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킹 올리는 여인 – 몽마르트르 에로가 예술이 되다

명화는 혁명을 한다

by 다두



Toulouse-Lautrec_-_Femme_tirant_son_bas,_RF_1943_66.webp.png?type=w773 Femme tirant son bas - Toulouse-Lautrec


로트레크가 1894년 마분지에 파스텔로 그렸다. 58 x 46 cm 크기로 오르세 미술관에 있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는 19세기 프랑스 파리의 벨 에포크(Belle Époque)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포스터 아티스트로, 몽마르트르의 밤 문화와 인간의 내면을 독특한 시선으로 포착한 예술가다. 그는 파리의 낭만을 그린 시인 같은 화가였다.


벨 에포크(Belle Époque)란 프랑스어로 ‘아름다운 시대’라는 뜻으로, 19세기말부터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의 1871년부터 1914년까지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문화, 예술, 과학, 기술, 생활 수준이 눈부시게 발전한 황금기를 말한다.


벨 에포크에 프랑스의 미술은 인상주의, 아르누보, 후기 인상주의, 상징주의 등 다양한 예술 사조가 번성하고, 로트레크와 모네, 르누아르, 드가, 마티스, 피카소 등이 활약하며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풍성한 작품들이 양산되었다.


문학에서는 마르셀 프루스트, 에밀 졸라, 오스카 와일드 등이 이 시대를 대표하며, 자연주의, 상징주의, 데카당스, 심리주의 등의 사조가 공존하고, 인간의 내면과 사회적 문제, 예술적 실험을 중심으로 언어 예술의 깊이와 폭을 다채롭게 발전시켰다.


또한, 전기, 전화, 철도, 자동차, 비행기 등 새로운 기술이 일상의 편함과 풍요를 가져왔으며, 1889년에 건축된 에펠탑은 이 시대의 기술적 상징이자 파리의 자부심이 되었다.


이러한 안정과 풍요의 일상이 가능한 파리에서는 몽마르트르 언덕을 따라 물랑 루즈, 카페, 극장, 오페라 등이 번성하며 대중문화가 양산되었으며, 이에 로트레크와 같은 파리의 화가들은 몽마르트르의 삶과 낭만을 포스터와 그림 등을 통해 널리 전파했다.


이 같은 아름다운 시대는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막을 내리고, 이후의 예술은 더 어두운 공간에서 고뇌와 번민에 빠져들며 인간의 존재를 되새기는 실존주의적 관념에 몰두하게 되었다.


로트레크는 1864년 프랑스 알비의 귀족 가문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알퐁스 로트레크는 백작의 작위를 가진 인물이며,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 알퐁스의 사촌인 아델이었다.


그래서인지, 로트레크는 선천적으로 골격이 약하고 병약한 체질로 태어났으며, 이에 더하여 14세∼15세에는 다리에 골절상을 입어 하체가 더 성장이 멈춰진 상태의 신체적 장애를 갖게 되었다. 그의 키는 약 150cm에 불과했다. 이러한 신체적 상황은 그의 삶과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로트레크는 어린 시절부터 특별한 예술적 재능을 보였다. 이는 아마추어 화가였던 아버지와 삼촌의 영향 때문이기도 했다.


(Albi)_Mus%C3%A9e_Toulouse-Lautrec_-_Deux_chevaux_men%C3%A9s_en_main_-_Toulouse-Lautre.jpg?type=w773 Deux chevaux menés en main - Toulouse-Lautrec


그는 청년 시절 말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의 초기 작품에서 말은 중요한 소재였다. 로트레크는 귀족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말을 가까이 접할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와 스승 르네 프랭스토(René Princeteau)는 모두 말과 관련된 그림을 즐겨 그렸고, 로트레크도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았다.


또한 그는 다리 부상으로 인해 말을 탈 수 없게 된 후에도 말에 대한 애정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이는 그가 잃어버린 자유와 역동성을 예술로 승화시킨 방식으로도 해석된다.


그는 말의 근육, 움직임, 자세를 해부학적으로 과학적으로 관찰하고 이를 섬세하게 묘사했다. 그의 작품 속의 말은 주로 군인과 말, 마차를 끄는 말, 질주하는 말 등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후에 그의 인물 묘사에서도 큰 장점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로트레크를 파리로 보내, 레옹 보나, 페르낭 코르몽 등의 화가에게서 사사하며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걷도록 적극 지원했다.


