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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림월 Oct 26. 2024

두꺼비집#9

하나의 세계

따스한 바람에 꽃잎들이 흩날리고 바닥에는 색색의 여린 꽃잎들이 여기저기 뿌려졌다. 행인들의 발 밑에서는 자신들을 밟지 말아 달라는 여린 꽃잎들의 애원이 들려오고 자신이 이곳에 당도했다는 걸 알리듯 봄바람은 향기로운 꽃냄새를 가득 머금고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둘은 영의 집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어제는 셋이서 함께 저녁을 먹고 아이를 재운 뒤 거실에서 화이트 와인을 마시며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다 밤늦게 아이가 깨는 바람에 다 같이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를 재우고 다시 거실로 나올 생각이었지만, 둘 사이에 아이를 두고 자신들도 까무룩 잠이 들었다. 동이 트면서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얇은 쪽빛에 잠이 깬 그들은 조심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아침햇살이 거실을 가득 메우고 커다란 창에서는 공원의 숲과 나무들이 보이면서 창 너머 세계를 새 생명의 초록색 기운들로 물들이고 있었다. 녹음으로 눈부신 계절이 창문을 통해 이쪽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윤은 뒤에서 영을 포근하게 끌어안은 채 창문으로 보이는 봄의 풍경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영이 가진 육체의 탄력과 사려 깊은 숨결이 동시에 느껴졌다. 윤에게 안겨있는 영은 자신과 그의 모든 신경들이 하나의 관管으로 이어져 혈액의 흐름과 근육의 움직임 그리고 영혼의 무게까지 공유하는 것처럼 느꼈다.


둘은 서로의 살결을 비비며 불완전한 자신들이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기대가 사랑이라는 감정과 어떤 상관이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사랑이 불가결의 요소로 전제돼야 하는 세계를 윤은 경험해보지 못했고, 영은 사랑이 완전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쥐려고 하면 손 틈사이로 부서져 흘러내리는 유사流沙처럼 그 실상이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윤은 사랑이라는 추상적이고 모호한 존재의 그림자가 자신이 서 있는 지면에는 흔적을 보일 생각이 없다는 걸 점점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영이 앞으로 자신에게 건넬 말들 중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내포되면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영은 사랑은 완전한 실체가 존재한다라는 자신의 편견을 눈앞에 펼쳐진, 그녀가 앞으로 살아내야 할 날들의 명세서에서 지워버렸다. 영은 윤의 존재가 자신의 세계를 넓혀주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의심치 않았다. 윤을 만난 후 보이지 않던 것들이 들리기 시작했고, 들리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형에 막혀 에두르거나 지체되어도 여러 줄기의 강물이 흘러 결국엔 어느 지점에서 만나 곧 바다로 흘러가듯이 서로의 세계가 하나의 세계로 합쳐지고 있었다.

그런 생각들에 잠길 때쯤 영의 전화기가 울렸다.

친언니의 전화였다. 영은 한동안 통화를 하더니 전화를 끊고 윤에게 말했다.


"오늘 언니네 어린이집에서 근무하시는 급식 아주머니가 사정이 생겨서 못 나오신다네. 그래서 나한테 아이들 먹을 급식을 해달라고 부탁해서 시간 맞춰서 나가겠다고 말했어. 오늘은 가게도 쉬는 날이고 세아도 봄방학 중이니까 괜찮을 거 같아서 그러겠다고 했어."


영은 윤의 눈을 바라보며 이어서 말했다.

"점심때쯤 돌아올 거 같은데, 세아랑 둘이 집에 있을 수 있지?"


영은 웃음을 짓고 소파 위에 있던 콩순이 장난감을 들어서 윤에게 들어 보였다.

윤은 아이와 단둘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순간 당황했지만 영의 손에 들려있는 장난감을 보고는 곧 괜찮다고 생각했다.


"응, 문제없어."


윤의 대답에 영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영은 함께 맞이한 아침을 조금 더 누리고 싶은 마음에 커피를 내리기 위해서 주방으로 갔다. 커피 머신에서 두 잔의 커피를 뽑으려 했지만 캡슐이 한 개 밖에 남아있지 않아서 한 잔을 뽑아 청록색 머그잔에 담은 뒤 윤과 거실 바닥 카펫 위에 나란히 앉아 나누어 마셨다.

아침 햇살 사이로 모락모락 피워 오르는 커피 향에서는 꽃내음이 났고 입안에서는 달콤한 과실향이 났다.

커피를 다 마신 뒤 영은 욕실로 들어가서 샤워를 하고 외출 준비를 했다. 그 사이 윤은 커피잔을 씻어 놓고 어수선하게 놓여있는 주방의 식기들을 정리한 뒤 냉장고를 열어 식재료들을 확인했다. 오후에 아이와 함께 점심을 만들어 먹기 위해서는 재료들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외출 준비를 다 마친 영은 현관을 나서면서 냉장실에 소고기 야채죽이 있는데 그걸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아이의 아침식사로 먹이면 된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어 뒤돌아서 세아를 잘 부탁한다며 윤에게 손을 흔들고는 문을 닫았다.


