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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림월 Oct 26. 2024

두꺼비집#11

하나에서 둘, 그리고 셋

윤과 영 그리고 세아는 제주도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세아의 봄방학이 끝나기 전에 함께 여행하자고 제안한 건 영이었다. 윤은 그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다음 날 티켓을 예약하고 숙소와 렌터카를 예약했다. 비행기 티켓의 날짜는 열흘 뒤였다. 열흘 동안 윤은 자신의 집을 정리하고 하던 일을 그만두었다. 김사장한테 전화해서 전할 말이 있으니 잠시 만나자고 얘기했다. 카페에서 만난 김사장에게 이제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도전해보고 싶다고 하니 "그래 이제 졸업할 때 됐지. 그동안 가게 장사 잘 이끌어줘서 고맙다. 앞으로 하는 일이 잘 됐으면 좋겠다. 나중에 언제 기회가 되면 단둘이 소주나 한 잔 하자고. 우리 그동안 너무 비즈니스적으로만 서로를 대했어. 막상 떠난다고 하니까 섭섭하네."라는 말을 하면서 윤과 함께한 지난날들을 회상했다. 윤은 그런 김사장에게 그동안 덕분에 신세를 많이 졌다고 말하며 다음에 도움이 필요할 때가 생기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말했다. 그는 알겠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윤은 영의 식당에서 일하기 위해 요리학원을 등록했다. 첫 수업을 듣는 날. 생애 처음으로 깨달았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꽤나 가슴 떨리는 일이라고. 그 두근거림을 안고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배우고 몰랐던 것들을 알아가면서 조금씩 자신이 속한 세계를 넓혀가는 것. 이것이 자신의 앞에 가로놓인 운명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라고 굳게 결심했다.


열흘 뒤 윤과 영 그리고 세아는 제주도로 향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제주도의 풍경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초록빛깔로 짙게 물든 대지는 푸른 에메랄드 색의 바닷가를 흡수하고 있었고, 거대한 지면은 티끌 하나 없이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 광대한 기운을 거침없이 내뿜고 있었다. 셋은 비행기에서 내려서 렌터카를 픽업하고 해안가를 달려 숙소에 도착했다. 영이 전에 함께 머물렀던 숙소를 다시 한번 가고 싶다고 얘기해서 같은 곳을 예약해 두었다.

바다가 정면으로 보이는 4층짜리 숙소. 바다에서는 겨울과는 다른 얼굴을 한 바람이 불어왔다. 계절이 바람을 거두어 가듯이 멀리서 새롭게 불어오는 봄바람은 차가운 겨울은 이제 완전히 지나갔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1층 카페 겸 카운터에서 지난번에 봤던 남자가 마중을 나왔다. 따사로운 햇볕에 피부가 더 검게 그을린 것 같았다.


"어서 오세요. 이번에는 공주님도 같이 오셨네요. 허허. 4층에는 아직 손님들이 없어서 조용할 겁니다."

남자는 건치와 함께 시원한 웃음을 내보이며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4층으로 올라간 그들은 짐을 풀고 다시 내려와서 차를 타고 근처 해수욕장으로 갔다. 아이에게 모래를 밟게 해주고 싶었던 영은 해수욕장에 도착해서 아이의 손을 잡고 해변 쪽을 향해 걸어갔다. 윤은 그녀들의 서툰 발걸음을 바라보며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해변은 한적했다. 몇몇 연인들이 돗자리를 깔고 앉아서 맥주를 마시며 그들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따스한 햇볕. 따스한 바람.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파도소리. 푸른 물결. 자신의 두 다리에 단단하게 느껴지는 평탄한 땅의 지면. 윤은 이런 풍경 속에서 평온함을 느꼈다. 발치에서는 파도가 모래를 적시며 진한 경계선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는 한 발자국 뒤로 가서 밀려오는 파도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햇빛이 비치는 투명한 파도가 이쪽으로 밀려오다 공기 중에서 포말이 되어 흩뿌려졌다. 영과 아이는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모래로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윤은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자세히 보니 아이가 작은 손으로 땅을 파고 있었다. 영은 신기한 듯 옆에서 조용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는 아무말 없이 손목이 들어갈 만큼의 깊이까지 땅을 파고 있었다. 모래사장에 구덩이가 생기자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손을 그 안에 넣고는 마른 모래로 그 위를 뒤덮기 시작했다. 윤은 그 모습을 보고 아이가 두꺼비집을 만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모래에 습기가 없었고 너무 메말라 있어서 손을 빼면 쉽게 무너져 내렸다.


"여기 모래로는 안 되겠는데?"

영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 아이에게 말했다.


윤은 해변으로 다가가 두 손을 모아 바가지 형태로 만든 다음 바닷물을 퍼서 모래 위에 뿌려주었다. 그렇게 몇 번하고 나니 모래는 순식간에 점성을 띠면서 짙은 색깔로 변해갔다.


"자 이번엔 이 모래로 해보자."


윤은 아이의 손을 다시 구덩이에 넣고 자신이 직접 그 위를 덮어주었다. 무너지지 않게. 아주 견고하게. 그리고 아늑하고 따뜻하게. 촉촉한 습기를 머금은 모래가 금세 조그만 손을 다 덮었다. 윤은 조심스럽게 아이의 팔목을 잡고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모래 밑에 깔려있는 부드럽고 하얀 손을 빼내었다. 이번에는 무너져 내리지 않고 그 형태와 모양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짠, 완성."


윤이 고개를 돌려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는 신이 났는지 모래가 잔뜩 묻은 손을 머리 위로 올려서 박수를 쳤다. 작고 고운 손으로 만든 금쪽같은 구멍을 아이는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로 가만히 있던 아이는 별안간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는 그 안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윤과 영은 웃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자신들도 눈을 마주 보고 소년과 소녀처럼 해맑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해변에 파도에는 윤슬이 춤을 추었고 웃음소리는 바람을 타고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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