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페우스 – 화려한 비극은 더 참혹하다

명화는 혁명을 한다

by 다두



Gustave_Moreau-Orphee-RF_104.jpg?type=w773 Orphee - Gustave Moreau


모로가 1865년에 캔버스에 유채로 그렸다. 154 × 99.5cm 크기로 오르세 미술관에 있다.


구스타프 모로(Gustave Moreau)는 프랑스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 신화와 성서의 비극적인 서사를 화려하고 환상적인 방식으로 그려낸 인물이다.


그는 1826년 4월 6일 파리에서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나 미술학교로 진학하여 프랑수아 에두아르 피코에게 사사했으며, 들라크루아와 테오도르 샤세리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857년부터 2년간 이탈리아에서 유학하며 르네상스 회화를 연구하고 신화적 주제와 상징적 기법을 발전시켰다. 당시 프랑스 미술계는 사실주의와 인상주의가 부상하던 시기였지만, 모로는 고전과 신화에 깊이 빠져들며 이탈리아의 고전적 화풍에서 새로운 방식을 찾아내고 싶었던 것이다.


이탈리아에서의 유학은 그의 예술 세계를 결정한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시에나, 밀라노 등 르네상스와 매너리즘의 중심지를 두루 여행하며 고대와 르네상스 미술을 깊이 연구했다.


그는 피렌체에서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을 직접 보고 인체의 표현과 상징적 구도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베네치아에서는 티치아노와 베네치아 학파의 화려한 색채와 장식성에 충격을 받았으며, 시에나와 피사에서는 중세 르네상스의 종교화에서 큰 영감을 얻었다.



Degas_-_Portrait_de_Gustave_Moreau,_Vers_1860.jpg Portrait de Gustave Moreau - Degas


1858년에는 로마에서 에드가 드가(Edgar Degas)를 만나 교류하며 서로의 창작활동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었다.


드가는 훗날 “모로는 우리에게 신들이 시곗줄을 매고 있다고 믿게 할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드가의 이 같은 평가는 모로가 신화적, 상징적 세계를 탐구하면서도 그 속의 등장하는 신의 존재를 현세의 시간 속에서 재해석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보이고 있음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1892년 모로는 파리 미술학교 교수로 초빙되어 앙리 마티스, 조르주 루오, 알베르 마르케 등 후대의 거장들을 길러내기도 했다.


그는 1898년 4월 18일 파리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사망 후 그의 집은 모로 박물관(Musée Gustave Moreau)으로 개축되어 약 8천 점에 달하는 유작을 공개하고 있다.



Gustave_moreau,_galatea,_1880_ca._02.JPG?type=w773 Galatea - Gustave Moreau


그의 <오르페우스>는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연구한 고전과 신화의 상징성과 화려한 장식성이 여실히 구현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오르페우스는 트라키아 지역 출신의 시인이자 음악가이며 예언자다. 그는 트라키아 왕과 뮤즈 중의 하나인 칼리오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리라 연주의 대가로, 그가 리라를 연주하면 동물은 물론이고 나무나 바위까지도 감동을 받아 춤을 추었다 한다.


그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끔찍이 사랑했다. 그러나 결혼 직후 에우리디케는 들판에서 산책하다 뱀에 물려 죽고 말았다. 그녀의 영혼은 저승으로 내려가게 되었고, 오르페우스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


오르페우스는 아내를 되찾기 위해 저승으로 직접 내려갔다. 그는 리라를 연주하며 노래했고, 그 음악은 저승의 신들과 망자들까지 감동시켰다. 저승의 신 하데스와 그의 아내 페르세포네도 그의 간절한 사랑과 음악에 감동하고, 오르페우스에게 단 한 가지 조건만을 제시하고 아내를 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그 조건은 오르페우스가 다시 지상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 뒤돌아보지 말 것이었다. 오르페우스는 조건을 받아들이고 아내를 앞질러 지상으로 걷기 시작하였다.


지상에 거의 다다르는 순간이었다. 오르페우스는 아내가 제대로 뒤따라오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도저히 참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는 순간에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그 순간 에우리디케는 다시 저승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오르페우스는 영원히 그녀를 잃고 만 것이다.


아내를 잃은 오르페우스는 슬픔에 잠겨 세상과 특히, 여자를 멀리하고, 술과 광란의 신 디오니소스의 제의조차 거부했다. 이에 격분한 디오니소스는 자신의 추종자인 마이나데스(광란의 여인들)를 보내 오르페우스를 공격하게 했다. 결국 오르페우스는 마이나데스에게 찢겨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그의 잘린 머리와 리라는 강을 따라 흘러가며 여전히 노래를 연주하며 세상을 감동시켰다.


모로는 <오르페우스>에서 화면의 중심에 트라키아의 한 소녀가 오르페우스의 잘린 머리를 리라 위에 올려 들고 있는 모습을 배치했다. 그녀의 옷과 장신구는 두터운 물감으로 양각처럼 돋보이며 화려하게 빛나고 있다. 보석처럼 섬세하게 묘사되어 빛나고 있다. 이 같은 장식은 아름다운 사랑과 참혹한 종말의 서사에 비감(悲感)의 깊이를 더하게 한다.


