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의 진실을 본다
검은 9월단의 뮌헨 올림픽 이스라엘 선수단 테러 사건으로 이스라엘 정부와 국민의 경악과 분노는 하늘을 치를 기세였다.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는 “우리는 그들을 지구 끝까지 추적할 것이다”(We will chase them to the ends of the earth.)라고 선포하고, 모사드에게 검은 9월단 관련자들을 모두 추적하여 제거하도록 지시했다.
모사드는 ‘신의 분노 작전’(Operation Wrath of God)이라는 이름으로 10년 이상 중동과 유럽 전역에서 뮌헨 올림픽 테러에 보복 암살 작전을 수행했다. 이 작전은 국제사회에 이스라엘과 모사드에 대한 경외와 공포라는 이중의 인식을 각인시켰다. 일각에서는 국가적 반테러 행위에 대한 법적 윤리적 정당성에 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모사드는 암살조, 경호조, 은신처 확보조, 통신조 등 분야별 최고의 전문요원으로 5개의 암살팀을 조직했다. 검은 9월단 대원들과 이를 기획하고 지휘한 PLO 고위 인사들을 암살 대상자로 선정했다.
모사드는 유럽 각국에서 활동하는 공식, 비공식 요원들과의 긴밀히 협조하여 대상자들의 위치를 추적했다. 작전은 은밀성과 ‘부인 가능성’(plausible deniability)에 초점을 맞춰 진행되었다.
첫 번째 목표는 PLO 이탈리아 주재 대표 와엘 즈와이터였다. 모사드는 즈와이터가 검은 9월단의 조직원으로 뮌헨 테러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서안지구 나블루스 출신으로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며 정관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팔레스타인 문제를 제기하고 지지를 호소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어에 능한 작가이기도 한 그는 아라비안나이트를 이탈리아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1972년 10월 16일 장을 보고 귀가 중인 즈와이터가 아파트 로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11발의 총격이 울렸다. 즈와이터는 현장에서 사망했다. 11발의 총격은 뮌헨에서 희생된 이스라엘 선수 11명을 상징했다.
즈와이터가 뮌헨 테러에 관여했다는 사실은 명확히 증명되지 않았다. 이탈리아 정부는 이스라엘의 즈아이터 암살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그가 평화주의자였으며 정치적 폭력에 반대했다고 주장했다. 모사드 내부에서도 그가 무고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1973년 암살팀은 PLO 프랑스 주재 대표 마흐무드 함시리(Mahmoud Hamshari)의 파리 아파트를 알아내고 그의 일상과 동선을 정밀하게 추적했다. 요원들은 전기 수리공으로 가장해 그가 외출한 사이를 틈타 아파트 거실에 폭탄을 설치했다. 모든 작업은 프랑스 정보기관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진행됐다.
1월 8일 오전, 함시리는 거실의 전화벨 소리를 듣고 수화기를 들었다. 수화기 너머로 한 남성이 “당신이 마흐무드 함시리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순간 전화기가 폭발하고 함시리는 다리와 복부를 움켜쥐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아파트에 함께 있던 아내와 딸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며칠 후 사망했다.
함시리는 외교관으로서 팔레스타인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각종의 문화외교 활동에 주력했다. 유럽 내 팔레스타인 유학생을 조직하여 팔레스타인 관련 문화 활동을 전개하고 팔레스타인의 정체성과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스위스 영화감독 장뤼크 고다르(Jean-Luc Godard)가 요르단과 레바논을 방문하도록 주선했다. 고다르는 팔레스타인 무장 대원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활동을 촬영했다.
이스라엘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가 검은 9월단과 직접 관계가 있다는 명확한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모사드의 세 번째 목표는 바셰르 알 쿠바이시(Basil al-Kubaissi) 교수였다. 그는 이라크 바그다드 출신으로 파리의 여러 대학에서 법학을 강의하는 팔레스타인 지식인이었다. 모사드는 그가 PLO의 인민전선(PFLP)과 연계되어 있고, 검은 9월단의 테러를 기획한 인물 중의 하나로 판단했다.
1973년 4월 모사드 요원들은 파리 시내 아파트로 귀가 중인 쿠바이시를 노상에서 여러 발의 총격으로 살해했다. 총격 후 요원들은 쿠바이시의 시신을 방치한 채 신속히 도주하여 은신했고, 프랑스 경찰은 수사에 나섰으나 끝내 암살자의 정체를 특정하지 못했다.
