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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림월 Oct 26. 2024

두꺼비집#4

불완전한 존재들 

윤과 영은 제주에서의 남은 일정을 만끽했다. 꼭 먹어봐야 한다던 보말칼국수는 아침에 해장을 하기 위해 항구 근처 식당에서 먹었고 흑돼지는 제주도 어딜 가나 다 맛있다는 윤의 말에 유명 맛집이 아닌 도민들만 가는 조그만 식육식당에서 먹었는데 맛이 훌륭했다. 여행은 영에게 윤에 대한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처음 가 본 제주도에서 윤의 경험에 자신의 몸을 맡기고 그 시간들을 아낌없이 즐겼다.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풍경의 포인트라던지 경치가 뛰어난 드라이브 코스를 경험이 많은 윤이 훤히 다 알고 있었다. 영은 여행 기간 동안 윤의 색다른 모습들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집 안에 있을 땐 잘 모르지만 추운 날씨에 외출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주변의 온도를 더 잘 느끼듯이 도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윤의 다른 면들을 이번 여행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윤은 자신의 주변이 고요할 때는 대범하게 행동했고, 주변이 혼란스러울 때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성을 기반으로 행동했다. 그런 윤의 모습을 보고 영은 남과 여라는 염색체의 차이를 차치하고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인간으로서의 어떤 기질을 느꼈고, 그것을 보고 듣고 또 배우면서 윤에게 더 깊숙이 빠져들었다. 자신의 모든 감각들을 열어주고 그곳을 어루만져주는 윤을 보며 영은 그에게 점점 잠식되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기분은 영을 더욱 흥분시켰다.

윤은 자신을 바라보는 영의 눈빛이 점점 달라진다는 것을 의식할 수 있었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이 사랑인지 연민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둘의 관계가 훨씬 가까워졌다는 사실만은 거부할 수 없었다. 연민이 담긴 사랑이라, 사랑을 담은 연민이라, 윤의 영혼은 수면 위로 자꾸만 떠오르는 이율배반에 정신을 맡긴 채 목적지를 가늠할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돌아오고 난 후 둘은 평소와 똑같은 나날들을 보냈다. 딱히 특별한 일들은 없었지만 일상의 고요함 속에서 둘은 서로를 의지하며 평온함을 느꼈다. 그렇게 평범하고 보통의 하루하루가 그들만의 시간과 계절 속에 새겨졌다. 그로부터 얼마 뒤 영에게 사고가 생긴 건 어느 일요일이었다. 그날 역시 평소와 다를 게 없는 평범한 하루였다. 영은 식당을 마감하고 곧장 집으로 가서 딸아이와 시간을 보내다가 아이를 재우고 난 뒤 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둘은 전화기 너머로 보통날처럼 사소하고 시시한 서로의 일상을 전했다. 그러던 중 윤의 전화기에서 초인종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시간에 누구지? 잠깐만 기다려 봐."


영은 스피커 폰을 켜놓고 자리를 비웠다. 몇 초 뒤에 스피커폰에서 소음이 들리기 시작하면서 무언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잔인하게 훼손되는 배경 사이로 영이 비명을 질렀다.

윤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집을 뛰쳐나와 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곧장 영의 집으로 향했다.

윤의 집에서 영의 집 사이의 거리는 차로 30분 정도 걸렸다. 하지만 아무리 속력을 내며 달려도 그 간극이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30분이라는 시간이 윤에게는 영겁으로 다가왔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에는 아파트의 현관문이 10cm 정도 열려있었고 문 틈 사이로 처량한 흐느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윤은 천천히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거실 소파에 무릎을 세우고 끌어안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바닥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발자국들이 찍혀있었고 그 위로 폭도들처럼 날카롭게 이빨을 드러낸 유리파편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있었다. 고여있는 공기가 황폐하게 변질되어 흉측한 모습으로 올라오면서 어린 시절 집에서 맡았던 냄새가 감돌았다. 이곳을 스쳐갔던 난행의 시간을 알려주듯이 그녀가 입고 있는 하늘색 셔츠는 누가 강제로 뜯어낸 것처럼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영은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윤을 바라보며 가까스로 참아왔던 눈물들을 펑펑 쏟아내기 시작했다. 마치 용기에 들어가지 못하고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물처럼 그 눈물은 폐허로 변해버린 그녀의 공간을 빠짐없이 적시기 시작했다.

