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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림월 Oct 26. 2024

두꺼비집#5

채워진다는 것 

사람들의 가냘픈 목을 할퀴는 날카로운 삭풍이 무뎌지면서 거리에는 서서히 온기가 스며들었다.

대지의 눈目은 공기에서 배어 나오는 따스함 때문에 눈물을 흘렸고 눈물이 뺨을 적시듯이 꽁꽁 얼어붙어있던 땅덩이를 녹이면서 아무도 모르게 젖어가고 있었다.

열흘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영은 윤의 가게로 소리도 없이 불쑥 찾아왔다.


"안녕, 오랜만이야."


영은 윤을 보고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어두웠던 공간을 단숨에 밝히는 광명처럼 눈이 부실 정도의 선명한 미소였다. 영의 목소리에서는 묘한 기백이 묻어 나왔다. 윤은 그녀의 시선에서 강하고 단단하게 굳은 결심 같은 것을 느꼈고, 그것은 작은 열매 안에 딱딱한 씨앗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윤은 씨앗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주위에 단단한 껍질이 있어서 자신의 악력으로는 도저히 부술 수가 없었다. 영의 여지없이 솔직한 그 시선은 윤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냉소와 회의, 편견 따위들을 온갖 힘을 쥐어뜯어갔다. 그렇게 윤의 영혼을 뒤덮고 있던 불온한 기운들은 조금씩 시들어가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 꺼풀씩 벗겨져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윤은 영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와."


"거기 그 방. 거기에 아무도 없지?"


영은 윤이 애정하는, 그리고 둘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두꺼비집을 물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에 가게에는 손님들이 없었고 방은 비어있었다.


"응. 거기가 왜 두꺼비집이겠어. 텅텅 비어있지. 그리로 모실까요 사모님?"


윤은 백화점의 주차 안내원처럼 양팔을 앞으로 뻗어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고 방들이 위치한 복도를 가리켰다.

영은 실연기 같은 미소를 피워 올리며 윤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살짝 때리더니 그 뒤를 따라갔다.


둘은 아늑한 방 안에서 그간 있었던 일들과 자신들의 근황들을 나누었다. 영은 얼마 전 자신이 겪었던 공포와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난 듯했다. 얼굴에는 생기가 가득 차 있었고, 모든 움직임 속에서 활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런 영의 모습을 보고 윤은 '참 다행이다'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의 축과 궤적에 대해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는 선명하게 존재하던 기운들이 그 실체를 잃고 기억 속 어딘가에 희미한 잔재로 남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시간의 올바른 물리작용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왔는데도 편안하네."

영은 고개를 돌려 방안 구석구석을 훑어보더니 크게 숨을 들이쉬면서 말했다.


"나랑 같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니야?"


"음. 맞아. 그게 가장 큰 이유인 거 같아. 공간이 주는 안락함도 분명히 있는데 왠지 혼자 이곳에 있으면 안락함은커녕 더 불안할 거 같아. 왜 불안할까? 외로움 때문일까? 아니면 내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스스로 들여다보는 게 무서워서일까?"


"누군가와 같이 있으면 내 안을 안 들여다보게 되는 거야?"


"그것도 어느 정도 맞는 말인데, 내 생각엔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내 안에 무엇이 들어있던 그것은 자신도 모르게 어딘가로 증발해 버려서 내 안은 텅 비게 되어버려. 텅 빈 공간에는 상대방이 나에게 주는 선물 같은 걸로 가득 차게 되는 거야. 선물을 받으면 기분이 업되고 좋아지잖아.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내 안에 무엇이 들어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거지. 안락함이란 그런 거 아닐까? 자신도 눈치채지 못하는 새에 천천히 스며드는 거."


"음. 그러니까 지금 나와 함께 있어서 안락하다는 얘기네.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선물을 주지는 않았어."


영은 한방울의 의아함을 머금고 있는 윤의 눈을 응시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사물은 조각으로 존재할 때도 있지만, 전체로서 존재할 때도 있어."


영의 말이 끝나자 온 더락잔에 가득 담겨 있던 얼음들이 녹으면서 술에 얼음조각이 빠지는 퐁당 소리가 허공으로 퍼져나갔다. 둘 사이에 가로놓인 공기의 울림을 듣고 윤은 자신의 영혼이 영의 마음속 텅 빈 공간에 깊이 빠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서로의 영혼을 달래고 어루만지면, 그렇게만 된다면 비로소 자신을 꽁꽁 묶어놨던 사슬에서 풀려나와 타인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윤이 깊은 상념 속으로 잠기려 할 때 영이 입을 열었다.

"이번주 일요일 날 저녁에 시간 되지?"


"응.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집에 당신 초대하려고. 세아도 소개해주고."


세아. 윤은 아이를 떠올렸다. 아이의 이름을 듣는 순간 그 아이가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걱정이 앞섰다. 아빠의 부재를 그 아이는 알고 있을까?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나이에 한 명분의 사랑과 관심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게 아닐까? 혹시 내가 그것을 아이에게 줄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나는 무엇으로 불릴까? 이런 형태를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나는 가족을 원하는가? 이런 모양새라도 나는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원하는가?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의문들로 머릿속은 순식간에 차올랐고 스스로에게 답을 말할 수 없었다. 윤은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숨이 조여 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표정이 바뀌는 것을 감지했고 그것을 영이 알아챌까 봐 겁이 나서 몸이 조금씩 경직됐다.


그때 무표정한 윤을 보며 영이 물었다.

"왜? 별로 내키지 않아?"


영은 자신의 아이를 윤에게 소개하고 싶다는 말을 용기 내어 꺼냈지만 미망에 빠진 것처럼 초조했다. 자신의 용기가 윤에게는 만용으로 비추어질까 봐 불안했고 자신의 진심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굴절되어 왜곡되지는 않을까라고 생각하면서 떨리는 긴장감을 끌어안았다. 경직되어 있는 윤과 초조함에 빠져있는 영의 사이에 얼마간의 정적이 흘렀다.

침묵 속에서 윤은 잠시동안 자신의 과거를 되짚어보았다.

무언가를 강렬히 원할 때에는 대게 그것이 찾아오지 않았고 무언가를 죽도록 회피하고 싶어 할 때에는 그것이 맹렬히 자신의 뒤를 쫓았다. 윤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배운 것만 믿으며 살아왔다. 시간이 배양해 낸 그 믿음은 윤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관을 만들었다.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자기가 원하는 형태로는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윤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원하는 때에 원하는 형태로 오지는 않는다 그게 무엇이든' 윤은 그 문장을 천천히 되뇌며 가슴속에 한 땀 한 땀 눌러 진하게 새겨 넣었다.


"좋아."


윤의 목소리에 얼어있던 침묵이 깨졌다. 물줄기 같은 윤의 한마디는 영의 마음을 향기롭게 만들었다. 영은 기뻐하는 기색을 숨기려고 노력했지만 자신도 어쩔 줄 모르게 마음속에서 피어 나오는 향기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그 향기로움이 윤의 코 끝을 스쳤다. 윤은 영의 환희 속에서 그녀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비의意들이 증발하는 것을 보았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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