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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로롱도로롱 Feb 02. 2023

과연 무라카미 하루키는 변태일까?


 한 때 일본 소설에 미쳐있던 나는 도서관 한편에 마련된 "일본문학" 책장에 서 있었다. 일단 보자마자 믿음이 가는 '민음사'표지의 책들은 모두 읽었고, 특히나 취향에 맞았던 무라카미 하루키 씨의 책을 또 찾아보았던 것 같다. 그중 입문작으론 '노르웨이의 숲'이 있는데, '상실의 시대'라는 또 다른 제목도 있는 책이다. 여하튼 작가가 유명한 만큼 아마 많은 이들이 노르웨이의 숲을 읽었을 것이며, 이것을 읽으며 비슷한 생각을 한 번쯤 해봤을 것 같아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어쩐지 성적인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대략 40페이지에 한 번씩 등장하는 정사장면은 다소 불필요해 보이기도 하며, 다소 뜬금없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인지라 이것에 모종의 흥미와 뭔가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 같은(야설을 몰래 읽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다음 40페이지를 숨 가쁘게 읽게 하는 원동력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즐겁게 책을 다 읽고 덮어놓고 나면, 남는 것이라곤 묘한 긴장감과 우울감. '이 작가는 변탠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하루키의 다른 책들을 봐도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딱히 엄청난 주제를 담는다기보단 담담한 어조와 우중충한 분위기, 그런 묘한(?) 기분 같은 것이 내가 느낀 하루키의 특징이다. 정사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비슷하다. 그렇다면 왜 그는 이런 선택을 한 것일까?


 나도 처음엔 하루키를 변태라고 생각했다. 그는 음악을 아주 사랑하는 듯 보이는데, 그렇기 때문에 책 내용과는 별개로 음악의 제목과 가수를 등장시키는 경우가 잦다. 애초에 노르웨이의 숲도 비틀스의 노래다. 이런 것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책에 자주 등장시키는 것을 좋아하고, 섹스도 뭐 그분의 주된 관심사이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자주 등장시키는 게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봤다. 이 추측이 맞다면 그를 변태라고 부르는 것은 다소 멸칭이긴 하지만 적합한 말이 된다.


 하지만 또 몇 번이고 생각을 곱씹다 보니 다른 생각이 들었다. 하루키가 변탠게 아니라 하루키를 보고 변태라고 생각하는 내가 변태라는 것이다. 하루키의 작품에선 사랑, 불완전 이런 주제들 사이에서 정사장면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것조차 무척 에로틱하지 않고, 굉장히 어둡고, 조용하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을 고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인 간 사랑은 굉장히 복잡하다. 사랑-썸-호감 등등 관계도 무한대로 만들 수 있겠거니와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도 연인들마다 제각각이다. 누구는 말로, 누구는 눈빛으로, 누구는 호흡으로 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이 현재 사랑하는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라는 장면을 묘사하고 싶을 때 가장 쉽고도 간편한 방법은 섹스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사랑의 다른 형태이며, 쉽게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 과감하거나 정열적이라면, 오히려 작품의 분위기를 망치기 때문에 약간의 톤을 다운한. 아주 조용하고, 음침한(?) 묘사를 한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하루키는 변태가 아니라 아주 이성적이고 전략적인 소설가가 되어버린다.


 하루키가 예술과 외설의 경계에서 멋지게 예술의 테두리로 들어온 순간이다. 사실 하루키 씨를 보고 외설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 그냥 재미로 하는 말이긴 하다. 나는 그의 탁월함 중 하나가 장면을 묘사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 너무 과감하면 작품의 분위기를 망치게 되기 때문에, 정사는 아주 섬세하게 묘사해야 외설과 예술의 경계를 일반독자들에게 명확하게 해 줄 수 있다. 나는 거기에 몇몇 법칙들을 발견했다. 


 첫 번째로 한자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성기를 뜻하는 말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쭉 스펙트럼으로 보면 가장 과감(?) 한 것부터, 의사분들이나 쓸법한 용어까지 줄 세울 수 있을 텐데 일반적으로 의사분들 쪽으로 갈수록 외설스러움이 덜해진다. 가령 '음경'과 같은 단어는 사람들이 별로 민망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너무 의사 쪽으로 가버리면 오히려 또 소설의 분위기가 죽기 때문에 일상어와 전문어 그 사이의 한자어를 차용하는 편이 좋다. 여기엔 수많은 예시들을 더 들어줄 수 있으나, 궁금하면 개인적으로 문의하길 바란다.


 두 번째론 적절한 비유를 사용하는 것이다. 비유는 문학의 표현방식 중 기본 중에 기본이다. 따라서 비유를 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비유를 쓰는 것은 조금 더 전략적이다. 예를 들어 내가 머릿속으로 구상한 선정적인 장면을 비유를 통해 서술했다고 가정하자. 그렇게 되면 아무리 과감한 생각이었어도 이 장면을 이해한 독자도 공범(?)이 되기 때문에 책임이 없어진다. 일례로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책을 어렸을 적 우연찮게 읽게 되었는데, 나는 거기서 여성이 남성 위에서 말을 탔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뜬금없이 말이 왜 나올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다 큰 성인인 지금은 그 장면을 이해하게 되었으니 이젠 나도 공범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듯 비유를 통해 책임을 독자와 분담하는 방법을 통해서도 선정적인 장면을 고상하게 만들 수 있다.


 하루키는 대단한 작가임에 틀림없다. 몇몇 사람들이 그의 글을 읽고 당황스러워 하긴 하지만 그것 역시 그의 색깔이다. 여러분도 계기가 어떻든 하루키의 소설을 읽어보게 된다면 분명 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책에 나오는 섬세한 정사장면을 읽게 된다면 나의 고민도 한번 곱씹어 주길 바란다. 어쩌면 우리 중 가장 순수한 사람이 하루키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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