윤은 숨을 죽인 채 영의 곁으로 다가가서 천천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영을 붙잡고 사정없이 흔들던 공포와 충격이 그 모습을 서서히 감추었고,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그녀는 사고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초인종이 울리자 영은 스피커 폰을 켜놓은 채로 현관문으로 향했다. 도어록에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영의 남편이 다짜고짜 들어왔다. 그는 무언가에 크게 분노한 상태였고 입에서는 술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그 새끼 누구야! 나랑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다른 놈한테 가랑이를 벌려. 더러운 년! 이 걸레 같은 년."


영의 남편은 인사불성이 돼서 욕설을 내뱉으며 영의 어깨를 붙잡고 거실벽으로 밀어붙였다. 남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폭력의 냄새와 분노로 가득 찬 악력은 영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영은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질렀지만 그것이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넌 내 거야! 내 거라고! 내가 다른 여자를 만나도 넌 평생 내 곁에 있어야 돼! 알겠어? 이리 와!"


영의 남편은 그녀가 입고 있던 셔츠를 억지로 벗기려다가 자신의 마음대로 잘 되지 않자 두 손으로 깃을 잡고 찢어버렸다. 옷이 찢어지는 바람에 영은 순식간에 맨몸이 되었고. 남편은 강제로 그녀의 몸을 열기 위해 소파에 영을 눕히고 몸부림쳤다. 영은 남편을 제지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거대한 충격과 공포감이 그녀의 몸을 결박했다. 영은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었다. 눈은 감고 모든 것을 체념했을 때, 끼익 소리가 나면서 아이의 방문이 열렸다. 아이는 난데없는 소란에 잠이 깬 듯 눈을 비비며 영을 쳐다봤다. 자신이 마주한 광경이 현실이 아닌 꿈이라도 되는 것처럼 커다란 눈만 껌뻑이다가 곧 울음을 터트렸다.

영의 남편은 아이를 보고 나서 그녀에게 손을 거두며 아이한테 다가갔다. 아이 앞에 무릎을 꿇은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세아. 이리 와. 아빠가 안아줄게. 어이구 우리 천사 왜 울어. 울지 마. 이제부터 아빠랑 같이 있자."


영의 남편은 글썽이며 아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품에 안은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유유히 현관문을 빠져나갔다.


"그 사람. 그 여자랑 지나가다가 우리가 식당에 있는 걸 봤나 봐. 그래서 내 옆에 당신이 있는 것도 알아낸 것 같아."

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윤은 영에게 오늘밤 이곳에 있어도 상관없겠냐고 물어봤다.

영은 도저히 안될 것 같다며 자신을 친언니의 집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윤은 알겠다고 말하고 그녀를 차에 태워서 알려주는 주소로 향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영은 친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말했고 지금 그쪽으로 가는 중이라고 이야기했다. 네비에서 목적지 도착을 알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을 때는 이미 길 건너편에 영의 친언니가 마중 나와있었다. 친언니는 지은 지 20년 정도 된 구축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었는데 근처 도로와 주변환경이 깨끗하고 조용했다. 윤은 도로 한편에 천천히 차를 세우고 영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영의 눈에 아직 남아있는 희미한 슬픔은 바늘이 되어 윤의 마음속 연약한 부분을 콕콕 찔러댔다. 윤은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자신에게 연락을 하라고 당부하고는 영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영은 윤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수석에서 내려 친언니에게 걸어갔다. 멀리서 친언니가 영을 껴안는 모습을 보고 핸들을 돌려 어둠이 내려다보는 이차선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밤공기에 자동차의 배기음만 가득 울려 퍼졌다.


