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는 혁명을 한다
1892년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가 캔버스에 유화로 그렸다. 63 × 130 cm 크기로 오르세 미술관에 있다. 작품의 제목은 황혼(Dusk) 또는 크로케 경기(A Round of Croquet)라고도 한다.
보나르는 1867년 10월 3일 프랑스 파리 근교 폰테네-오-로즈(Fontenay-aux-Roses)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국방부의 고위 관리였고, 어머니는 알자스 출신으로 격조 있는 가풍에서 성장했다.
그는 파리의 명문 고등학교인 리세 루이 르 그랑(Lycée Louis-le-Grand)과 리세 샤를마뉴(Lycée Charlemagne)에서 고전학을 공부하고, 파리 대학교(Université de Paris)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잠시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변호사 일에 곧 싫증을 느끼고 아카데미 줄리앙(Académie Julian)과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에서 미술을 공부하며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1925년 그의 나이 58세에 30년 이상 동거한 마르트 드 멜리니와 결혼했다. 보나르는 마르트가 그리 좋은 가문 출신이 아니라는 점에서 오랫동안 부모에게 마르트의 존재를 숨겨왔으며, 그녀가 만성 질환을 앓고 있었음에 따라 결혼을 늦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보나르는 마르트를 끔찍이 사랑했으며, 그녀를 모델로 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녀는 건강상의 문제로 온천요법과 목욕이 일상에서의 치료의 일부였다. 보나르는 그녀의 욕실 장면, 목욕하는 모습, 실내에서의 조용한 순간들을 화폭에 담았으며, 이는 그가 '친밀주의'(Intimism) 화가로 불리는 이유가 되었다.
친밀주의란 가정, 침실, 식당, 욕실, 거실처럼 사적 공간을 다루는 예술로, 주로 문틀, 창문, 거울 속에 비치는 순간의 프레임을 화면이라는 큰 프레임 속에 그려 넣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따라서 친밀주의는 사건보다는 사물들의 조용한 질서나 공간의 분위기를 부드럽고 따뜻한 색채로 그려내며, 화면 속의 인물도 주인공이 아니라 공간 속에서 공간의 일부로서 희미하게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보나르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남프랑스의 르 카네(Le Cannet)에 정착하며 햇빛 가득한 정원과 아름다운 집을 주제로 한 작품을 다수 제작했다.
그의 <미모사가 있는 아틀리에>(L'Atelier au mimosa)는 그의 말년 평화로운 일상을 표현한 대표작이다.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노란 미모사는 태양처럼 빛나고 있다. 아틀리에의 창문 격자와 난간 등의 구도는 일상의 손 때 묻은 공간에 대한 의식을 부각하고, 내외부가 뒤섞인 듯한 독특한 시점을 상상하게도 만든다. 왼쪽 아래 한구석에 희미하게 존재하는 아내 마르트의 얼굴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마르트의 존재를 기억한 것이다.
보나르는 1942년 마르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녀의 생전의 이미지를 계속 그렸으며, 1947년 1월 23일 르 카네에서 사망했다.
보나르는 나비파(Nabis)의 핵심 화가로, 일본 미술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드러낸 ‘나비 트레 자포나르(le Nabi très japonard, 매우 일본적인 나비)’로 불린다.
나비파는 1888년 폴 세뤼지에가 브르타뉴 퐁타방에서 고갱의 가르침을 받아 그린 <부적>(The Talisman)을 발표하면서 형성된 화가 그룹을 말한다. 보나르는 세뤼지에의 작품에 공감하며 모리스 드니, 에두아르 뷔야르 등과 함께 이 그룹에 합류하고 보다 나비파적인 화풍을 발전시켰다.
Nabi는 히브리어로 ‘예언자’를 뜻하는 말로, 나비파는 마치 예언자와 같이 미술사에 새로운 비전과 미래를 제시한다는 목표로 활동했다.
<부적>에서와 같이 그들의 예술 세계는 인상주의적인 자연을 그대로 재현하는 방식을 거부하고, 색채를 자유롭게 구사하여 상징성과 장식성을 부각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방향은 의도적이었는지 우연인지는 명확지 않으나 당시 프랑스에 유행했던 일본 판화(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도 해석되었다.
세뤼지에는 <회화의 ABC>(ABC de la peinture, 1921)라는 저서를 통해 나비파가 지향하는 예술의 원리를 설파하기도 했다.
보나르는 나비파 중에서도 일본 판화의 방식을 가장 많이 사용하며, 평면적이면서도 비대칭적인 구도를 즐겨 그렸다. 그래서 색채는 여느 나비파 화가들 마냥 강렬하고 원색적이지 않고 오히려 단색에 가까운 부드러운 느낌을 만들어 냈다. 이런 이유로 그는 포스터, 삽화, 리토그래프(석판화) 등 상업적 매체에도 적극 참여하고, 실내 장식과 벽화 작업을 시도하며 예술을 가정적이고 사적 공간으로 확대하는데 기여했다.
그의 <파리 생활의 모습들>(Quelques aspects de la vie de Paris)은 장식성과 평면성을 강조하면서도 부러운 색채로 일상의 모습을 잔잔하게 표현한 석판화 작품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보나르는 당시 프랑스 지성인들이 널리 애독한 시사 잡지 <라 르뷔 블랑슈>(La Revue Blanche)의 표지와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라 르뷔 블랑슈>는 1889년부터 1903년까지 나탄송(Natanson) 형제가 발간했으며, 프랑스의 문학과 예술, 정치와 사회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며 지식인과 예술가들에게 토론의 장을 제공했다. 편집에는 펠리스 페네옹 등 지식인들이 참여했으며, 그중 레옹 블룸은 후에 프랑스 총리를 지내기도 했다.
잡지에는 앙드레 지드, 스테판 말라르메, 폴 클로델, 쥘 르나르 등 당대 주요 작가들의 글을 실었고, 보나르 이외에도 뷔야르, 툴루즈 로트레크, 발로통 등이 삽화를 그렸다.
<라 르뷔 블랑슈>는 나비파 화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며, 매 호마다 리토그래프나 목판화를 부록으로 제공해 독자들이 잡지와 함께 예술 작품을 직접 소장할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 <황혼, 또는 크로케>은 보나르의 가족과 지인들이 여름 날 저녁에 정원에서 크로케(croquet)를 즐기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화면 중앙의 인물들은 차분히 게임을 즐기고, 배경의 오른쪽에는 흰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이 춤추듯 움직이고 있다.
전체적인 구도는 원근법을 사용하지 않고 다분히 평면적이며, 색채와 구성은 화려하고 장식적으로, 인물들의 옷은 마치 한국의 자개 장식처럼 배경 위에 얹혀 붙여져 있는 느낌이다.
부드러운 초록 톤의 색채는 황혼의 고요함을 전달하면서도, 인물들의 움직임에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황혼이라는 제목은 석양의 그림자를 만들며 놀이와 휴식을 즐기는 하루의 끝자락을 상징한다. 이 역시 유유자적의 동양적 요소를 수용한 것으로 일본풍(Japonism)의 맥락이 가미된 것으로 해석된다.
보나르가 카네 생활을 통해 그려낸 풍경화도 매력적이다. 그는 친밀화가답게 풍경을 그릴 때도 바깥세상이 아닌 마치 실내화나 가족의 장면처럼 재현했다. 그래서 그의 풍경화는 관찰의 그림이 아니라 체험의 그림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보나르는 인문학적 교양을 바탕으로 예술의 품격을 일상과 시사(時事)에 접목시킨 예언자적 화가였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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