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순이
일요일 저녁 윤은 영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에는 영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영은 사실 오늘이 세아의 생일이라고 고백했다. 미리 말을 못 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윤은 괜찮다고 말하고 세아의 외할머니와 이모랑 넷이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영은 시내에 위치한 백화점 맨 꼭대기 층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가족들과 점심을 먹었다고 말했다.
"세아가 거기서 주는 크림수프를 좋아하거든. 자, 어쨌든 1차 생파를 끝냈으니까 저녁엔 당신이랑 2차를 하는 거야. 어때? 나의 계획이. 풉, 회식자리도 아니고 나 웃기지? 엄마가 돼서 너무 유난인가?"
영의 목소리는 설렘에 푹 빠져있었다. 그 음성은 전화기를 타고 이쪽으로 넘어와서 봄날의 햇볕 같은 따스한 온기를 윤의 손에 고스란히 전해주었고 얼마 전 영에게서 풍겨오던 향기를 다시 한번 뿜어냈다. 벌거벗은 향기로움이 윤의 코 끝을 간지럽혔다.
"풉, 누가 J 아니랄까 봐, 나 간헐적 단식하고 가니까 초대 손님을 위해 맛있는 음식 많이 해두는 게 좋을 거야."
"당신에게 묵혀놨던 실력을 보여줄 기회구나. 기대해. 우리 식당이 조만간 미슐랭 스타를 받을 거니까."
영은 요리를 꽤 잘했다. 그 표현보다는 손맛이 좋다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운영하는 식당은 캐주얼했지만 그녀만의 특이한 레시피를 가지고 있는지, 음식들은 자극적이지 않아서 질리지 않고 담백했으며 재료 본연의 맛이 하나하나 다 살아있었다. 영이 만들었던 음식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더니 윤은 점점 공복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텅 비어있을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영에게 말했다.
"음식 만들 동안 세아는 괜찮을까? 아직 어린데 바로 곁에서 보살펴 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주방과 거실은 그래도 거리가 좀 있잖아. 그렇다고 주방에서 요리하는데 곁에 둘 수도 없고."
'세아'라는 이름이 자신의 입 밖으로 나온 사실에 당황해서 윤의 입에서는 새된 목소리가 나왔다.
전화기 너머의 음성에서 그 기색을 느꼈는지 못 느꼈는지는 모르겠으나 영은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넷플릭스에 콩순이라는 만화가 있는데 그거 틀어 놓으면 화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하루종일 같은 장면만 나오는데도 질리지가 않나 봐. 그런 거 보면 어린아이의 집중력이 정말 대단한 거 같아."
윤은 얘기를 듣고 노트북으로 콩순이라는 만화를 검색했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앞머리를 내리고 양갈래로 머리를 묶은, 큰 눈을 가지고 얼굴에 항상 미소를 머금고 있는 소녀 캐릭터였다. 그 이미지를 보면서 자신도 어렸을 때 좋아했던 만화가 있었는지 기억의 자루를 열심히 더듬어 봤지만 구멍이 뚫린 자루에서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영은 요리에 집중해서 문을 못 열어줄 수도 있다고 말하면서 윤에게 도어록 비밀번호를 알려주었고 벨을 누르지 말고 바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윤은 네 개의 숫자를 보면서 자신만 들어갈 수 있는 미지의 세계의 키를 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생애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고 정말 기묘한 기분이라고 느꼈다.
통화를 마치고 윤은 아이의 선물을 사기 위해 집을 나와 차에 시동을 걸고 마트로 향했다. 주말 저녁이 다 되어가는 무렵에 마트 주차장은 차들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었고 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특히나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모르는 가족들 틈 사이에서 혼자 아이의 선물을 고르고 있는 자신이 이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선물을 준비하는 게 맞는 걸까?라는 의심이 들면서 머릿속에 '자격'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동시에 선물을 산다면 무엇을 사야 할지라는 고민에 빠졌다. 한참 골몰하고 있을 때 윤의 바로 옆에서 어떤 여자아이가 아빠에게 떼를 쓰는 것이 들렸다.
