이 좁은 정사각형의 공간에서 정적과 함께 흐르고 있었다. 어색한 공기를 마시면서 아이스 브레이킹을 시도하기 위해 무슨 말을 할까 머릿속으로 떠올려봤지만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말을 꺼내도 어색함이 사그라들지 않는다는 걸 윤은 경험을 통해 배웠다.


가게는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출입구의 유리문 안쪽에서 농밀한 암흑만이 둘을 쳐다보고 있었다.

윤은 도어록에 비밀번호를 누른 뒤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가서 가게의 조명들을 모두 켰다. 그러자 순식간에 어둠이 걷히고 텅 빈 가게의 내부가 훤히 드러났다. 오전에 김사장이 외주를 준 청소업체가 깔끔하게 청소를 해 놓은 덕에 바닥에 얼룩도 없었고 미끄럽지도 않았다. 환기가 안 되어서 지난밤의 취객들의 불쾌한 냄새가 약간 남아있었지만, 룸에 들어가면 공기청정기가 있었기 때문에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윤은 출입구 앞에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어느새 눈가에 번진 화장을 깨끗하게 닦아낸 모양이었다.


"이쪽으로 저 따라오시면 돼요."


4개의 룸이 있는 복도를 지나 왼쪽으로 꺾어서 제일 끝에 위치한 아늑한 룸으로 그녀를 안내했고 주방에 있는 제빙기에서 얼음을 퍼서 작은 아이스 박스에 가득 담고 집게를 챙겨서 룸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오열로 인한 갈증 탓인지 테이블 위에 미리 세팅되어 있는 생수병뚜껑을 따고 온 더락 잔에 따라 마시고 있었다. 윤은 얼음이 담긴 박스에 집게를 꽃아 넣고는 여자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정면에서 자세히 보니 단번에 시선을 끌만한 미인은 아니지만 얼굴에 균형이 잡혀있고 무엇보다 자신의 매력이 무엇인지 스스로 알고 있다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자존감이라던지 자신감이라는 단어로 치환하기에는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었다.


"아늑하고 좋네요."


아닌 게 아니라 그날따라 그 룸. 윤의 두꺼비집은 더욱 아늑하고 따듯해 보였다.

여자는 조금씩 물을 마시면서 부드럽고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쏟아낸 눈물로 메말라 있던 몸속에 수분이 스며 들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방금 전까지 그녀 주변에 남아있던 슬픔의 흔적이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그동안 몸속 어딘가가 굳어버려서 건조하고 딱딱하게 나오던 그녀의 목소리도 조금씩 유연해졌다.

그런 그녀를 보고 윤도 조금 편안해졌다.


그녀는 자신을 영이라고 소개했다.

나이는 서른여덟이고 대학가 근처에서 소규모로 캐주얼한 이탈리안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래봤자 파스타랑 피자랑 스테이크밖에 없어요. 저희 집 스테이크를 먹을 바에는 맥도널드 햄버거 패티를 먹는 게 더 나을걸요."

영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낭창하게 이야기했다. 어느새 그녀의 음성에서는 슬픔이 자취를 감추었고 구슬이 굴러가는듯한 밝고 명랑한 소리가 나왔다.


"아, 아까 화장실일은 미안해요. 먹고살려면 저도 어쩔 수가 없어서 그만."

윤은 화장실에서 자신을 보고 놀랬을 영에게 사과했다.


"괜찮아요. 먹고 산다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니겠어요?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진짜 부끄러운 건 사지가 멀쩡한데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들이죠."


'원래 그런 거..' 윤은 그 말을 곱씹었다. 왠지 모르게  '원래'라는 단어가 낯익었다. 영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그 말은 순간 윤의 마음을 양지처럼 밝혀주었다.


몇 잔의 물을 마시고 영은 테이블 위에 우롱차캔을 따면서 윤에게 말했다.

"저 술 주세요. 여기서 비싼 걸로."


윤은 카운터 뒤에 위치한 업소용 냉장고에서 골든블루 다이아를 꺼내고 자신의 명함을 챙긴 뒤 돌돌 말려진 물수건을 한 움큼 쥐어서 룸으로 들어갔다.

영은 온 더락 잔 두 개를 나란히 놓고 집게를 들어서 능숙한 솜씨로 얼음을 집어 가득 채워 넣고는 온 더락 잔 사이에 빈 위스키 샷잔을 세워 두었다.


"제가 한 잔 따라드릴게요."


윤은 맞은편 자리에 앉아 술병의 뚜껑을 따서 영에게 권했다.

영은 빈 샷잔을 들고 술병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모든 행동이 이질감이 없이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보였다.


"그쪽도 한잔 해요. 근데 그쪽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윤은 카운터에서 챙긴 자신의 명함을 영에게 주었다. 영은 명함을 자세히 보고 나서 자신의 가방에 넣었다.


