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혁명을 한다
고갱이 1890년 캔버스에 유채로 그렸다. 30 x 45 cm 크기로 오르세 미술관에 있다.
폴 고갱(Paul Gauguin)은 야수성과 원시성, 탈 문명적 감수성을 화폭에 담아낸 19세기 후반기에 활동한 프랑스 화가다. 예술 사조로서는 인상주의 화풍으로 시작하여 원시주의(Primitivism)를 창조하고, 이는 야수파(Fauvism)와 표현주의의 선구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갱은 1848년 파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젊은 시절 해군으로 복무한 후 증권 중개소에서 일하였는데, 증권시장이 붕괴하면서 일자리를 잃고 30대 중반의 나이에야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파리에서 그림을 시작하며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하였는데, 그때 카미유 피사로와 친하게 되면서 작품에서도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아내 메테의 고향인 덴마크에서 잠시 살기도 했고, 프랑스 남부와 파나마, 마르티니크 등지를 여행하며 그림을 그렸다. 이후 고갱은 프랑스 북서부의 브르타뉴 지방 폰타방(Pont-Aven)에 정착해 활동했다.
브르타뉴(Bretagne)는 프랑스 북서부에 위치한 대서양 연안의 반도 지역으로 거친 기후에도 불구하고 켈트 문화의 잔재로 독특한 민속과 종교적 전통이 남아있는 고풍스러운 곳이다.
이곳의 거친 파도와 맞선 바위 해안, 안개 낀 들판, 고딕 양식의 교회, 그리고 검은 옷을 입은 농민들은 파리와 같은 문명에 염증을 느끼고 원초적인 삶과 예술을 추구한 고갱에게는 제대로 된 환경이었다.
브르타뉴 사람들은 가톨릭 신앙과 켈트 전통을 함께 지니고 있었고, 고갱은 이들의 종교의식, 복장, 일상의 습관 등에서 신비로운 영감을 얻었다.
마침 퐁타방에는 고갱과 비슷한 성향의 젊은 화가들이 모여 파리의 상업적 화단에서는 감히 시도하지 못하고 있는 사뭇 다른 느낌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고갱도 이곳에서 굵은 윤곽선과 평면적 색채를 사용하는 ‘클루아조니즘(cloisonnism)’이라는 독자적인 화풍을 만들어 냈다.
클루아조니즘이란 강렬한 색채를 넓은 면에 고루 칠하고, 형태는 굵은 윤곽선(클루아종, cloison)으로 구분하는 기법을 말한다. 명암과 세밀한 묘사를 생략하고, 원근법도 배제한 채 평면에 원색을 강조하여 장식적이고 상징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일본의 목판화와 스테인드글라스 방식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평가도 있다.
고갱에게 있어 브르타뉴 시절은 문명과 자연, 인간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실험적 창작을 시도한 시기로서 큰 의미를 갖는다.
그는 이곳에서 <노란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Self-Portrait with the Yellow Christ)을 그렸다. 이 그림은 종교와 신비의 상징 세계에 자신의 예술적 갈증과 갈등을 병립시켜 강렬하고 도전적인 색채로 표현한 내면의 자화상이다.
고갱은 화면 중앙에 어두운 옷을 입고 무표정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의 눈빛은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자 마냥 호기심에 가득 차 있지만 쉽게 해답을 얻지 못한 듯이 피곤에 지쳐 보인다. 배경에는 그가 1889년에 그린 <노란 그리스도>(The Yellow Christ)가 측은한 모습으로 걸려있다. 그 오른쪽으로는 또 다른 그의 자화상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또 다른 고갱이 존재하는 것이다. 흡사 거울 속에 비친 또 다른 자신의 내면을 고민스럽게 지켜보는 느낌이다.
노란색은 고갱에게 신성함과 불안정을 동시에 상징하는 경계의 색이다. 예수의 피부를 노란색으로 칠한 것은 전통적 종교의 신성에 대한 반항이기도 하다.
고갱은 예수 초상과 자신의 자화상을 나란히 배치하여 자신을 마치 예술의 순교자쯤으로 상징하고 있으나, 그 순교자는 예수도 그렇고 자신도 노란색의 위험 신호 속에 놓여 있는 비정상과 불완전의 인간적 속성을 떨쳐버리지 못한 원시적인 속물일 뿐임을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닌가 싶다. 가히 철학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의 종교와 신비에 관한 독특한 관념은 당시 그가 그린 <설교의 환시>라는 작품에서도 가감 없이 노출되고 있다. 이 그림은 브르타뉴 여성들이 기도 속에 보게 된 환상을 그린 그림으로, 종교적 상징과 현실이 뒤섞인 고갱의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고갱의 <노란 그리스도>(The Yellow Christ)의 배경도 브르타뉴의 시골 풍경이다. 그는 예수를 현대의 농촌에 등장시킨 것처럼 그렸고, 이는 종교적 경외심을 파괴하는 행위로 여겨졌다. 그는 예수를 역사적 인물이나 신으로서가 아니라, 고통받는 인간으로서 또는 인정받지 못한 예술가로서 동시대의 희생자로 표현했다.
