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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림월 Oct 26. 2024

두꺼비집#7

아이 그리고 동경으로

영의 아파트는 시내에서 차로 20분 정도 떨어져 있는 근린공원 근처에 있었다. 아파트 단지는 공원을 끼고 있어서 군데군데 잡목림들이 심어져 있었고 단지 내에는 적당한 크기의 나무들로 작은 숲을 조성해서 짧은 산책로가 있었다. 20층짜리 아파트 여덟 동으로 이루어진 단지였다. 영의 집은 3동 15층이었다. 윤은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엘리베이터를 타서 15층을 눌렀다. 잠시 후 15층에 도착했다는 알림 소리가 울렸고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왼쪽을 보니 1501이라는 번호가 보였다. 숫자를 보고 나서 갑자기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윤은 영의 집 현관문 앞에 가만히 서서 망설였다. 자신이 모르는 낯선 세계로 한걸음 다가간다는 것은 꽤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는 자신의 세계에서만 살아왔고 자신이 모르는 세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미지의 세계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사랑 같은 것을 하고 가족을 꾸려서 행복하게 사는 곳이겠지 라며 추측과 상상만을 품었다. 윤의 근거 없는 논리로 점철된 그곳은 진실이 사실로 한정될 수 없었고 사실이 진실로 한정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 폐쇄성이, 타인을 사랑할 수 없는 윤에게 미지의 세계와 동시에 동경의 세계를 안겨 주었다. 미지는 동경과 맞붙어있다. 알 수 없는 곳을 동경한다는 건 얼마나 모순적인가. 자신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세계의 끝을 알 수 없다는 이유로 그 끝이 찬란할 거라는 망상이 마음속 곳곳에 구멍을 뚫어 결핍 투성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현재. 그 공백이 그곳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수많은 망설임을 만들어내는 것 같아서 순간 착잡한 심정이 들었다.


윤은 영의 집 앞에서 폐 속 깊이 담겨있던 팽팽한 공기를 토해냈다. 그때 휴대폰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우웅, 하는 메마른 소리가 아파트 복도에 울렸다.

영의 전화였다. 윤은 통화 버튼으로 손을 가져갔다.


"어디야? 언제쯤 와? 준비는 거의 다 끝났어. 금방 오는 거지? 음식 식는단 말이야."

채근하는 영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쏟아졌다.


"응, 다 왔어 바로 앞이야."


윤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도어록 슬라이드를 위로 올려서 영이 알려준 비밀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삑. 삑. 삑. 삑 그 몇 초의 시간을 윤은 아득히 멀게만 느꼈다. 비밀번호가 해제되는 소리를 듣고 조금 용기를 내어 거세게 문을 당겼다. 그렇게 미지와 동경의 세계로 들어가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현관을 들어서자 돌이킬 수 없다는 걸 확인하듯이 등 뒤에서 철컥하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곧바로 실내용 슬리퍼를 신은 발소리가 이쪽을 향해 들려왔다. 청바지에 검은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목에는 그레이 컬러의 앞치마를 두른 영이 윤 앞에 모습을 보였다. 영은 활짝 웃으며 윤을 맞이했다.


"어서 와."


영의 환영인사를 받고 윤은 자신도 모르게 등 뒤로 아이의 선물을 슬쩍 감추었다. 영은 선물을 보지 못했는지 거실로 안내했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맛있는 음식 냄새가 풍겨왔다. 거실을 둘러보니 신축 아파트에서 볼 수 있는 깔끔하고 세련된 화이트톤의 인테리어가 한눈에 들어왔다.

31평의 공간에는 3개의 방과 거실, 주방, 그리고 두 개의 욕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거실 한가운데는 커다란 유리창이 있었는데 잡목림들이 우거진 공원의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거실 바닥에는 크림색 카펫이 깔려 있었고 같은 색깔의 5인용 가죽소파가 ㄱ 자 모양으로 놓여있었다.

