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
세아는 정오가 다 되어서야 장난감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는 소파로 다가와서 윤의 왼쪽 무릎을 손바닥으로 두세 번 가볍게 내리쳤다. 무언가를 원하듯이. 아이는 눈빛으로 윤을 조르고 있었다.
아이의 눈빛을 보고 자신에게 배가 고프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아까 소고기 야채죽을 먹지 않던 세아의 입맛을 생각해 보며 이 아이를 위해 직접 음식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윤은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내놓을 만큼의 요리실력은 갖고 있지 않았다. 가끔 자신의 집에서 마늘을 다져서 오일 파스타를 해 먹었는데, 알리오올리오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아주 간단한 요리였다. 아이에게 면 요리를 해주어도 괜찮을까 고민하다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닫고 주방으로 향했다. 싱크대 오른쪽 밑 두 번째 서랍에 링귀네 면이 있는 걸 확인하고 찬장에서 절반 정도 남아 있는 올리브유를 꺼냈다. 냉장고 문을 열어서 마늘이 있는지 확인했다. 생마늘은 없었고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다진 마늘이 있었다. 윤은 이 정도면 재료는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면을 삶기 위해 냄비에 물을 끓였다. 윤의 레시피는 간단했다. 냄비에 물을 받고 굵은소금을 크게 한 스푼 넣는다. 물이 끓을 동안 팬에 오일을 두른다. 팬이 달궈지면 마늘은 반스푼만 넣고 가장 약한 불로 줄인 다음 마늘이 타지 않게 2분 정도 볶는다. 팬에 면수를 두 국자 넣고 끓어오르면 7분 정도 삶은 파스타 면을 넣고 물과 기름이 잘 섞이도록 젓가락을 사용해 휘젓는다. 면수와 오일과 면에서 나온 전분이 합쳐져서 소스처럼 꾸덕해질 때쯤 불을 끄고 면에 소스가 잘 밸 수 있도록 한 손으로 팬을 들고 손목 스냅을 사용해 앞뒤 위아래로 흔들어 준다. 유튜브에서 본 이탈리아 현지에서 근무하는 셰프의 영상에서는 이 행동을 만테까레라고 불렀다. 영상 속 셰프는(얼굴을 나오지 않고 내레이션만 나왔다.) 이것이 레시피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고 일러주었다. 그렇게 소스가 크림화가 되면 완성이었다. 원래 레시피에는 마늘이 익을 때쯤 페퍼론치노를 한 꼬집 정도 넣어야 하지만 아이가 먹을 음식이니 맵거나 자극적이지 않도록 페퍼론치노는 넣지 않기로 했다. 자신이 요리를 하는 동안 아이를 위해 TV에 콩순이 애니메이션을 틀어주었다. 윤은 레시피를 따라 요리를 시작했고, 20분쯤 지났을 때 접시에 파스타를 담았다. 파스타가 담긴 접시를 거실 테이블로 가져오는 모습을 본 아이는 TV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하다가 발을 동동 구르며 작은 몸을 베베 꼬았다. 그러더니 얼굴에는 수줍은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윤은 아이가 자신을 보고 웃은 건지 음식이 담긴 접시를 보고 웃은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 환한 얼굴을 보고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윤은 테이블 위에 접시를 놓고 포크를 사용해 파스타를 돌돌 말았다. 그리고 호 불어서 아이의 입가로 가져갔다. 아이는 아까와는 다르게 입을 크게 벌리고 포크에 말린 파스타를 단숨에 먹었다. 아이의 볼이 순식간에 부풀어 올랐다. 아이는 입속에 음식을 천천히 씹어서 삼켰다.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맛있게 먹는 것 같아서 윤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의 토실하고 부풀어 오른 부드러운 뺨을 보고 윤은 어떤 소설에서 읽은 문장이 떠올랐다.
