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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림월 Oct 26. 2024

두꺼비집#8

번져가는

그날 영의 집에서 보냈던 시간들은 윤에게 오래된 아름다운 추억처럼 아득하게 다가왔다. 눈 부시게 황홀했던 단편들은 닫혀있던 가슴속에 아무도 모르게 틈입해서 어둠 속에 한 줌의 빛을 내리쬐고 있었다. 윤은 손안에 잡힐 것만 같은 안온함을 어딘가로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변함없이 자신의 곁에. 같은 자리에 머물렀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영의 집에 초대받은 이후로 윤은 없었던 게 갑자기 생겨난 기분이 들었다. 자고 일어난 사이에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나서 그 날개로 하늘을 훨훨 날아다닐 것 같은 활기가 생겨났고, 예사롭던 나날들이 새벽녘 동이 트면 안개가 걷히며 햇살이 대지에 스며들듯이 싱싱한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개체로서의 일상은 더욱 뚜렷해지고 선명해졌지만 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세계가 변화하고 있는 것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다. 아마 윤의 무의식 깊숙한 곳 어딘가에 단단하게 교착된 차가운 덩어리 때문일 것이리라.

그 덩어리는 주변에서 아무리 뜨거운 온기를 불어넣어도 좀처럼 녹지 않고 그 자리를 굳게 지켰다. 윤은 그 덩어리의 실체로부터 도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자신 안에 교활한 물처럼 숨어있는 어둠의 그림자를 마주하는 것은 강한 두려움의 상징이었다. 윤은 그 덩어리를 자신이 죽음 앞에 이를 때까지 평생 안고 살아야만 하는 숙명으로 생각했다. 인간에게 숙명이라는 것은 앞질러서 보는 게 아니라 시간이 흘러 뒤돌아서 보는 것이라고 믿었던 윤은 항상 어느 시점에서 앞으로 가던 길을 멈추고 처음에 있던 자리로 돌아가곤 했다.

자신의 앞에는 밝은 미래 따위는 없을 거라고 지레 짐작하고 과거가 만들어 낸 차갑고 축축한 지하세계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 세계에는 혐오와 괄시, 과오와 실수들이 무수히 도열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어떤 침잠과도 같이 깊이 모를 밑바닥으로 윤을 가라앉혔고 수면 위의 세계에서 숨 쉬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수많은 체념들이 윤과 함께 동행했다. 결국 그 시간들이 지금의 윤을 만들었다.


영은 윤을 집에 초대한 이후부터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윤을 불러 자신의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세아와 함께 셋이서 점심이나 저녁을 먹을 때도 있었고, 윤과 둘이서 서로 좋아하는 와인이나 위스키를 마시며 영화를 보기도 했다. 영은 자신의 공간에서 윤과 함께하는 시간들이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공허하게 비어있는 마음속 공백이 따스하게 물들어갔다. 그 공백이 자신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차오를 때면 어떻게든 그 온기를 윤에게 전하고 싶어 했다. 윤에 대한 영의 마음은 점점 부풀어올라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 윤은 영에게 항상 다정했지만 그의 진심을 정확하게 꽤 뚫어보기는 힘들었다. 윤의 주변에는 항상 투명한 막이 쳐져있어서 그를 세계와 단절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은 그 막을 걷어내기 위해 부지런히 애를 썼다. 그 막이 걷히면 지금과는 형태가 다른 윤의 마음이 보일지도 모르리라.