모하메드 부디아(Mohammed Boudia)는 ’신의 분노 작전‘(Operation Wrath of God)의 네 번째 대상이었다. 그는 알제리 출신으로 검은 9월단 유럽 지부를 관리하며 자금과 무기를 조달하고 무장 작전을 기획하여 실행해 온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극작가로 위장하여 프랑스 문화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이스라엘의 눈을 철저히 피해왔었다.
1973년 6월 부디아는 자신의 자동차에 열쇠를 꽂아 시동을 거는 순간 자동차가 폭발하면서 폭사했다. 모사드는 그의 일상을 면밀히 추적하여 그의 자동차 운전석 아래에 폭탄을 설치한 것이었다.
모사드의 다음 작전은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3명의 PLO 고위 인사를 대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됐다. 목표는 PLO 선전 담당 카말 아두완, 검은 9월단 작전 사령관 무함마드 유세프 알 나자르, PLO 대변인 카말 나세르 등 3명이었다. 이스라엘은 이들을 제거하는데 특수부대 사예렛 마트칼(Sayeret Matkal)을 투입해 모사드를 지원토록 했다. 작전은 ‘스프링 오브 유스 작전’(Operation Spring of Youth)이라는 별도의 이름으로 진행되었다.
특수부대 요원들은 민간인 복장으로 위장하고 베이루트에 잠입하여 3명의 거처와 동선을 각각 파악한 후, 야음을 틈타 그들이 자고 있는 아파트를 같은 시간대에 급습하여 소음기가 장착된 권총과 폭발물로 전원 살해했다.
다음은 알리 하산 살라메(Ali Hassan Salameh)였다. 그는 PLO 아라파트 의장의 경호 책임자이자 검은 9월단의 작전 사령관으로서 레바논에서 활동했으며, 잘생긴 외모와 세련된 스타일로 베이루트 고위층과 사교계에서는 ‘붉은 왕자’로 불리며 유명세를 치르고 있었다.
1979년 1월 22일 살라메의 일상을 미행한 모사드는 그의 차량에 폭탄을 설치했다. 모사드는 살라메를 태우고 달리는 차량을 원격 조정장치로 폭파했다. 차에 타고 있던 살라메와 경호원 4명 모두가 사망했다.
사실 살라메는 모사드로서는 원한의 타깃이었다. 1973년 모사드는 노르웨이의 릴레함메르에서 살라메의 목숨을 노렸으나 실패한 적이 있었다. 관광객으로 위장한 모사드 요원 6명은 살라메가 은신 중이라는 첩보에 따라 한적한 산악 도시 릴레함메르에 잠입해 그의 동선을 확인하고 미행했다.
임신한 아내와 영화를 보고 귀가 중이던 그가 아파트 입구에 도착하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모사드 요원 2명이 그에게 다가와 총격을 가했다. 그는 가슴과 머리에 3발의 총탄을 맞고 즉사했다. 요원들은 대기 중인 차량에 올라타고 신속히 현장을 이탈했다.
노르웨이 경찰이 현장에 있었던 부인의 진술과 차량 번호를 확인하고 암살범을 추적했다. 캐나다 위조 여권을 소지한 모사드 요원들은 미처 노르웨이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노르웨이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수사 과정에서 요원들이 사살한 사람은 살라메가 아니라 현지 바에서 웨이터로 일하며 평범한 삶을 살아온 모로코 출신 이민자 아흐메드 부치키로 밝혀졌다.
노르웨이 정부는 자국 영토에서 벌어진 불법 암살 작전에 대해 이스라엘에 강력히 항의하고 체포된 요원들을 법정에 세웠다. 캐나다 역시 자국 여권이 위조되어 사용된 데 대해 외교 채널을 통해 엄중 항의했다. 국제사회는 모사드 비밀 작전의 정당성과 도덕성을 질타했다. 외교적으로 곤경에 처한 이스라엘은 유럽 내 여러 모사드 비밀 활동 거점을 폐쇄하고 한동안 해외 작전을 중단해야 했다.
‘신의 분노 작전’의 극적인 진행과 충격성은 다양한 장르의 문화적 소재로 활용되며 세계인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모사드 요원의 회고를 바탕으로 한 논픽션 ‘Vengeance’와 ‘Mossad : The Greatest Missions of the Israeli Secret Service’는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2005년 영화 ‘뮌헨’을 통해 ‘신의 분노 작전’에 투입된 요원들의 심리적 갈등과 도덕적 딜레마를 깊이 있게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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