"아, 아, 아빠, 나 콩순이 사줘. 저 콩순이 아이스크림 만드는 거 사줘."
"너. 얼마 전에 콩순이 옷 입히는 거 샀잖아. 너 오늘 학습지도 안 풀었고 그거 학습지 다 풀면 사줄게."
윤은 등 뒤를 스쳐 지나가는 부녀의 대화를 듣고 방금 전 영과의 통화 내용을 반추했다. 영은 분명히 콩순이라고 말했다. 윤은 집에서 본 콩순이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장난감 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장난감 코너입구에는 어른의 키만 한 건담 로봇 피규어가 팔짱을 낀 모습으로 영웅처럼 서 있었고 그 뒤로 거대한 브라운관에서는 로봇이 주인공인 3D 애니메이션이 볼륨을 줄인 채 송출되고 있었다. 입구로 들어서자 몇몇 남자아이들만 곳곳에 진열된 로봇 피규어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여자아이들은 어떤 섹션에서 어떤 장난감들을 구경하는지 알고 싶어서 코너 구석구석을 들여다봤지만 단 한 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 윤은 단념하고 여자아이 완구들이 모여있는 섹션 쪽으로 자리를 옮겨서 콩순이가 인쇄되어 있을 상자들을 찾아보았다. 생각보다 찾기가 힘들었다. 각양각색의 상자들이 좁은 공간에 한데 모여 있어서 정신이 사나웠다. 그러다가 자신의 무릎 높이쯤에 진열되어 있는 상자를 발견했다. 상자는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은 크기였고 노란색 바탕에 하얀색 작은 별들이 촘촘하게 박혀있었다. 오른쪽에는 콩순이의 이미지가 인쇄되어 있었고 가운데는 투명한 비닐로 되어 있어 제품의 모양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장난감은 슬러쉬 음료수를 만드는 기계처럼 생겼는데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아이스크림 콘을 기계에 고정시킨 뒤 버튼을 누르면 똑같이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형형색색의 아이스크림 덩어리들이 콘에 부착돼서 완벽한 콘 아이스크림 모양을 만들어주는 형식이었다. 상자의 맨 밑에는 알록달록한 색깔로 콩순이의 아이스크림 만들기라는 글씨가 인쇄되어 있었다. 윤은 상자를 들고 모양새와 만듦새를 확인했다. 그 또래 여자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장난감인지는 짐작할 수 없으나 콩순이를 좋아한다는 영의 말이 윤을 계산대로 이끌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자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자아이의 장난감을 손에 들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에 윤은 픽, 하고 웃었다. 파란 물감을 묻힌 붓으로 수채화 그림에 무심하게 쓱 하고 그어버리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윤은 계산을 마치고 주차창으로 가서 조수석에 장난감을 내려놓고 시동을 걸어서 미끄러지듯이 마트를 빠져나왔다. 영의 집으로 차를 몰고 가는 도중에 어딘가에서 어렴풋이 봄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윤은 차창을 열고 봄이라는 아름다운 방문객을 맞이했다. 봄이라는 계절은 그 체류기간이 워낙 짧아서 기운을 느껴보려는 찰나에 소리 없이 사라지곤 했다. 봄이 던지고 가는 그 당돌함에 맥이 빠지고는 했지만 헤어짐에 매달리지는 않았다. 어차피 다시 돌아온다는 걸 알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따스한 봄기운 따위는 자신의 세계에서 불필요했기 때문일까? 차창 바깥에서 흩날리는 바람은 윤에게 자신이 여태 모호함 속에서만 살고 있었다는 걸 실감하게 했다. 그리고 그 현실성은 시간과 시간 사이를 매듭짓고는 윤의 주변에서 무언가를 점점 구체적인 형태로 구성해 나가고 있었다.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