로트레크의 파리 생활은 외관상으로는 매우 자유분방하고 낭만적이었다. 그는 몽마르트르의 술집과 매춘굴을 드나들며 그곳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그는 술과 여성, 유머와 풍자를 즐겼으며, 특히 압생트와 코냑을 섞은 터프한 칵테일을 즐겨 마셨다.


그러나 그의 가슴속에 자리한 외로움과 소외감은 더욱 깊어지고, 말년에는 알코올 중독과 매독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그는 1901년 36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그는 신체적 한계가 있어서인지 정서적으로나 창작활동에 있어서도 상류층의 위선 섞인 삶의 모습에 반감을 갖게 되었으며, 그래서인지 그는 몽마르트르의 뒷골목에서 어렵게 삶을 이어가는 무용수나 접대부 여성들의 애환에 애정을 가지고 그들의 일상을 그림 속에 담아냈다.


Henri_de_Toulouse-Lautrec_063.jpg?type=w773 Au Moulin Rouge: La Danse - Henri de Toulouse-Lautrec


로트레크 그림 속의 몽마르트르 여성들은 무대 위에서의 화려함보다는 무대 뒤에서 해묵은 고독과 욕망에 지친 피곤한 도시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로트레크에게 있어 그들은 특정화된 ‘누구’가 아니라, 일상의 주변에서 살아가는 불특정의 ‘그들’이었다. 그는 그들의 모습을 꾸밈없이 그대로 그렸으며, 이는 오히려 그녀들을 존중했기 때문이었다. 로트레크는 “나는 그들을 사랑했고, 그들은 나를 받아들였다”라고 말하며, 예술을 통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차이와 경계를 허물고자 의도했다.


로트레크의 작품은 일견 드가의 작품과 유사한 점이 없지 않다. 실제로 그는 드가를 매우 존경했으며 그의 화풍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드가는 로트레크가 자신의 작품을 모방하고 있다며 비판한 적도 있다 한다.


두 사람의 화풍은 그림 속의 대상과 이를 바라보는 관람자의 시선에서 큰 차이가 있다, 드가는 무대 위의 발레리나의 화려함을 그리고, 관람자는 무대 밖 멀찍이서 이들을 감상한다. 그러나 로트레크의 여성들은 결코 화려하지 않고 관람자와 그리 멀리 있지도 않다. 그의 작품에서 관람자는 외부의 감상자가 아니라 감정을 공감하는 현장의 동반자인 것이다.


로트레크는 고흐와도 가까이 교류하고 그의 강렬한 색채와 표현력에 영향을 받았다. 두 사람은 파리의 아틀리에에서 함께 작업하며 서로의 예술적 실험을 존중하고 격려했다. 로트레크의 포스터에는 고흐의 작품에서 와도 같은 강렬하고 굵직한 색감이 적잖게 사용되고 있다.


Henri_de_Toulouse-Lautrec_032.jpg?type=w773 Henri de Toulouse-Lautrec


그는 몽마르트르의 각종 업소를 광고하는데 활용한 포스터를 그렸다. 그는 포스터라는 장르를 ‘예술 작품’으로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포스터는 19세기 중반 석판 인쇄술(lithography)의 발달과 함께 상업적 광고와 대중문화의 중요한 매체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로트레크보다 약 30년 앞서 활동한 쥘 셰레는 석판화를 통해 밝고 경쾌한 색감과 여성 중심의 유쾌한 이미지로 파리의 오페라 극장이나 향수, 음료수의 광고용 포스터를 제작했다. 그는 ‘포스터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


로트레크와 거의 같은 시기에 활동한 에드몽 무샤는 아르누보 스타일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그의 화풍은 광고나 홍보물로서의 포스터 디자인에 큰 영향을 주었다.


로트레크는 기존의 포스터 양식에 대담한 구도와 강렬한 색채, 그리고 강한 윤곽선과 심리적 분위기까지를 강조하여, 단순한 광고물이 아닌 예술 작품으로서의 포스터를 창조한 것이었다.