소파 옆 구석에 라탄으로 만든 커다란 갓을 쓴 스탠드에서는 은은한 조명이 거실과 천장을 아늑히 비추고 있었다. 소파 쪽 벽에는 가로가 1미터쯤 되는 그림액자가 걸려있었는데 반고흐 스타일의 유화로 그린 해바라기 그림(친언니의 작품)이었다. 거실을 사이에 두고 정면을 마주하는 벽에는 벽걸이형 TV가 설치되어 있었고 소파와 TV사이에 원목으로 된 큰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거실 옆으로는 성인 3명이 다녀도 될 만큼 여유 있는 주방이 있었고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아일랜드형의 식탁이 놓여있었다. 거실과 주방 사이에는 방 두 개가 마주 보고 있었는데, 왼쪽이 안방 오른쪽이 아이방이었다. 그리고 현관문을 마주한 작은 방이 있었고 그 옆이 욕실이었다. 윤은 영의 집을 신기하다는 듯 둘러보았다. 거실에 있는 테이블 위에는 먼지 하나 없었고 밝은 색의 카펫도 얼룩 한 점 없이 깔끔했다. 집에서는 기분 좋은 온기가 감돌았고 그 때문에 따스한 기운이 집안 곳곳에서 배어 나왔다. 집의 분위기가 영과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영은 완성된 음식들을 식탁에 내놓으며 부동산에서 집 구경을 나온 사람처럼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는 윤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뭘 그렇게 보는 거야. 애 키우는 집이 다 똑같지 뭐."


윤은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영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좋다. 당신 향기가 나는 것 같아."


영은 윤의 그 말에 소리 없이 웃었다. 그때 방문에서 끼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윤은 무심결에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세아라는 아이가 서 있었다. 단발머리에 깨끗하고 깊은 눈을 가진 아이는 잠에서 막 깼는지 한쪽 눈을 비비고 있었다. 그러더니 몇 초 동안 커다랗고 맑은 눈으로 윤을 응시했다. 자신의 공간에 들어와 있는 낯선 남자가 환영인지 실체인지를 확인하듯이 눈을 껌뻑였다. 아이는 칩입자라고 느꼈는지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소리 내어 울음을 터트렸다. 울음소리가 들리자 영은 아이를 쳐다보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괜찮아, 엄마 친구야. 오늘 세아 생일이라서 축하해 주러 온 거야. 안 울어도 돼."


거침없이 울려 퍼지는 아이의 울음에 윤과 영은 당황했다. 울음이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던 차에 윤은 허리를 숙여 손에 들고 있던 장난감을 아이 앞으로 내보였다. 고개를 가까이 가져가서 영의 다리 사이에 파묻혀 있는 아이를 보며 말했다.


"자, 아저씨가 주는 선물."


아이는 선물을 보자마자 거짓말처럼 울음을 멈추었고 금세 호기심으로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그런 아이를 보고 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영은 윤이 사온 장난감을 보고 놀란 기색으로 말했다.


"아니.. 이거 콩순인데. 세아가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았어?"


"아까 통화로 그랬잖아. 콩순이 틀어놓으면 집중한다고."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하하. 당신 대단하네."


"뭘 살까 고민하다가 갑자기 떠올라서 사 온 건데, 세아가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영은 촉촉해진 눈으로 윤을 바라보다 말했다.

"감동이다. 진짜 고마워."


윤과 영은 장난감을 매만지고 있는 아이와 함께 식탁으로 자리를 옮겼다. 영은 자신의 옆에 아이를 앉히고 윤은 그녀들을 자연스럽게 마주 보고 앉았다.

식탁에는 양상추와 토마토, 오이에 부라타 치즈를 올리고 올리브유를 뿌린 샐러드와 부드럽게 조리된 갈비찜, 직접 만든 토마토소스에 바질을 곁들인 파스타가 있었고 라탄으로 만든 작은 바구니에는 포카치아가 먹기 좋게 썰려있었다. 테이블 가장자리에는 아이스크림 체인점에서 파는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놓여있었는데, 영은 케이크를 꺼내서 숫자 4의 모양으로 만들어진 초를 꽂은 뒤에 상자 안에 들어있던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윤과 영은 아이를 바라보며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노래가 끝나고 셋은 박수를 치며 촛불을 불었다. 영은 드디어 2차 생파가 시작됐다며 환호를 하면서 접시에 샐러드를 담아서 윤 앞에 놓아주었다. 아이는 그런 자신의 엄마를 보고 본인도 신이 나는지 만세를 하듯 두 팔을 들어 올리며 까르르 웃었다. 저녁노을이 거실창을 물들이며 주홍빛 광휘가 집안을 가득 메웠다. 그렇게 셋의 파티가 무르익어갔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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