윤은 거실 소파에 앉아 아이가 잠에서 깨면 먼저 무엇을 해야 할지 곰곰이 살펴보았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방문이 열리면서 잠옷 차림의 아이가 눈을 비비면서 걸어 나왔다. 아이의 눈꺼풀이 위 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윤은 아이가 자신을 마주하고 또 울음을 터트리면 어쩔까 속으로 전전긍긍하고 있었지만, 엄마가 외출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 같았다. 분홍색에 노란색 곰돌이 인형이 그려진 잠옷을 입은 아이는 윤의 눈을 말없이 빤히 쳐다보았다. 윤은 2m쯤 떨어진 자리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의 눈동자 속으로 단숨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호수처럼 맑고 깊은 아이의 눈동자에서 우주의 광활함을 보았고 태초의 신성함을 느꼈다. 지구의 중력이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기분이었고 시공간이 멈춘 어느 세계에 둥둥 떠다니며 부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동시에 영혼 속 깊은 곳 어딘가에서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소용돌이 한가운데에는 아이를 품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소용돌이의 혼돈은 서서히 소강되고 자욱한 안개가 걷히면서 사물들의 윤곽이 선명해지는 찰나 지구는 중력을 이용한 마찰을 강하게 작용시켜 윤이 서 있는 지면에 두 다리를 단단히 고정시켰다. 윤은 잠시 의식을 잃었다가 깬 사람처럼 눈을 크게 깜빡이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앉아있었던 자신이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었다. 아이는 그런 윤을 보고 이상한 사람이라는 눈빛을 보이더니 자연스럽게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윤 옆에 놓여있던 콩순이 장난감을 들어서 거실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다음 철퍼덕 소리를 내며 앉고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윤은 아이의 뒤에 서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창밖에 눈부신 햇살이 따스하게 아이를 품는 순간 이 공간에서 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거대한 파도처럼 윤을 뒤덮었다.

그 웅장한 파고는 어린 시절 놀이터에서 비 오는 날 들여다보았던 시커멓고 깊숙한 두꺼비집을 기억하게 했다. 귓가에는 어렴풋이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 게 새 집 다오' 하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후 주문을 외는 듯한 노랫소리가 희미해질 때쯤 이곳이 자신의 마지막 두꺼비집이 되리라는 예감이 들더니 점점 현실이 된 것 같은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초점이 맞지 않는 카메라 속의 피사체가 어느 순간 초점이 맞게 돼서 뚜렷하게 보이듯이.


윤은 일단 세아의 아침식사를 차려주기 위해서 냉장고로 가서 문을 열었다. 냉장실 안쪽에 손바닥만 한 크기의 유리로 된 밀폐용기가 보였다. 손을 뻗어 그것을 꺼내 확인해 보니 영이 말한 소고기 야채죽이었다.

윤은 전자레인지 용기에 죽을 조금 담아서 전자레인지에 넣고 데웠다. 아이에게 너무 뜨겁지 않도록 다른 용기에 옮긴 뒤 손으로 부채질하면서 적당한 온도로 식혔다. 죽이 담긴 그릇을 쟁반에 올린 뒤 거실로 가서 아이의 옆에 자신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이는 옆에 앉은 윤을 힐끔 쳐다보더니 흥미 없다는 듯이 고개를 다시 돌려 장난감에 몰두했다. 윤은 머쓱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숟가락으로 죽을 조금 푼 다음 호 불어서 한번 더 식힌 뒤 아이의 입가에 갖다 댔다. 아이는 고개를 가로로 젓기만 하고 입을 벌리지는 않았다. 윤은 몇 번이나 시도했으나 아이는 도무지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때에 예전에 영이 말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가끔 세아가 밥을 잘 안 먹을 때가 있어. 발육에 지장이 있을까 봐 걱정했었는데, 그냥 자기 의사가 확실한 거였어. 자기가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은 거들떠도 안 보는 거지. 이 어린애가 벌써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게 엄마인 내가 봐도 너무 신기하더라."


머릿속에 떠오른 영의 말을 곱씹어보고는 윤은 아이에게 밥을 먹이는 걸 단념했다. 그리고 어린아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이 작은 몸속에 자신이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도 이렇게 작은 시절이 있었는지 되돌아보았다. 작은 틀 속에서 소멸과 생성을 반복하며 더욱 완벽한 육체를 구성하고, 그 영혼의 부피를 채우며, 무의식을 기저로 두고 매번 바뀌는 새로운 의식 체계를 갖춘. 스스로 숨 쉬고 있는 세계의 소산이 된 자신의 실존을 눈앞에 있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거울처럼 비추어 보았다. 윤은 이 아이가 살아갈 세계를 상상하면서 자신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며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떠올렸다. 잠시 후 완만한 시간의 경사의 어느 한 지점에서 가슴 벅찬 환희로 물들어있는 자신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환영이 마치 손에 잡힐 것만 같아서 윤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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