'음식이 맛있다는 건 좋은 거예요. 살아 있다는 증거 같은 거니까요'
윤은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고 있는 아이의 모습에서 생명의 움직임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 역동적이고 뜨거운 광경이 가슴속에 단단히 자리 잡은 차가운 덩어리를 서서히 녹였다. 윤은 가슴속에서 울컥하는 무언가가 아마 그 차가운 덩어리의 잔해 일거라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 자신을 결박했던 사슬에서 풀려나는 것 같아서 강렬한 해방감이 세차게 밀려왔다. 그런 윤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만 조금씩 벌려서 윤이 주는 음식을 먹었다. 그러다 식탐을 부리는 것처럼 윤이 잡고 있던 포크를 갑자기 뺏더니 스스로의 힘으로 파스타를 떠먹기 시작했다. 포크를 돌릴 힘이 아직은 모자라서 막무가내로 파스타를 집어 올려서 입안으로 넣었다. 윤은 아이가 급하게 먹다가 탈이 날까 봐 가위를 가져와서 기다란 면을 조금씩 잘라주었고 그 덕분에 좀 더 편하게 파스타를 먹을 수 있었다. 한참 음식을 먹고 나서 배가 부른 지 아이는 포크를 놓은 다음 콩순이 장난감에 다시 손을 대기 시작했다. 접시에는 약간의 파스타가 남아있었다. 윤은 티슈로 아이의 입가를 닦아주고 빈 그릇을 닦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그때 현관문에서 도어록 소리가 들리더니 영이 거실로 들어왔다. 주방에서 접시를 들고 있는 윤을 보고 영은 얼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이제 밥 먹은 거야?"
윤은 들고 있는 접시와 영을 번갈아 보고는 아이가 먹다가 남긴 파스타를 영에게 보여주면서 말했다.
"오전에 세아가 당신이 말한 죽을 안 먹길래 내가 방금 파스타해 줬는데, 다 먹고 이거 남았어."
윤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영은 다가와서 접시 속을 보더니 포크를 집어서 남은 파스타를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영은 파스타를 입에 머금고 놀란 표정으로 윤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거 정말 당신이 한 거야? 너무 맛있는데. 우리 식당에서 팔아도 되겠어. 알리오올리오가 만들기는 쉬워 보이지만 사실은 되게 어려운 음식 중에 하난데. 아니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윤은 영의 말에 눈웃음만 짓고는 접시를 받아 들고 싱크대에 붙어있는 손잡이를 돌렸다.
시원하게 나오는 물줄기가 접시 안을 가득 채웠다. 윤이 아무 말 없이 접시를 씻는 모습을 영은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뒷모습에서 포근하고 따스한 안정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 안정감은 큰 울타리 안에 있었는데, 바깥에 그 무엇도 침입하지 못하도록 높은 벽으로 견고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윤이 세워둔 튼튼한 울타리 안에서 자신과 세아가 보호받는 것 같았다. 영은 지금 자신의 가슴속에서 솟아오르고 있는 이 감정을 다시 한번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생각했다. 이런 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불완전하더라도 그 불완전함의 축적을 통해 어느 순간 완전해지리라는 걸. 이것이 윤을 만나 자신이 새롭게 정의한 사랑이라는 도식의 해독이라고 확신했다. 영은 오른쪽으로 한 발자국 다가서서 나란히 선 채로 윤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나 사랑해?"
윤은 영을 쳐다보지 않고 다 씻은 접시를 건조대로 옮기면서 말했다.
"사랑.. 난 그런 거 몰라. 그게 어떻게 생긴 건지 여태껏 모르면서 살았으니, 앞으로 알게 되더라도 잘 모르는 거나 다름없겠지. 하지만 나는 당신 옆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할게. 만약 당신이 사랑을 잘 알고 있다면, 그런 걸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다면 아무래도 좋아. 당신은 계속 사랑을 해. 난 계속 내가 할 수 있는 걸 할 테니까."
영은 윤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한동안 그저 말없이 윤의 옆모습만 바라보았다. 잠시후 영의 눈에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젖은 뺨을 채 닦지도 않고서는 뒤에서 윤을 꼭 끌어안았다.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