 이 날 오후도 마찬가지로 영은 자신의 집에 윤을 초대했다. 윤이 도착할 시간 동안 그녀는 세아와 함께 거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커피 머신에 캡슐을 넣고 뽑은 뒤 자신이 좋아하는 청록색 머그잔에 담아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소파가 아닌 카펫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세아를 위해 넷플릭스로 콩순이를 틀었다. TV앞에서 윤이 사준 콩순이 아이스크림을 가지고 놀던 세아는 TV소리가 들리자 화면으로 눈길을 돌렸지만 얼마 안 가서 다시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TV를 아예 등을 지고 장난감에 몰두했다. 그 모습을 보고 윤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느꼈다. 자신의 아이를 위한 선물을 고르기 위해 고민했을 윤의 모습을 떠올리니 자연스럽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머그잔을 들다가 손의 각도가 살짝 기울어지는 바람에 입고 있던 크림색 데님에 커피를 흘렸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크고 작은 얼룩들이 오른쪽 허벅지에서 번져가고 있었다. 얼룩을 닦기 위해 물티슈를 찾던 그녀는 그 얼룩에 비친 짙고 옅은 농담濃淡이 윤으로 번져가는 자신의 마음 같아서 순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그 얼룩들을 영은 차마 지워낼 수가 없었다. 불현듯 윤에게 미안한 마음이 치솟았다. 그에게 많은 것들을 받기만 한 자신은 정작 가슴속에 가득 차 있는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언제쯤이 될까. 그의 공백을 자신이 채워줄 수 있을 미래를 영은 간절히 바랐다. 윤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으로 잠기려 할 때 현관에서 도어록 소리가 들렸다. 곧 윤이 모습을 보였다. 밝은 컬러의 치노팬츠에 하얀색 캐시미어 크루넥을 입은 차림새가 자신과 함께하는 이 공간에 잘 어울렸다.

윤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봄바람에 흔들리는 푸른 잎사귀 같은 상쾌한 미소였다.


"근데 이거 뭐야? 웬 쇼핑백이 현관에 있어?"


그 쇼핑백안에는 남편이 준 세아의 선물이 있었다. 세아의 생일 다음날 남편은 영에게 전화를 걸어 줄 게 있다면서 잠시 만나자고 했다. 집 근처 카페에서 만난 남편은 선물이라면서 쇼핑백을 내밀었다. 안에는 세아 또래의 여자 아이들이 입을만한 원피스가 있었다. 꽤 비싼 명품 브랜드의 옷이었다. 영은 괜찮다며 선물을 거절했지만 남편은 막무가내로 들이밀었다. 남편과 더 이상의 실랑이를 벌이는 게 귀찮았던 영은 선물을 받고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섰다. 집에 도착해서 원피스를 꺼내 세아에게 입혀볼까 했지만 단념하고 도로 넣어두렸는데 원피스의 주머니에서 자신의 손바닥만 한 하얀색 봉투가 떨어졌다. 영은 봉투를 열어 확인했다. 봉투 안에는 두꺼운 종이로 된 카드 같은 게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백화점 매장에서 동봉한 선물 교환권이었다. 브랜드 이름이 인쇄되어 있고 가장 밑에 작은 글씨로  VIP라고 쓰여 있는 여백에는 남편과 함께 사는 카페 여사장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남편은 그 여자와 함께 백화점에 가서 그 여자의 취향과 안목으로 고른 원피스를 세아의 선물로 준 것이다. 사실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선물 교환권에는 그녀의 이름이 버젓이 새겨져 있었기에. 영은 순간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며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쓴웃음을 머금고 옷을 잘 정돈해서 쇼핑백 그대로 옷장 깊숙이 넣어 두었다. 그러다 그냥 버려버리자고 마음먹고는 오늘 아침에 현관문 앞에 두었다.


"응, 그거 남편이 세아 선물이라고 준 건데. 그냥 버리려고."


윤은 영의 말을 듣고 허리를 숙여 쇼핑백을 들어서 안을 확인해 보았다.

"옷이네. 어후. 이거 비싼 건데 버리려고?"


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사정을 말했다. 윤은 영의 얘기를 가만히 들어주고는 미소를 짓더니 그녀의 눈동자안을 그윽하게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그럼 당근에 올리자."

윤은 소년처럼 웃으면서 개구쟁이 같은 말투로 말했다. 


영은 그 명랑한 말투에 마음이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그리고 자신도 명랑하게 말했다.

"좋은 생각이야."


둘은 서로를 마주 보고 깔깔대면서 실컷 웃었다. 한참 동안 웃고 난 뒤에 영은 쇼핑백을 들어서 자신의 옷장 깊숙한 곳에 다시 넣어두었다.

거실 한복판에서 자신의 엄마와 잘 모르는 남자가 서로를 보면서 웃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던 세아는 콩순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별안간 까르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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