특히 물랑 루즈와 같은 환락가의 인물들을 사실적이면서도 상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예술적인 가치와 함께 도시 대중문화의 기록물로서도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Moulin_Rouge_%E2%80%93_La_Goulue,_by_Henri_de_Toulouse-Lautrec.jpg?type=w773 Moulin Rouge La Goulue - Henri de Toulouse-Lautrec


그의 포스터 <물랑 루즈의 라 굴루>는 상업성과 예술성을 결합한 포스터 예술의 대표작으로, 현대 그래픽 디자인의 한 전형이 되었다. 강렬한 윤곽선, 평면적 색채, 대담한 구도는 일본 우키요에(목판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우키요에(浮世絵)는 일본의 전통적인 목판화 양식으로 특히, 에도 시대(17세기~19세기)에 유행했다. ‘우키요’는 ‘떠도는 세상’ 또는 ‘현세의 덧없음’을 의미하고, ‘에’는 ‘그림’을 뜻한다. 즉, 우키요에는 ‘현세의 삶을 그린 그림’이라는 의미다.


이는 대부분 목판화 형식으로 제작되었으며, 대량 인쇄가 가능해 서민층에게 널리 보급되었다.


그림의 소제는 주로 유곽의 여성, 가부키 배우, 스모 선수, 계절 풍경, 명소, 전설, 미인화, 춘화(성적 표현) 등 다양한 일상과 유행을 담았다.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니시키에(錦絵)’라는 다색 인쇄 기법이 도입되어 화려한 색채 표현이 가능해지고, 19세기 후반 유럽에 소개되어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로트레크의 작품 <스타킹을 올리는 여인>(Femme tirant son bas)은 몽마르트르의 사적인 순간을 포착한 그의 대표적인 인물화다. 이 작품은 단순한 누드나 에로티시즘을 넘어서, 여성의 일상적 몸짓과 내면의 고요함을 담아낸 로트레크 특유의 감성이 빛나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림 속 여인은 의자에 의지하여 스타킹을 올리는 있다. 여인은 몽마르트르의 업소에서 생업을 이어가는 한 사람이고, 지금 의사 앞에서 성병 검사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 지극히 사적인 상황으로 감추고 싶은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녀는 관람자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 같은 동작을 자연스럽게 계속하고 있다. 여인을 지켜보고 있는 의사는 곧 그림 밖의 관람자를 대신한다. 의사의 시선에서, 관람자의 입장에서 여인의 동작을 어찌 에로틱하다고만 느낄 수 있겠는가?


로트레크는 빠르고 날카로운 선, 절제된 색채, 밋밋한 배경, 부드러운 명암 처리로 여인의 존재감을 강조했다. 여인의 존재감은 성적인 관능미가 아니라 건강한 삶과 일상에 대한 당당하고도 단호한 자기애를 말하는 것이다.


그가 몽마르트르의 여인들을 그린 작품으로는 <스타킹을 올리는 여인> 외에도 <침대>, <입맞춤> 등이 있다.


Toulouse-Lautrec_-_Au_lit_Le_baiser,_lot-5946122.jpg?type=w773 Au lit Le baiser - Toulouse-Lautrec


로트레크는 결혼하지 않고 몽마르트르의 사창가 여성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갔으며, 그에게 있어 몽마르트르의 여성들은 단순한 성적 관계를 넘어 예술적 주제이자 인간적인 동반자였다. 그는 이 여성들에게서 자신의 신체적 결핍과 사회적 소외에 대한 공감과 위안을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몽마르트르의 낭만적 보헤미안이자,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에 대한 깊은 공감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활동가였던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로트레크가 몽마르트르를 함께 살아간 대다수의 다른 예술가들처럼 그리 가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상업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성취한 드문 화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포스터는 호황을 누리고 있던 당시 몽마르트르 업소들의 홍보물로서 대량 판매되었다. 또한 그는 명문 가문 출신답게 말년까지도 어머니로부터 적지 않은 지원을 받았다.


그가 몽마르트르의 낭만을 즐기고 몽마르트르 여성들을 배려하면서도 자기만의 창작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안정된 경제적 배경이 한몫을 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이 글의 저작권은 작성자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나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