"윤...이라고 부르면 되죠?"


영은 샷잔에 담긴 술을 오른쪽 온 더락 잔에 붓고 캔 우롱차를 왼쪽 온 더락 잔에 부으면서 말했다.


"네."


윤도 잔에 얼음을 담기 시작했다. 손가락 한마디 정도 크기의 네모 반듯한 정육면체의 얼음들이 덜거덕 소리를 내며 유리잔에 몸을 부딪혔다. 아늑한 공간에서 공허한 소리들이 퍼져갔다. 영은 윤에게 술을 따라주며 반갑다고 인사했다.

서로 술을 한잔 마시고 영은 허공에 시선을 던진 채 씁쓸함 속에 감춰진 불확실성을 음미한 뒤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오늘 제 부탁 들어줘서. 오늘 좀 힘든 일이 있어서 좀 울었어요. 위로받고 싶은데 아무리 핸드폰을 뒤져도 위로해 줄 사람이 주변에 한 명도 없더라고요. 아.. 인생 잘못 살았구나. 뭐 그런 생각을 하니까, 울음이 그치질 않아서 그래서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그고 그 안에서 울었던 거예요."


윤은 영의 눈빛과 입술을 보고 그 말을 진실이라고 믿기로 했다. 폐쇄된 좁은 공간에서 단 둘이 조용히 술을 마시면 상대가 거짓을 말해도 진실처럼 들릴 때가 있다. 공간 어딘가에 숨어있던 기운이 기척도 없이 사람들 마음속에 스며든 다음 그곳에 있는 얇은 막을 걷어내서 사람의 마음을 여과 없이 투명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윤은 손님들과 술을 마실 때마다 그 기운이 자신에게는 스며들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윤은 이곳에서 들었던 수많은 입술의 말들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영이 소리를 내기 위해 입술을 벌릴 때마다 묘한 울림이 있었다. 그 진동이 신체의 마디마디에 퍼져서 희미한 여운을 남겼다. 윤은 육체의 구성이 크게 바뀌는 것을 느꼈고 그 감각들은 진실은 필히 영혼에 자국을 남기는 거라고 속삭였다.


영이 빈 잔에 술을 따르면서 말했다.

"사실 전 결혼했어요. 아이도 있고요. 근데 얼마 전에 남편과 이혼하기로 합의를 했어요. 남편 앞으로 계약된 보험들을 해지하려고 보험회사에 갔었던 거예요. 그러다가 그곳에서 남편을 마주했는데, 어찌나 낯설게 느껴지던지. 그게 너무 서럽고 두려워서, 울음이 터졌죠."


영은 9년간의 결혼생활이 지금부터는 후회의 페이지에 삽입된다는 현실에 적잖이 상심한 듯했다. 대학시절 처음 만나 8년 넘게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가족의 화목함과 평온함을 유지해 온 그들은 얼마 전까지 둘의 사이에서 어떠한 균열의 조짐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몇 달 전쯤 그 여자가 나타났어요."

영은 남편과 이혼하게 된 사정을 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남편과 같이 운영하던 식당 건너편에서 프랜차이즈 카페를 운영하던 여자는 마감시간이 다 되어가는 밤시간에 불쑥 찾아와 식사를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부부는 흔쾌히 수락하고 그녀가 주문한 파스타와 샐러드를 내어주었다. 식사를 마친 그녀는 부부에게 고맙다며 자신의 카페에 좋은 와인이 있는데 같이 마시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고, 부부는 그렇게 하자고 얘기를 한 뒤에 가게 문을 닫고 셋이서 와인을 마셨다. 당시에 여자는 동네에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예뻤어요. 살면서 그런 감정은 처음 가졌었는데, 뭐랄까?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걸 저 사람은 가지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마음속 한편에 묘한 질투심이 일어나더군요. 어떤 때는 그 질투심을 스스로 알아채버린 내가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이 달아오르기도 했어요."

영은 다리를 꼬고 무릎에 턱을 괸 채 술잔에 맺혀있는 물방울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는 40대 중반이었지만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적지 않은 나이지만 20대부터 30대, 4,50대까지의 남자들이 수작을 걸 정도로 이뻤다. 영은 한가한 오후에 가게에 앉아 미인인 그녀가 왜 혼자 지낼까라는 의혹을 가지면서 자꾸만 건너편 카페 안을 훔쳐보곤 했다.

남편에게도 물어봤지만 남편은 "세상에 사정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라는 말만 하고 대꾸하지 않았다. 영은 배타적인 남편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남편은 타인에게 관심이 없던 사람이죠. 타인에게는 완전히 무신경한 사람 말이에요. 자기 것이 아닌 거에는 결코 욕심 따위는 부리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자신이 소유한 것은 끝까지 지켜내려는 집착 같은 게 보이는 사람이었죠. 그래서 아, 저 사람이랑 결혼하길 잘했다. 그런 생각도 많이 했어요."

