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의 진실을 본다
요르단 알카메라 전투 이후 파타를 중심으로 한 PLO와 아라파트 의장은 요르단 내에서 사실상의 자치권을 행사하며 정부군 못지않은 강력한 무장 조직으로 성장했다.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은 주권이 위협받고 있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요르단 사막 한가운데서 벌어진 PLO 무장세력에 의한 항공기 납치와 폭파 사건은 후세인 국왕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미국과 유럽 등 주요 국가들은 요르단의 주권을 지지하고 PLO의 무장 투쟁 방식에 대해 우려를 표하기 시작했다. 특히 항공기 납치와 같은 테러 행위는 국제 여론을 악화시키기에 충분했다. PLO는 점점 ‘테러 조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1970년 9월 요르단의 수도 암만과 주요 도시에서 요르단 군과 PLO 간의 격렬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검은 9월(Black September) 사건이라고 부르는 이 전투는 내전의 양상으로까지 확대됐다.
요르단 군 70,000여 명이 전투에 참여했다. PLO는 무장세력과 요르단 내 민병대 요원을 규합하여 30,000여 명의 대원들이 요르단 군과 맞섰다. 시리아는 10,000여 명의 병력과 300여 대의 전차를 보내 PLO를 지원했다. 그러나 PLO가 요르단 군을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민간인을 포함한 수천 명의 사상자와 최소 50,000만여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다. 더 이상의 혼란을 감수하기 힘든 후세인 국왕은 PLO에게 요르단을 떠나도록 최후통첩했다.
주변 아랍 국가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일부는 후세인 국왕의 결정을 비난하며 PLO를 지지하고, 다른 일부 국가들은 중동 아랍 국가의 안정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요르단의 주권과 안정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라파트 의장은 요르단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새로운 거점으로 레바논을 선택했다. 당시 레바논은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하고, 다양한 종파와 민병대가 다투고 있는 상황으로 PLO가 활동하기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지역이었다.
수천 명의 PLO 대원들과 가족들은 트럭으로 요르단 북부 국경으로 향했다.
후세인 요르단 국왕은 철수하는 PLO 대원들의 안전 보장을 약속했다. 그러나 현장의 요르단 군은 철수하는 PLO 대원들의 무장 해제를 요구했고, 이에 양측 간 교전이 발생하여 상당수의 대원이 사망했다.
PLO의 요르단 철수는 살아남기 위해 도주하는 패잔병 무리와 다름없이 처참했다.
아라파트 의장은 베이루트 한복판에 PLO 본부를 마련하고 조직을 정비했다. 그는 아랍 국가들에 대한 배신감을 드러내며 자체적인 조직력과 무장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파타(Fatah), DFLP, PFLP 등 여러 무장 조직을 재편하는 한편, 외교, 정보, 언론을 담당하는 부서를 편성하고 적극적인 대외 활동을 추진했다. 또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지지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난민촌을 중심으로 학교, 병원 등을 운영하며 복지 서비스도 제공했다.
PLO는 국가 수준의 조직으로 재편되었으며 아라파트 의장은 일반적인 국가의 수반과 다름없이 활동했다. 외교 사절단을 파견하고, 국제기구와의 협상에도 참여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PLO를 사실상 자신들의 정부로 인식했다. PLO는 레바논에서 ‘국가 내 국가’와 같은 위상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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