고갱은 1888년 고흐의 초청으로 브르타뉴를 떠나 아를의 ‘노란 집’에서 고흐와 함께 작업하며 서로의 예술 세계를 지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두 사람은 예술적 견해와 성격 차이로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이 갈등은 고흐가 귀를 자르는 사건으로 이어졌고, 고갱은 아를을 떠나 브르타뉴로 돌아왔다가 다시 원시의 세계를 찾아 나섰다.
1891년 고갱은 남태평양 중앙에 위치한 프랑스령인 타히티로 갔다. 그는 문명 세계에서 벗어나 보다 원시적인 낙원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러나 타히티의 현실은 고갱이 꿈꾸던 순수한 원시 사회는 아니었다. 이미 프랑스 식민지 정책으로 원시는 크게 파괴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지 여성과 동거하며 원주민 문화와 신화를 탐구하고 이를 자신의 철학적 인생관으로 해석하여 원시적 색채로 표현해 냈다.
고갱의 타히티에서의 작품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를 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139 × 375cm 크기로 고갱의 작품 중 가장 큰 그림이다.
그림은 맨 오른쪽의 갓난아기에서 왼쪽으로 가면서 인생의 여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의 중앙에는 과일을 따고 있는 사람을 배치해 삶의 절정을 말하고 있다. 왼쪽의 늙은 여인은 삶의 종말, 즉 죽음을 의미한다.
중앙의 푸른 신상은 ‘저 너머(Beyond)’를 의미하며, 인간의 존재 너머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신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다.
고갱은 당시 매독과 피부병에 시달리고 경제적으로 매우 곤궁한 처지에 있었다. 이에 더해 딸의 죽음 소식으로 극심한 절망에 빠진 상태였다.
고갱은 아내 메테 소피 가드와의 사이에서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중 몇 명은 어린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남은 자식들은 어머니와 함께 주로 덴마크에서 자랐다. 아들 장 르네 비비앙은 1차 세계대전 중 전사했다.
고갱은 예술에 몰두하면서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으며, 타히티로 떠난 뒤에는 가족과 떨어져 살았다.
그는 이 작품을 자신의 예술적 유언으로 여겼으며, 실제로 작품이 완성한 뒤에는 자살을 시도했다.
미술사적 관점에서 이 작품은 폴리네시아의 신화와 원주민의 생활을 비현실적인 색채로 구현한 독창적인 방식으로, 후에 피카소, 마티스 등 20세기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고갱은 1903년 5월 8일,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마르케사스 제도 아투오나(Atuona)에서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매독, 심장 질환, 뇌졸중, 알코올과 약물 남용 등 복합적인 건강 악화가 원인이었다.
고갱은 1901년 타히티보다도 더 외진 마르케사스 제도의 히바 오아(Hiva Oa) 섬의 아투오나로 들어갔다. 그의 원시에 대한 동경은 이미 문명화가 진행되고 있는 타히티로서도 충분할 리 없었다.
그는 이곳에 ‘메종 뒤 주이르(Maison du Jouir, 쾌락의 집)’라는 오두막을 짓고, 현지인들의 삶과 신화를 소재로 몇 점의 그림과 조각을 남겼다.
고갱은 오두막 입구에 세 개의 수평 패널을 설치하고, 여기에 누드와 꽃, 동물들을 새기고 그 위에는 마치 주문과도 같은 문구를 달았다.
<Soyez mystérieuses>(신비로워지라)
<Soyez amoureuses et vous serez heureuses>(사랑하라, 그러면 행복해지리라)
이는 아마도 고갱이 꿈꾸던 ‘원시적 낙원’의 영원한 모습을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또 오두막 입구에 두 개의 목조상을 세웠다.
<페르 파야르>(Père Paillard)라는 목조상은 염소 뿔을 단 남성을 조각한 것으로, 이는 당시 마르케사스 제도의 문명화(civilizing)를 시도하고 있던 선교사들을 비꼬는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노란 예수를 그린 고갱을 신과 도덕에 도전하는 마귀 마냥 취급했다.
<테레즈>(Thérèse)라는 다른 조각은 반라의 현지 여성을 만든 것으로, 현지의 문화와 신화를 전파하는 여신상처럼 표현했다.
1903년 5월 8일 고갱은 악화된 병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오두막에서 사망했다. 그는 아투오나 마을 언덕의 공동묘지에 그때 그대로의 모습으로 아직도 묻혀있다.
<이 글의 저작권은 작성자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나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