윤은 영의 말에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지 않고 질문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눈을 맞추며 조용히 들어주기만 했다.


그녀는 이태 전 남편과 이혼하고 모아뒀던 돈과 위자료를 합쳐 카페를 차렸다고 부부에게 고백했다. 그리고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자신은 낯선 동네가 적적하고 쓸쓸하게 느껴져서 가끔 친구가 필요하다며 부부에게 앞으로 친하게 지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부부는 그 제안을 별문제 없이 받아들였고, 셋은 주말 저녁마다 만나서 가게문을 닫은 다음 와인이나 위스키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고 친밀함을 쌓아갔다. 술안주는 늘 영의 남편이 만들었는데 주로 치즈 플래터나 수분이 많은 과일(멜론, 참외, 복숭아)을 조각으로 썰어 그 위에 얇게 저민 하몽을 올려서 내놓고는 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남편에게 '못하는 게 없으시네요. 아내분은 정말 좋으시겠어요. 너무 부러운데요.'라는 감탄사들을 늘어놓으며 술자리의 분위기를 고양시켰다. 그녀는 친절했고 여러 방면으로 지식들이 풍부해서 대화의 소재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영은 그녀와의 대화를 즐거워했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 뒤에 여가를 즐길 틈이 없던 지난날들을 보상이라도 받는 같아서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때까지는 주말만 기다렸던 거 같네요. 일이 터지기 전까지 말이에요."

영은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새하얗고 가느다란 영의 목에서 연약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어느 날부터 영의 남편은 평일날 마감 때 그녀에게 먼저 집에 들어가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주방의 설비가 문제가 있다느니, 소방점검을 대비해 시설을 손봐야 된다느니, 포스기의 숫자가 맞지 않는다 등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며 영을 빨리 귀가시켰다. 그때마다 영은 경영자로서, 그리고 책임감 있는 가장으로서 남편을 존중해 줬고, 그의 말을 잘 따랐다.

열대야가 여름밤을 품고 있던 어느 날 밤. 영은 매장에 남아있을 남편에게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하기로 했다. 먼저 퇴근하는 척을 하면서 집에 들어가지 않고 남편이 좋아하는 레드벨벳 케이크를 포장한 뒤에 눈에 띄지 않는 주차장 구석에서 몰래 남편을 기다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드디어 남편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옆에 카페 여사장이 나란히 걸어왔다. 영이 마주한 그 둘의 모습은 생각보다 다정해 보여서 남편의 아내가 자신이 아닌 그녀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둘은 곧바로 그녀의 하얀색 세단에 올라탔고, 1시간가량 차에서 나오지 않았다.

1시간 뒤에 남편은 차에서 내려서 창문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택시를 타기 위해 주차장을 벗어났다.


"그때 남편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정말 오랜만에 본 것 같아요. 그 사람 웃는 모습에 반해버렸던 일도 있었는데, 결혼하고 나서는 웃는 얼굴을 잘 못 봤던 거 같아. 그 사람이 웃음을 잃어버린 게 꼭 나 때문인 것만 같아서 견디기 힘들 때도 있어요."

영은 남편의 얼굴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책망했다. 작은 연못에 파문이 번지듯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천천히 일었다.


그날 이후로 영은 혼란스러웠다. 둘의 사이가 어떤 관계인지. 만약 남편의 외도라면 앞으로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지. 남편과 이혼하게 된다면 아이는 어떡해야 할지. 시시각각 끝없이 이어지는 걱정과 불안들이 영의 머릿속에서 혼돈을 일으켰다. 혼란의 회오리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휘청이던 영은 자신의 어머니가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렇게 며칠 동안 친정에 머물게 되었다.

그때 남편은 "가게를 비워둘 순 없잖아. 애 어린이집도 보내야 되고. 장모님 평소에 건강하시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 당신만 다녀와." 라며 영을 안심시켰다.

이틀 동안 어머니 곁을 지키려고 했지만 혼탁한 머릿속은 도무지 가라앉을 기미가 없었다. 영은 어머니에게 가게 일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고 말하고 하루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어머니의 건강에는 큰 문제는 없었다. 아침 일찍 출발한 탓에 집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1시쯤이었다. 딸아이는 등원했을 것이고 남편은 출근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남편의 신발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영은 본능적으로 숨을 죽이고 인기척을 최대한 내지 않으면서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안방의 문을 살며시 여는 순간 영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남편과 그녀가 자신의 침대 위에서 정사를 벌이고 있었다.