다음 날 아침.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떠오르는 폭력의 잔상 때문에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던 영은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 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은 차분한 어조로 말하는 영의 목소리를 듣고 안심한 뒤에 밤 사이에 다른 일들은 없었냐고 물었다. 영은 자신을 염려해 주는 윤의 음성에서 애틋함을 느꼈다. 지난밤 가슴속에서 일어난 균열들이 드디어 깨지고 파편을 만들어 몸속 연약한 부분을 할퀴지는 않을까 두려웠지만, 윤의 음성이 머금고 있는 따스한 온기가 그 균열의 틈을 메워주었다. 격랑에 휩쓸리고 있는 자신을 한 치 앞도 모르는 망망대해로 떠나보내지 않기 위해 단단히 붙들어 줄 것 같은 목소리였다. 전화기 너머 어딘가에서 영이 좋아하는 꽃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영은 친언니와 함께 남편에게서 소송 없이 아이를 데려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변호사를 선임하면 일이 커지고 비용과 시간도 만만치 않아서 조용히 대화로 문제를 풀고 싶어 했다. 윤도 자신의 의견을 소신껏 제시했고 그녀들은 서로가 모색한 방법들과 윤의 제안들을 검토하면서 아이를 데려올 수 있는 구체적이고 현명한 방향들을 찾아갔다.

며칠 뒤 영은 윤에게 전화를 걸어서 아이를 무사히 데리고 왔다고 전했다. 윤은 정말 다행이라면서 영을 위로했고 큰 문제는 없었는지 물어봤다. 윤의 물음에 영은 큰언니와 함께 카페 여사장에게 직접 찾아가서 당신이 만나고 있는 남자가 딸아이를 데리고 있으니 그를 회유해서 다시 돌려보내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고 몇 시간 뒤에 남편이 아이와 함께 친언니의 집으로 찾아와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며 아이를 품속에서 내어주었다고 했다.


"진짜 다행이야. 정말 별 다른 일은 없었던 거지?"

윤은 전화기 너머로 다시 한번 물었다.


"응. 세아가 잠을 제대로 못 잔 것 같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며칠 동안 아이를 못 봐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어.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데. 세아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나 너무 두려웠어.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영은 꾸밈없이 기뻐하며 말했다.


"이런 말은 정말 상투적이고 천편일률적이라서 하기 싫지만 그냥 할게. 안 하면 내가 너무 나쁜 사람 같아. 윤. 모든 게 당신 덕분이야. 정말 고마워."

영은 그 말을 하고 아이 밥을 차려줘야 한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윤은 자신의 집 커다란 유리창으로 겨울비가 내리는 거리를 보고 있었다. 이번 계절에서 마지막일지도 모를 겨울비는 자신의 퇴장에 구슬프게 울부짖으며 애처로운 회색 도시를 더 짙게 물들였다. 그 잿빛의 물결사이로 커다란 나방이 날아와 다급한 날갯짓으로 창문을 두드렸다. 나방은 차갑게 쏟아지는 비를 피하기 위해 어딘가에서 날아왔지만 사방이 막혀있는 탓에 요란하게 움직이며 입구를 찾고 있었다. 윤은 창문을 열어 나방이 비를 피하게 해주고 싶었으나 거대한 틀에 고정되어 있는 창문은 열 수가 없었다. 나방은 한동안 이리저리 머리를 부딪히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 이런 작은 도움도 주지 못하는 자신이 정말 영에게 큰 도움이 되었는지 윤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신했다. 불완전한 이들은 영원토록 완전할 수 없기에 서로 의지해야만 한다고. 불완전한 이들은 서로에게 기대어 불확실한 완전함을 꿈꾸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그것이 불완전한 세계에서 그늘이 아닌 그나마 양지 바른쪽을 향해 걸어가는 방법이라고. 윤은 영을 떠올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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