화면의 전체는 극도의 정막과 함께 일체의 미동도 없는 초월적인 순간에 정지되어 있다. 마치 폼페이 유적에서 발굴된 굳은 시신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드가가 말한 시곗줄의 의미가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640px-Oedipus_and_the_Sphinx_1864.jpg?type=w773 Oedipus and the Sphinx - Gustave Moreau


신화적 비극과 잔혹함을 화려한 장식으로 버무린 모로의 또 다른 작품으로는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가 있다.


이 작품은 그리스 신화의 비극적 영웅인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 도전하는 순간을 그린 작품으로, 모로의 명성을 입증한 대표작이다.


오이디푸스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인 테베 왕 라이오스와 왕비 이오카스테로부터 버려진다. 이유는 아버지인 라이오스가 델포이 신탁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다’라는 예언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라이오스는 당초 오이디푸스를 죽이려 했지만 직접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아서 목동에게 오이디푸스의 발목을 꿰어 묶고(이 때문에 그의 이름은 ‘부은 발’이라는 뜻의 Oedipus가 됨) 키타이론 산에 버리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목동은 이 아기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코린토스 왕 폴리보스와 왕비 메로페에게 아기를 맡겼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출생을 알지 못한 채 코린토스 왕가의 양자로 자랐다.


청년이 된 오이디푸스는 “너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다”라는 델포이 신탁을 듣게 된다. 그는 이 신탁이 말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코린토스의 왕과 왕비라고 믿고, 가혹한 신탁을 피하기 위해 코린토스를 떠나 테베로 향한다.


오이디푸스는 테베로 가는 길에 마차를 타고 가던 한 노인과 시비가 붙어 그를 죽이고 만다. 그 노인은 바로 그의 친부 테베 왕 라이오스였다, 오이디푸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탁의 한 가지를 실천하게 된 것이다.


당시 테베는 라이오스 왕의 죄악으로 신들의 저주를 받고 있었다. 신들은 괴물 스핑크스를 테베에 보내 그의 수수께끼를 맞히지 못하는 테베 사람은 모두 잡아먹도록 명령했다.


오이디푸스도 테베에 살아 들어가기 위해서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야만 했다.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에게 “아침에는 네 발, 낮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오이디푸스는 ‘인간’이라고 답했다. 그는 스핑크스를 물리치고 테베에 입성했다.


테베 사람들은 그를 영웅으로 환영하고, 라이오스의 왕좌를 승계토록 했다.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왕이 되어, 라이오스의 부인이던 이오카스테와 결혼했다. 이오카스테는 그의 친어머니였고, 오이디푸스는 신탁의 두 번째 부분까지 실현한 것이다.


후에 테베에 역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델포이 신탁은 역병의 원인이 라이오스 왕의 살해 사건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즉, 라이오스 왕을 살해한 자를 찾아내어 처벌해야만 역병이 멈출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이디푸스는 맹인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불러 진실을 물었다. 테이레시아스는 처음에는 말하기를 거부하다가, 결국 오이디푸스가 라이오스를 죽인 자라고 폭로했다. 오이디푸스는 이를 음모라고 생각하고 분노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길에서 노인을 죽인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당시 현장을 목격한 목동을 불러 물었는데, 목동은 그 노인이 라이오스 왕이었다고 증언했다.


이때 또 다른 목동이 나타나, 오이디푸스가 사실은 테베 왕가의 아들이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그는 라이오스로부터 아기를 산에 버리도록 명령을 받았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코린토스 왕가에 맡겼다고 고백했다.


오이디푸스는 비로소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만다.


이후 이오카스테는 절망 속에 목을 매어 죽고,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된 뒤 테베를 떠나 방랑하게 된다.


모로의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에서 젊은 영웅 오이디푸스는 붉은 창을 들고 나체에 가까운 모습으로 당당히 서 있다. 스핑크스는 여성의 얼굴, 사자의 몸,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괴물로, 오이디푸스의 몸에 매달려 그를 위협하는 듯 하지만 사실은 유혹적인 눈빛을 보내고 있다. 화면 하단에는 스핑크스에게 잡아먹힌 희생자들의 잔해가 감춰져 있다.


모로는 생사의 갈림길을 놓고 대결하는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의 서사를 마치 이브의 유혹에 갈등하는 아담의 모습처럼 묘사했다.


모로에게 있어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지혜롭게 풀어낸 영웅이 아니라, 원죄와도 같은 스핑크스의 유혹에 빠져 신탁의 저주를 스스로 실천한 비극의 주인공이다. 그는 이 같은 가혹한 운명의 순간을 마치 에덴의 동산처럼 화려하고도 신비하게 묘사했다. 너무 화려해서 더 저주스럽다.


비극은 언제나 달콤하고 아름다운 유혹에서 시작한다. 그런 결말은 더욱 참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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