턱 끝까지 차오른 욕망의 두 숨결이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누워있는 남편의 허리께에 뒤돌아서 올라탄 그녀는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 둘은 영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격정적인 흡입력과 뜨겁게 젖은 몰입에서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맹렬한 움직임 탓에 앞머리가 흘러내린 그녀는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얼굴이 치마 사이로 핏기 가신 허벅지를 드러내며 영과 시선을 마주했다.

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귀에서는 사이렌이 울리듯 삐-하는 이명이 들렸고, 눈앞에 갑자기 안개가 낀 듯이 시야가 흐려져서 사물의 윤곽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속에서는 뜨겁게 열이 올랐지만, 육체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는 타오르던 절정을 삼킨 채 남편의 몸에서 나른하게 자신의 몸을 빼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옷매무새를 정돈하고는 천천히 영에게 다가왔고, 마주 보고 있던 영의 귓가에 자신의 입술을 들이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거의 다 끝났는데, 조금만 더 늦게 오지."


영은 그녀의 속삭임에 주저앉고 말았다. 자신의 등 뒤에서 누군가 몰래 마개를 따는 바람에 자신을 지탱하던 모든 것들이 쏟아져 버려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신발을 신은 채로 유유히 영의 집을 빠져나갔다.

남편은 거실에 주저앉아있는 영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이혼하자."


영은 술을 마시면서 몇 시간 동안 자신의 이혼사유를 윤에게 사실대로 고백했다. 윤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들어주기만 했다.

"남편과는 이혼과 관련된 일들이 있을 때만 연락해요. 얼마 전 그 카페를 지나는데 둘이 웃으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더군요. 둘에게 해코지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단념했죠. 어떤 거대한 손이 나를 쥐고 아무것도 못하게 하는 거 같아요. 무력감이 심해질 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우는 거밖에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 비참하게 해요. 몇 년을 사랑했던 사람과 등을 돌렸다는 게 시간이 지날수록 믿기 어려워져요."


영은 자신의 삶이. 자신이 하고 있는 사랑이 드디어 결실을 맺어 완전을 이루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전조도 없이 들이닥친 비극으로 인해 한없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불완전한 존재는 불완전한 세계에서 불완전하게 살아야 한다는 애달픔이 이 완벽한 비극에 방점을 찍었다.


"나는 내 삶이 완전하다고 생각했어요.. 절대 부서지거나 무너지지 않을 거라 믿어왔는데. 잘못 지어진 건물처럼 어느 순간 단번에 무너져 내렸어요. 애초에 설계가 잘못된 거였는데. 불완전한 거였는데. 스스로 완전하다고 착각하면서 살았던 거죠."


윤은 어떤 식으로든 위로의 말을 꺼내보려고 했지만, 좀처럼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가게에 방문하는 대부분의 손님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온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의 내용들은 누군가에게 섣불리 말할 수 없는. 그러니까 부드럽고 가볍게 다룰 수 있는 류의 이야기들은 아니다. 유쾌하지 않고 숨기고 싶어 하는, 수치심이 가득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말들을 막상 털어놓고 나면 사람들은 위로를 원한다. 진심이 묻어있는 위로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한마디의 위로를 갈구했다. 그래서 윤은 자신이 하는 일의 본질이 술을 파는 게 아니라 남을 위로하는 거라고 믿어왔다. 그런 믿음 때문에 가끔 보람을 느꼈고 이 일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다.


"완전한 건 이 세상에 없는 건데, 어리석게도 그동안 헛된 믿음만 가지고 살았어요. 불완전하니까.. 원래 불완전한데, 근데 그걸 믿기 싫으니까.. 두렵고 겁이 나니까.. 그래서 완전하다고 믿었나 봐요."


영의 눈에서는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눈을 크게 뜨고 어깨를 들썩이며 가슴속에 고여있던 뜨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윤은 그 한숨의 무게가 꼭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 싹 다 얘기하고 나니까 후련해졌어요. 여기 오기 전까지는 진짜 죽을 맛이었는데, 속에 있는 거 다 털어내고 텅 비우니까 이제야 좀 살 거 같아요."

영이 술잔에 술을 가득 따르면서 말했다.


윤은 영을 위로하고 싶었지만 갈피를 잡지 못한 단어들만 무질서하게 입술 위에 머물렀다.

영은 그런 윤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재빨리 술잔을 집어 들고 앞으로 내밀더니 해맑게 웃으면서 말했다.


"위로는 필요 없어요. 대신 우리 짠 해요. 뭐 특별히 축하할 일은 없지만, 지긋지긋한 과거에서 해방된 기념으로요."


윤은 영의 눈을 보고 위로의 말 대신에 자신이 할 수 있는 힘껏 미소를 지었다. 서로의 미소를 담은 술잔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아늑한 공간에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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